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3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36화(836/1105)
836회
86. 공작님의 납치 (4)
“그러니까, 그···, 뭐야. 휴마누스가 성검을 돌려받아도 신의 힘을 끌어와서 쓰는 건 불가능하니까, 마왕과 싸워 이기려면 너를 신으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선우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잖은가?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타락펜스가 다 알면서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 말했다.
말을 시작할 때 ‘너도 알고 있겠지만~’ 하고 운을 떼는 건, 상대방의 생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화법 중 하나다.
절대로 휩쓸려서는 안 된다.
녀석을 신으로 만드는 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애초에 타락펜스는 ‘아도르’다워질 수 없으니까.
‘그냥 휴마누스를 빡세게 굴려서, 그를 신으로 만드는 게 제일 가능성이 있지 않나?’
휴마누스는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밝게 빛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휴마누스는 이미 세례명인 ‘브라이트’에 걸맞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악숭 세력의 이간질로 떨어진 평판 때문에,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것이 조금 어려울 것 같긴 하지만.
그건 그가 능력을 갖추고 나면 해결되는 문제다.
물론 평판을 뒤집는 것보다 신에 근접한 능력을 갖추는 게 훨씬 어렵겠지만.
적어도 타락펜스가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애정을 품는 것보다야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주제에, 어떻게 남에게 온전한 사랑을 베풀겠다고···.’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당장은 그런 질문을 던져 봤자 내가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할 게 뻔하니.
조금 더 나중에, 녀석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나면.
“그렇게나 오래 고민해야 할 문제였나?”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생각을 하다 보니 옆길로 샜어.”
“옆길?”
“자세한 건 묻지 마. 신체의 자유도 모자라 생각의 자유까지 침해할 셈이야?”
“······.”
타락펜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도통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어떤 표정이든 지어야 어림짐작이라도 해 볼 수 있을 텐데.
자신은 아무것도 보여주려 하지 않으면서 이쪽을 분석하려 들다니.
불만스러워 인상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일단 빈 그릇이나 좀 치워 봐.”
“이제 간식을 챙겨주는 건가?”
“먹었으면 당연히 치워야지,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리고 간식 시간은 오후 세 시니까 그때까지 참아.”
“그렇군.”
타락펜스가 아무런 유감도 내비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 쓴 식기들을 아공간 주머니에 담았다.
설거지는 안 하는 거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도 귀찮을 땐 그냥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는 데다가, 녀석이 설거지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 이 낯선 곳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목에는 수갑까지 채워져 있고 아공간 주머니도 뺏겼다.
만약 타락펜스가 자리를 비웠을 때 화장실 신호라도 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간단하게 정리를 마친 뒤. 타락펜스는 테이블 너머에 있는 의자를 놔두고 굳이 내 옆에 다시 앉았다.
심지어 아까보다 거리도 줄었다.
“왜 자꾸 옆에 앉으려고 그래? 저리 가서 앉아!”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더니 왜 자꾸 피하지?”
“부담스러워서 그렇지, 부담스러워서! 아까부터 대체 뭔데?! 자는 사람을 납치하질 않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겠다고 나서질 않나!”
“납치가 아니다. 방해꾼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이지.”
자는 사람을 낯선 장소로 몰래 데려와 침대에 묶어뒀던 주제에 납치가 아니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하다못해 수갑이라도 풀어주고 우겼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황당해하지는 않았으리라.
타락펜스가 살던 시기의 대륙은 워낙 막장이었던 터라, 납치의 정의가 좁아지기라도 한 걸까?
몸값을 요구하지 않으면 납치로 안 쳐주나?
“또한 필담을 나누다 말고 상대방을 꼬집는 것에 비하면, 식후 입가에 묻은 것을 닦아주는 건 상식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거려서 그랬던 거고!”
“꼬집은 게 입술이었나?”
그런 주제에 지금 자기에게 부담스럽다는 소릴 한 거냐며 타락펜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니, 그런 의미로 삐죽거린 게 맞는 걸까?
바스툴 왕국에서 세르펜스와 필담을 나눌 때, 꼬집는다니 어쩐다니 하는 얘긴 쓰지 말 걸 그랬다.
그리고 꼬집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타락펜스가 튀어나와서 필담 내용을 읽을 줄, 누가 알았나?! 하물며 그땐 성검펜스조차 나오기 전이었잖아!’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후 반말 비중이 확 증가한 것도 그렇고, 지금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도 그렇고.
녀석이 자꾸만 현재펜스의 자리를 넘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별로다.
나는 떨어져 앉으라는 뜻을 담아 타락펜스의 허벅지를 발로 꾹꾹 밀어내려 애쓰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이제 됐고,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우선은 내가 진정한 성검의 주인이라는 사실부터 알려야겠지.”
현재펜스였으면 밀려나는 시늉을 하며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텐데.
타락펜스는 내 발을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몹시 얄미웠으나 일단은 이 녀석을 설득하는 게 먼저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봐.”
“아직도 황태자에게 희망을 거는 건가? 아니면 현재의 나를 포기할 수 없어서 그러는 건가?”
“너, 거울은 보고 사람들 앞에서 나서겠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거울?”
타락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내가 거울을 보라고 말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걸 테다.
나는 한 3초가량 망설인 후 녀석의 품에서 내 아공간 주머니를 찾아서 거울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자연스럽게 아공간 주머니를 챙길 생각이었는데, 타락펜스에게 다시 빼앗겨버렸다.
“크윽, 분하다!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그래서 거울은 왜 보라고 한 거지?”
“···다정하고 친절하며 자애로운 표정을 지어볼래?”
아공간 주머니를 되찾지 못해서 분하긴 하지만, 일단은 녀석이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게 막는 게 먼저다.
나는 분통을 삼키며 타락펜스에게 ‘아도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보라고 했다.
타락펜스가 거울을 보면서 얼굴 근육을 움직여 대외펜스의 표정을 연기했다.
“무언가···.”
“어색하고 이상하지?”
“분명 익숙한 표정일 터인데···.”
“표정이 문제가 아니잖아. 너라면 그렇게 죽은 눈빛으로 친절한 척 인위적인 미소를 짓는 사람을 보고도, ‘이 대륙과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넘쳐서 우리를 구해주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며 숭배할 수 있겠어?”
“······.”
타락펜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리며 말없이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저러다가 거울을 집어 던지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긴장한 것도 잠시.
녀석은 얌전히 거울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군. 나는 망가진 건가?”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거냐고 따져야 할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혼내야 할지.
아니면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녀석을 대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타락펜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괜찮겠지, 선우가 고쳐줄 테니까.”
“뭐어?! 아니, 내가 정신과 전문의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그럼 선우의 조언에 따라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나중으로 미루겠다.”
“조언은 아니었지만, 뭐···. 그래.”
내가 이미 자신의 편에 선 것처럼 말하는 녀석의 태도가 조금 거슬렸다.
그래도 세르펜스가 성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하지만 타락펜스는 내 떨떠름한 대답이 탐탁지 않은 건지 어쩐 건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왜 자꾸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는···.”
“우선은 흑마법사의 실험실이나 교육 시설 등을 습격하여 놈들의 세를 줄여 놓고, 이후 한꺼번에 공표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만 좀 쳐다보라고 따지려는 찰나, 타락펜스가 내 말을 끊어 먹으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꺼냈다.
법숭이 실험실은 단어 그대로의 장소니 넘어가고, 교육 시설이라 함은 검숭이나 암숭이 같은 자들을 양성하는 곳을 일컫는 걸 테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은신처도 쓰이고 있는 걸 보면, 타락펜스가 알고 있는 정보들은 대부분 유효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악숭 세력의 전력을 깎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거 잘만 하면 마왕을 처리한 이후, 잔당을 소탕하는 일도 쉬워지겠는데?!’
성검을 지닌 타락펜스와 둘이서 이곳에 콕 박혀 있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낫다.
나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대답했고, 타락펜스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실그러뜨렸다.
‘어라···?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마치 환영처럼 일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지만, 그것은 분명 웃음이었다.
놀라운 일이었으나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녀석이 어째서 웃었는지 그것부터 파악해야 했다.
‘바로 직전에, 내가 자신의 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녀석의 태도에 불만스러워 했으면서! 타락펜스의 제안을 너무 넙죽 받아들였잖아?!’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은근슬쩍 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나갈 속셈인가 보다.
그런데 내가 벌써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듯하자, 그게 만족스러워 웃은 게 아닐까 싶다.
‘감정이 다 죽은 것 같았는데, 아니었구나. 하기야 감정이랄 게 아예 없었다면 일을 이 지경까지 키우지도 않았겠지.’
평범한 사람처럼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울고 웃는 수준은 아니지만.
현재펜스가 누리는 행복을 가로채고 싶다는 그 욕망에 관해서는 감정이 동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타락펜스의 감정을 되살리고자, 녀석이 바라는 것에 전부 응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양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조금 풀어지나 했더니 금세 또 경계하는군.”
“잘 자고 있던 사람을 납치해 온 주제에, 길거리에서 주워온 강아지를 길들이는데 애먹고 있다는 듯한 그 말투는 대체 뭐야?!”
“그 말은 본인이 개라는 뜻인가?”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흐음···.”
뒤늦게 수습에 나섰으나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가 않다.
타락펜스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비유라는 내 얘기를 믿지 못해서 저런다기보다는 일부러 믿지 않는 듯한 눈치다.
“그보다 나는 잘 자고 있던 사람을 납치한 적 없다.”
“어이, 형씨! 그렇게 우기려거든 이 수갑부터 풀고 말하지그래?”
“이번에 부정한 건 납치가 아니라 잘 자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어어···, 음···, 으음, 으어···.”
나는 수갑을 가리키던 손을 내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타락펜스의 시선을 피했다.
낯선 장소에서 묶인 채로 눈을 뜬 터라 정신이 없어서 깜박 잊고 있었는데.
어젯밤 잠들기 전, 어쩌면 악몽에 시달릴지도 모른다고 예감했었다.
피의 의식이랍시고 악숭 귀족이 자신의 수행인을 단검으로 찔러, 쏟아지는 피를 잔에 담는 모습도 보았고.
악마가 미리 모아 놓았던 피라고는 하나, 별장 1층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피를 보았다.
어디 그뿐이랴?
하마터면 세르펜스가 죽을 뻔했으며, 타락펜스는 악숭 사제를 반쯤 고문하듯 성검으로 푹푹 찔러대다가 결국에는 죽여 버렸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자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려서 반사적으로 손을 입가로 가져가려는 순간.
타락펜스가 내 손을 붙잡아 신성력을 밀어 넣었고, 그와 동시에 메스꺼움이 가라앉았다.
“···어젯밤에도 신성력을 쓴 거야? 납치하기 편하게 깊이 재우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