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3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33화(833/1105)
833회
86. 공작님의 납치 (1)
이곳이 어젯밤 잠들었던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한 건 본능에 의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본능은 물리적인 억압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내가 왜 묶여 있는 거야?!”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가운데, 비교적 자유로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내 몸을 확인했다.
튼튼하고 두꺼운 가죽끈이 나를 침대에 고정해 두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어젯밤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괴상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던 걸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런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아연함을 느끼며 넋을 놓고 있는데 세르펜스. 아니, 타락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다리를 꼰 자세로 삐딱하게 앉은 타락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녀석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웬 종이들이 놓여 있었다.
“내가 어제 방을 정리하던 걸 보고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어차피 눈을 감으면 보이지도 않는 것들인데, 잠이 안 올 정도로 신경이 쓰인다며 굳이 가려 놓길래···.”
“설마하니 내가 들떠서 그랬다고 생각한 거야? 절대 아니야!”
“소매 사이로 손목에 희미한 밧줄 자국이 보이길래 셔츠를 살짝 들춰 확인해 봤습니다.”
타락펜스가 다 알고 있으니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투로 말했다.
그딴 얘기를 존댓말로 해 봤자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은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오해다. 하지만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이해한다.
나도 어제 씻으면서 이상한 모양으로 남은 멍 자국을 보긴 했으니까.
하지만 하루 이틀이면 회복될 수 있을 정도로 멍이 옅었고, 꾹 누르지 않는 이상 아프지도 않길래 무시하고 넘어갔다.
‘타락펜스에게 구구절절 이러한 멍이 생긴 사정을 설명하며, 치료를 부탁하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래서 말을 안 했던 건데 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째서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인지, 그 이유를 캐묻는 건 뒷전으로 밀려났다.
당장 해명을 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위기감에 진땀이 흐르고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번쩍였다.
“악마를 잡으려고 악숭 살롱에 잠입해서 일일 악숭 체험을 했는데, 그 살롱이 그쪽 취향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서! 의심받지 않으려고 그렇게 묶였던 거야!”
“어제 펠로 왕국의 8왕자와 대화할 때 언급했던 체험이라는 게 그런 체험이었나?”
“그래, 맞아! 악마에게 기습을 가하려고 최적의 타이밍을 재다 보니, 정말 어쩔 수 없이! 원치 않게! 묶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고 보니 그때 나를 직접 묶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얘기를 했던 것도 같은데···.”
“좋다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거든?! 세르펜스는 그런 거에 트라우마가 있잖아. 하지만 내가 묶는 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니까···.”
“이전에도 나를 묶어 보셨나 봅니다.”
타락펜스의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여기서 그렇다고 인정하면 녀석은 나와 현재펜스가 묶고 묶이며, 남들과는 다른 취미 생활을 즐겼다고 오해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 나는 또 새로운 해명을 늘어놓아야겠지.
‘내가 왜 묶여있는 상태로,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이따위 변명이나 하고 있어야 하지?’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피가학적인 취향으로 오해받는 것보다, 가학적 취향으로 오해를 받는 게 내 안위에 이로울 것 같기도 하니.
그냥 오해하게 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바로 잡아야겠다.
“무슨 오해를 하든 상관없는데, 나는 절대로 세르펜스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줘.”
“흐음···, 알겠다.”
“것보다 언제까지 나를 묶어둘 셈이야?”
“이곳에는 함정이 많으니 계속 묶여 있는 편이 안전할 겁니다.”
얘는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온 걸까?
정신이 어질하다.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닌데···. 계속 이렇게 누워서 대화할 수도 없으니, 일단 풀어 줘. 침대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 두겠습니다.”
“그러든가.”
그렇게 대답하고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입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가죽끈을 고정한 버클을 풀어낸 녀석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어, 내 손목과 침대를 연결해버린 까닭이다.
“마력 구속구와 밧줄은 가지고 다니지만, 수갑은 가지고 다니지 않는데?”
“어제 대화를 나눴던 방 서랍장에 들어 있길래 챙겨 왔다.”
“······.”
그걸 대체 왜 열어 봤냐든가, 수갑 말고 또 뭘 챙겨왔냐든가.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이런 주제의 대화는 그만 하고 싶기도 하고.
“그보다 여기는 대체 어디야?”
“악마 숭배자들이 은신처로 이용하는 장소 중 하나다.”
“엑?!”
“이곳을 관리하던 자가 한 명 있긴 했지만, 조용히 처리했으니 당황할 것 없다.”
타락펜스가 악숭이들의 은신처를 꿰고 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녀석이 이곳에 있던 악숭이를 조용히 슥삭한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점이 하나 있었다.
“여길 어떻게 찾아온 거야? 우리가 어제 있던 그 장소가 어딘지, 너는 모르잖아?”
“펠로 왕국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지형을 살피며 날다 보니 어딘지 대충 감이 오더군.”
“아, 그러셔? ···가 아니라, 날아? 난다고?! 너도 날 수 있어?!”
“내게 세상이 재시작되기 전의 기억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항 아니었나?”
1회차의 기억을 보고 신성력 날개를 만들어 비행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뜻이다.
애초에 세르펜스가 개발한 기술이니, 그런 방법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을 터.
그런데도 내가 놀랐던 건, [성검의 주인]에서 타락펜스가 제 능력으로 비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능력, 언제 쓴 적 있어?”
“실제로 써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혹시 1회차의 기억을 봤다는 걸 마왕에게 숨기려고 그런 거야?”
“마왕은 모든 기억을 유지한 채로 다시 시작했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타락펜스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툭 던지듯이 말했다.
마왕과 달리 자신은 성검에 찔려가며 조금씩 기억을 모아가야 했으니.
정보의 불균형을 극복하고자, 자신이 1회차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는 뜻이다.
“악숭 세력에 들어갈 때부터 마왕의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어?”
“처음부터 그럴 작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 손을 잡았을 뿐인 상대에게, 굳이 내 정보를 넘겨서 좋을 건 없잖은가.”
“마왕에게 1회차의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는 걸 보면, 그쪽은 너한테 미주알고주알 전부 떠벌린 것 같은데···?”
“떠들어댄 건 맞지만, 대놓고 밝히지는 않았다. 내가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면 어떠한 삶을 살았을지 넌지시 흘리고. 성검의 선택을 받든 받지 아니하든, 결단코 행복해질 수 없었을 거라며 신 룩스메아와 이 대륙을 원망하고 미워하길 종용했지.”
내가 질문하는 족족 타락펜스는 성실히 대답하며, 묻지도 않은 부분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일방적으로 내게서 현재펜스의 정보를 캐내기만 했던 어제에 비해, 훨씬 협조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이 협조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대화에 국한된 얘기다.
대답을 잘해준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강압적이다.
“더 자세히 묻고 싶기는 한데 일단 그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고 싶어.”
“당신이 자고 있을 때 내가 데리고 나왔습니다.”
납치범 주제에 말투만 정중하면 다인가?
외려 조롱당하는 기분만 들 뿐이니까, 차라리 반말을 계속 유지해 줬으면 좋겠다.
나로 하여금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려고 고의로 이러는 거라면 할 말 없지만.
“그런 당연한 얘기는 됐고. 일행들은 알고 있어?”
“어젯밤 황태자가 찾아왔을 때, 피곤해서 늦게까지 잘 예정이니 깨우지 말라고 얘기해 두긴 했지만···. 지금쯤이면 다들 일어나서, 방 안에 기척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겠지.”
쫓아오는 걸 따돌린 것도 아니고, 일행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빠져나온 모양이다.
과연 일행들이 이곳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우려와 별개로 나는 안도를 느꼈다.
타락펜스는 강하다. 짝퉁 흡혈귀 악마보다 훨씬 더.
만약 일행들이 녀석의 앞을 막아섰다면, 다들 분명 크게 다쳤을 테다.
“휴마누스가 방에 왔었어? 언제? 왜?”
“당신이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지막 방을 열어봤더니 의외로 멀쩡하길래, 혹시 방을 바꿀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러 왔다고 했다.”
“멀쩡한 방이···, 있었다고···?”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그 방에서 잤으면 똑같이 납치를 당하더라도, 이런 괴상한 침대에 묶인 채 눈을 뜨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지금처럼 손목에 수갑을 차는 일도 없었겠지.
“아, 그래. 잘 생각해 보니 악마가 2층에 있다가 내려온 거니까, 멀쩡한 방이 하나 정도는 있을 만도 하네! 어제는 왜 이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거지?!”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한다.”
원흉인 네가 그런 소릴 하냐는 말이 하고 싶어 입술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서 뭐 하나 싶어서 그냥 하던 얘기나 계속하기로 했다.
“너, 함께 싸우고 성장해 나가며 기댈 수 있는 동료를 원했던 거 아니었어?”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대단하군.”
“역시 맞구나? 그런데 대체 왜 나를 납치한 거야?”
“어째서 불만스러워하는 거지? 나와 둘이서 몰래 도망치는 건, 당신도 바라던 바 아닙니까?”
타락펜스가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듯 받치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어이를 상실한 것도 잠시.
녀석이 ‘은거’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은거를 하더라도 성검은 놓고 와야지! 그걸 냅다 가져와 버리면 세상은 누가 지켜!!”
“그래도 악마 숭배 세력과 싸우기는 할 터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혼자서 싸울 셈이야?”
“현재의 내가 그자들과 동료가 될 수 있었던 건,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잖습니까. 당신만 내 곁에 있다면, 새로운 동료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이 대륙에 그들만 한 인재는 또 없어.”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추적당할 위험을 감수하며, 그자들을 죽이지 않고 몰래 빠져나왔잖은가?”
녀석의 대답을 듣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나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는 뜻을 담아 녀석을 노려보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자들을 적대할 생각이 없으니. 어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일행 중 당신의 발언권은 상당히 강하고, 특히 나에 관해서는 거의 일임한 듯 보였다.”
“그래서 뭐야? 내가 현재펜스 대신 널 선택하고 나면 모두 내 뜻에 따라줄 테니까, 그때 그들에게 돌아가겠다고?”
“잘 알고 있군. 그들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면 나를 선택해라.”
타락펜스가 야욕을 드러내며 명령조로 말했다.
그나마 대화는 온건하게 흘러가나 했건마는 내 착각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