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3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34화(834/1105)
834회
86. 공작님의 납치 (2)
일단 거짓말로 타락펜스를 택하겠다 속이고 일행들과 합류하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하나 모두가 힘을 모아도 타락펜스에게 성검을 빼앗는 건 불가능하다. 지혜를 모으려 해도 녀석이 훼방을 놓겠지.
아니, 훼방만 놓으면 오히려 다행이다.
여차하면 모두 타락펜스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모든 광경을 1인칭으로 지켜보게 될 현재의 세르펜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나는?’
휴마누스가 죽는다면 성검은 오롯이 타락펜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터.
현재펜스의 인격이 돌아오는 건, 대륙의 안전이 확보되어 성검이 반환된 이후가 될 테다.
그때까지 내가 타락펜스의 곁에서 버틸 수 있을까?
어찌어찌 버틴다 하더라도, 돌아온 현재펜스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리란 보장은?
애초에 성검 덕분에 자신의 인격이 육체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걸 빤히 알면서, 타락펜스가 대륙의 위기를 완전히 극복하려 하긴 할까?
‘정든 동료들이 모두 죽고, 세르펜스는 영영 돌아올 수 없다면···.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기는 한가?’
이래서야 이 말 같지도 않은 도피 행각에 내가 더 적극 나서야 할 판이다.
타락펜스가 성검을 휴마누스에게 돌려주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절대로 일행들과 마주치면 안 될 것 같다.
“고민을 한다는 건 여지가 있다는 뜻이겠지?”
침묵이 길어지자 타락펜스가 턱도 없는 소리를 해 댔다.
위험한 사람이 무언가를 강요하면 안전에 위협을 느껴서, 아무리 싫어도 딱 잘라 거절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도 모르나 보다.
나는 녀석의 물음에 대답하길 회피하고자 다른 화두를 꺼냈다.
“내가 끝까지 너를 선택하지 않고, 새로운 동료도 구하지 못한다면 어쩔 생각이야?”
“상관없다. 내가 원한 건 함께 싸워줄 동료가 아니라···, 으음···.”
타락펜스가 말을 하다 말고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내려 본 적이 없는 까닭일 테다.
녀석이 답을 찾는 동안 아침 식사 준비라도 할까 싶어,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찾았다.
애석하게도 아공간 주머니는 저 멀리 테이블 위에 있었다. 여기서 아무리 손을 뻗어 봐야 닿을 리가 없다.
허탈함을 느끼며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테이블 다리에 기대어 세워진 세니어가 보였다.
“아, 그래. 나를 소중히 여기며 따스한 온정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람. 그리하여 내게 행복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 메마른 나의 삶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어둠을 밀어내어 빛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바로 당신.”
타락펜스는 금방 답을 찾아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다.
소중히 여기며 온정을 베풀고, 행복과 즐거움을 찾아주는 것까지는 인간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뒤에 이어진 내용이다.
그런 건 사람이 아니라 신앙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 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룩스메아와 반신인 마왕뿐이다. 완전 글렀다.
“나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큰 거 아니야?”
“현 대륙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아공간 주머니 속에서 ‘문서’로 취급될만한 것들을 전부 꺼내 보았다. 그중에는 현재의 나와 당신이 나눈 필담과 당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적은 듯한 편지 묶음 같은 것도 있더군. 소중한 물건이라는 듯, 마법적 보호 처리까지 해서 말이지.”
테이블 위에 웬 종이들을 늘어놓았나 했더니.
서류처럼 생긴 것을 되는대로 꺼내다가 필담 종이와 롤링 페이퍼까지 발견하고, 내가 일어날 때까지 그것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이블 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편지봉투 모양은 떠올리지 않았는지, 내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의 나에게 해 준 것만큼만 내게도 해 주면 됩니다.”
“그런 걸 바라면 내 아공간 주머니나 갖다 줘. 아침밥 꺼내게.”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타락펜스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종이뭉치를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 쓸어 담은 뒤, 아예 테이블과 의자를 침대 앞까지 가져왔다.
테이블 다리에 기대어져 있던 세니어가 바닥에 쓰러졌다.
“세니어는 현재펜스가 나를 지켜주려고 만든 거라서, 보호 기능이 있거든? 그러니까 수갑은 풀어주고, 세니어를 내게 주는 게 낫지 않을까?”
“밖에 나가게 되면 고려해 보겠다.”
악숭 세력과 싸우기는 하겠다더니 여기서 나가기는 할 생각인가 보다.
이런 것에 안도해야 하는 상황이 참 뭣 같지만, 감금당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타락펜스에게 건네받은 아공간 주머니 입구를 열었다.
식기류와 ‘바질 페스토 크림 빠네 파스타’ 2인분. 그리고 입가심용 피클을 꺼내고 나서 아공간 입구를 닫자마자, 타락펜스가 내게서 아공간 주머니를 압수해 갔다.
원래 내 물건인데 너무하다.
툴툴거리며 불만을 토로해 보았으나 녀석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음식에 관심을 보였다.
“이건 무슨 음식이지?”
“그릇된 빵에 담긴 바질 페스토 크림 파스타!”
“···빵은 먹으면 안 된다는 뜻인가?”
타락펜스가 내 말장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별의별 사소한 것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 빠네를 모르다니. 정말 어지간히도 음식에 관심을 끄고 살았나 보다.
나는 빵도 먹어도 된다는 걸 알려주고자 몸소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뚜껑인 척하는 빵을 크림에 푹 담근 뒤 뜯어 먹었다.
다소 게걸스러워 보이겠지만, 한쪽 손이 침대에 고정되어 있으니 별수 없다.
반면에 타락펜스는 빵을 작게 뜯어서 크림에 찍은 후 한입에 쏙 넣었다.
그 모습이 얄미웠지만, 녀석이 으음거리며 음식을 음미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만이 조금 가라앉았다.
오른손이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게 어디랴.
그렇게 자위하며 한 입 뜯어 먹은 빵을 내려놓고 포크를 들었다.
우선 파스타를 몇 입 먹어 허기부터 달래 놓고, 포크로 피클을 쿡 찌르며 타락펜스를 떠보고자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마왕이 소환되면 어쩔 생각이야?”
“그야 당연히 싸워야겠지.”
타락펜스가 포크를 숟가락에 대고 빙빙 돌려 파스타 면을 감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반사적으로 마왕과의 전투가 끝나면 성검이 반환될 텐데 정말로 놈과 싸워줄 거냐, 그렇게 물어볼 뻔했으나 겨우겨우 물음을 삼킬 수 있었다.
아기펜스를 다루듯 타락펜스를 대하면 안 된다.
비뚤어져서 툭 하면 비행을 일삼는 사춘기 소년을 상담하는 것처럼, 예민한 주제를 직설적으로 던지는 건 되도록 지양해야 한다.
“마왕은 반쪽짜리여도 신이잖아. 아무리 네가 그 오색 빛 기운을 다룰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싸워 이기는 건 힘들지 않을까?”
“당신이 변성력이라 부르는 그 기운을 보고도 ‘반쪽’이라는 말이 나오나?”
“···어?”
설마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나갔고,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댕그랑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타락펜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새 포크를 꺼내주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벌써 완전한 신이 되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선 것만은 확실하다.”
“아니, 그런 심각한 얘기를 왜 바질 페스토 크림 빠네 파스타를 먹으면서 하는 건데?!”
“음식을 내어 준 것도 당신이고, 질문한 것 또한 당신이다.”
“그렇기는 한데!!”
나는 이렇게나 불안하고 막막해서 미치겠는데, 정작 마왕과 홀로 싸우겠다고 선언한 타락펜스는 태연하기 짝이 없다.
녀석은 크림이 스며든 빵을 나이프로 잘라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환장하겠다. 지나치게 중대한 사안을 맞닥뜨린 터라 잘 먹는 모습을 보아도 기특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도와주었으면 한다.”
“설마하니 마왕과 싸울 때 나더러 거들어 달라는 건 아니겠지? 내가 신의 사자긴 해도 아무 능력도 없거든?!”
“그 정도는 보기만 해도 안다.”
타락펜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게 전투 능력 같은 건 기대해 본 적도 없다는 반응이다.
“그런데 선우라는 이름에 뜻이 있나?”
“내가 살던 곳의 언어로 ‘착하고 어진 벗’이라는 뜻인데···.”
“그래서 어제 그런 자기소개를 했던 건가?”
“뭐, 중의적인 의미지! 그보다 갑자기 이름 뜻 같은 건 왜 묻는 거야?”
나는 떨떠름함을 숨기지 않고 표정에 담아내어,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타락펜스는 계속 ‘이름’에 관한 주제를 이어나갔다.
“필담 내용을 읽어 보건대, 평상시 나를 세례명으로 부르는 일이 잦은 것 같더군.”
바스툴 왕국에서 세르펜스와 필담을 나눴을 때, 나는 종이와 잉크를 아낀다는 핑계로 녀석을 세례명으로 지칭했었다.
세르펜스는 그때 글로 남기지 말라는 지적만 했을 뿐.
그 이상의 지적은 하지 않고 넘어갔으며 내가 계속 ‘아도르’라고 적는 걸 막지 않았다.
확실히 평소에 세례명을 불러대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세례명도 어쨌든 이름이고, 이름은 부르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서 불렀는데 왜? 불만 있어?”
“불만 같은 게 있을 리가. 나도 당신···. 선우의 뜻에 동의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다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래?”
타락펜스는 마왕의 힘을 흡수하면서까지 신성력을 버리려고 했다.
그랬던 녀석이 세례명에 애착이 있을 리가 없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내가 현재펜스를 포기할지 가늠하던 타락펜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자신을 세례명으로 불러달라니 굉장히 미심쩍다.
“수작이 아니다. 조금 전 내가 선우에게 도와줄 것이 있다고 했잖은가?”
“마왕과 싸우기 위해서 내가 도와야 할 게, 고작 세례명으로 불러주는 거라고?”
“도움 중 일부일 뿐이다. 그것 말고도 오직 선우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
타락펜스가 포크까지 내려놓으며 나와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일부라는 건 아무튼 내가 녀석을 세례명으로 불러주는 게, 정말로 마왕과 싸울 때 도움이 되기는 한다는 뜻이 된다.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다.
기본적으로 표정이라 할만한 게 없다 보니, 타락펜스의 표정을 읽는 건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래도 지금 녀석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자세한 설명을 들어봐야 할 성싶다.
“계속 얘기해 봐.”
“마왕은 이 대륙의 역사와 버금가는 세월 동안 신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반복해 왔다. 그러다 최근에 필멸자와 절대자 사이의 경계선을 넘었지.”
“잠깐, 잠깐만! 최근에? 원래 마왕은 반쯤 신적인 존재로 알려지지 않았어?”
“신에 한없이 가까운 힘을 지녔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존재해 왔으니. 다들 그런 줄 알았겠지만 아니다. 하지만 오인할 만도 하지. 마왕도 경계선을 넘고 나서야, 그 이전까지는 반신조차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으니까.”
마왕이 타락펜스를 많이 아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정말 별의별 얘기를 다 해 준 모양이다.
아무튼 마왕과 싸우는 얘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세례명으로 불러달라 하더니. 지금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건 다 이유가 있을 테다.
“그러고 보면 마왕 놈이 테네 어쩌고 하는 신명을 들고 나온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지? 설마 이름을 정하는 게 신이 되는 조건 중 하나야?”
“그러하다.”
“즉, 마왕은 멍청하게 자기 이름 하나 안 지어서 기나긴 세월 동안 뻘짓을 해 왔다는 거네?”
“반쯤은 그런 셈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반쯤은 그런 셈이라는 건 대체 뭔가 싶다.
어중간하고 두루뭉술한 그 표현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 불만을 알아챘는지 타락펜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왕에게 신명이 붙은 건, 내 이전의. 선우가 ‘1회차’라 부르는 시기의 일이다.”
“신명을 붙인 게 아니라 붙었다고···? 그거 마왕이 직접 지은 이름 아니야?”
“내가 성검에 찔려가며 얻은 기억에 의하면 그러하다.”
그렇다고 하니 차마 따지고 들지 못하겠다.
수고했다는 얘기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관뒀다.
조용히 설명을 듣기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