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3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39화(839/1105)
839회
86. 공작님의 납치 (7)
슬쩍 눈을 떠 볼까 싶었으나 타락펜스의 경고가 떠올라 그럴 수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길래 눈을 뜨지 말라고 한 걸까?
오면서 보았던 동물의 사체들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장소는 각종 실험이 진행되던 곳일 테니까, 아까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보이는 게 없으니 형상을 갖추지 못한 상상이 뒤틀리고 또 뒤틀려서, 점차 잔혹한 모습으로 바뀌며 덩치를 키워나갔다.
눈을 감은 게 실수였을까?
후회가 되면서도, 눈을 감은 덕분에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어지럼증이 밀려들었다.
“저기···, 아도르···?”
“······.”
대답 대신 내 목소리가 메아리쳐서 돌아왔다.
누가 들어도 겁에 질렸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다급하게 타락펜스를 다시 불렀다.
“아도르, 아도르···!”
“날 불렀나?”
“왜 이렇게 대답이 늦어?!”
“으음, 미안하다.”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거로 보아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타락펜스는 나를 자신의 구원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녀석이 나를 이곳에 버리고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 사실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이 상황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만큼 내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거겠지.’
쓸데없는 상상을 최대한 틀어막고, 냉정하게 내 상태를 점검해 보기로 했다.
이곳이 법숭이의 연구실이라 해도 법숭이는 이미 죽었고 내 손에는 세니어가 들려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타락펜스가 있다.
안전이 확보되었음에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 건,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겠지.
자는 사이에 납치되어 일행들과 떨어졌다.
내가 이 세상에 남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인 세르펜스는 타락펜스에게 육체를 뺏겼다.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타락펜스뿐인데, 녀석은 자신을 빛으로 인도해 달라는 둥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해댔다.
‘이거···,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 아기랑 집에 단둘이 남겨진 거랑 비슷한 상황 아니야?’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미쳐버릴 것 같고 우울증이 온다던데.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이제 겨우 하루. 아니,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위태롭게 흔들리다니.
다행인 건 타락펜스는 진짜 아기가 아니라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불행히도 녀석은 좋은 머리를 안 좋은 쪽으로 쓰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고작 간식 하나 더 먹겠다고 계략을 짜는 현재의 세르펜스와는 다르다.
지금도 이렇게···.
“선우, 괜찮은가? 정 불안하고 속이 안 좋으면 신성력을 써 줄 수도 있다.”
일부러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 놓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척, 내 감정을 멋대로 쥐락펴락하려 했다.
나는 녀석에게 휘둘리지 않으리라.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대답하기 전에 크게 심호흡을 하여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괜찮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나가자. 환기가 안 되는 곳이라서 그런가, 냄새가 너무 역해서 오래 있으면 건강이 나빠질 것 같아. 어휴! 법숭이 놈은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산 거람?”
“흐음···.”
내가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타락펜스가 언짢은 듯한 기미를 흘렸다.
그리고 갑자기 ‘쨍그랑!’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뜰 뻔했으나 겨우겨우 몸을 움찔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하지만 놀란 심장이 고동치는 건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미안하다. 실수로 병을 하나 떨어트려서···. 다행히도 위험한 물질이 들어있던 건 아닌 듯하군.”
녀석의 말은 거짓말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내가 불안해하지 않으니,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병을 떨어트린 게 분명하다.
그 뻔하디 뻔한 의도에 미간이 팍 찡그려졌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해.”
“알겠다, 그럼 서두르도록 하지. 다소 시끄러울 터이니 귀라도 막고 있어라.”
타락펜스의 말이 끝나고,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음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과격한 소음들이 동굴 벽에 반사되어 울려 퍼져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 왔다.
이게 실험 자료를 폐기하느라 생긴 소음이면 이전까지 조용했던 건 대체 뭘까 싶다.
설마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라도 했던 걸까?
– 쾅, 콰앙! 쨍그랑!
나를 겁주려는 녀석의 의도를 알아서 그런가, 고작 소리일 뿐인데 너무나도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세니어를 검집째 옆구리에 끼고 귀를 막았다. 그래도 손가락 사이로 소음이 새어 들어왔다.
곧이어 역겨운 썩은 내 사이로 매캐한 연기 냄새가 섞여들었다.
타락펜스가 뭔가를 태우고 있나 보다.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뚜벅뚜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 소리는 내 바로 앞에서 멈췄다.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감고 있기로 했다.
목에 연결된 줄이 살짝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도로 느슨해졌고,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타락펜스가 묶여있던 줄을 풀고 나를 들어 올린 거다.
이제야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 전신의 힘이 빠졌다.
“많이 힘들었나 보군.”
내가 몸을 축 늘어뜨리자 타락펜스가 다정한 척 가장하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고, 이제껏 의지해온 목소리로.
녀석에게 기대고 싶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나를 서럽게 했다.
“선우···?”
타락펜스가 나를 불렀으나, 입을 열면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녀석에게 지금 내 감정과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뚜벅뚜벅 울려 퍼지는 타락펜스의 발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운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순간 뚜벅거리는 소리가 자박거리는 소리로 바뀌고 메아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풀잎 향이 나는 맑은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드디어 동굴을 벗어난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눈을 뜨자 어두컴컴한 숲이 보였다. 동굴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밤이 찾아온 것이다.
다시 기분이 저조해졌다.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해야 할 것 같군.”
“내 아공간 주머니에 천막 있어. 그리고 침대···는···. 혹시 어젯밤에 나 납치할 때, 침대 챙겼어?”
“평소 가지고 다니던 물건인 것 같아서 챙겨 뒀다.”
만약 안 챙겼다고 하면, 개목걸이 따위 챙길 시간에 침대나 챙기라고 한소리 할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잘 챙겼다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동굴에서 벗어났으나 타락펜스는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내게 걸을 수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도 굳이 직접 걷겠다고 우기지 않았다. 힘이 풀려 못 걸을 게 뻔했으니까.
한참이 지나고 적당한 터를 발견했는지, 타락펜스가 나를 나무 밑동에 기대어 앉혔다.
그리고 목줄 손잡이를 튼튼한 나뭇가지에 묶어 고정했다.
‘완전 개 취급이 따로 없네.’
타락펜스가 혼자서 천막을 세운 뒤, 옷을 갈아입겠다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바짓단은 마물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물 쥐를 마구 걷어차 댄 탓이다.
녀석이 천막 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혼자가 되었다.
어차피 같은 남자끼리니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본다고 문제 될 것도 없건만.
또 일부러 나를 방치하려는 게 틀림없다.
“담요라도 주고 들어가지···.”
여름이긴 해도 밤이라 그런가, 아니면 식은땀을 흘려서 옷이 젖은 탓인가 꽤 쌀쌀했다.
체온을 빼앗기지 않으려 몸을 웅크리는데 옷감이 묘하게 얇았다.
내가 오늘 온종일 잠옷 차림으로 들려 다녔다는 사실을 지금 깨달았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집이 그리워졌다.
타락펜스의 노림수라는 걸 아는데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무릎을 끌어안고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는데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 온기를 밀쳐낼 수 없었다.
“오늘 일이 많이 무서웠나?”
소리 없이 다가온 타락펜스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머릿속으로 ‘그렇긴 해도 그런 이유로 우는 게 아니야.’ 하는 대답을 떠올렸지만, 울음에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등에 얹어진 타락펜스의 손바닥에서 따스한 기운이 전해졌다.
신성력이 스며들자 설움과 그리움이 가라앉고 정신이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내게 멋대로 신성력 쓰지 말라고 했잖아.”
“선우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되라고 일부러 나를 혼자 둔 거면서···!”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신성력이 거두어졌다.
그 탓에 잠깐 그쳤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고, 울컥 울분이 치솟아 타락펜스의 멱살을 잡아채버렸다.
그래도 녀석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반색했다.
“그 말은 내가 선우에게 의지가 된다는 뜻입니까?”
눈물이 앞을 가려 타락펜스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왠지 녀석이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나를 더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붙이려나?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는 건 싫었다.
그래서 조용히 울고만 있자, 녀석이 재차 입을 열었다.
“어제도 생각했던 건데, 선우는 이 세상에 온 지 3년이나 지난 것치고는 아직도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듯하군.”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 정신적으로 쉴 틈도 주지 않고, 오늘 바로 법숭이 연구실에 데려온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녀석은 분명 출발 전에 내 의견을 물었고 별생각 없이 동의한 건 나니까.
“다른 일행들도 눈치챈 것 같던데 선우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군.”
나름대로 숨기려고 애썼지만, 내심 들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내가 항상 모든 일행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심적으로 여유가 없을 땐 더더욱 그러기 어려웠다.
“무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외로웠겠군.”
“아, 아니···야···. 그들은···. 흐윽!”
타락펜스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입을 열었으나,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뭐라 말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대로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으니 잠시 신성력을 쓰겠다.”
“또, 멋대로···.”
격하게 치밀어 오른 감정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나른한 기분이 들어 화를 내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얘기나 하자 싶어 숨을 가볍게 고르고 일행들을 변호했다.
“그들은 무심한 게 아니야. 내가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니까, 아는 체할 수 없어서 기다려 주고 있는 것뿐이야. 내가 먼저 털어놓을 때까지···. 그러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
“그렇군.”
녀석이 대답을 내뱉으며 다시 신성력을 거두어들였다. 내가 마음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평온함이 사라지고 원래의 감정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울분과 설움과 그리움이 급격하게 몰아쳤다. 거기에 일행들을 향한 미안한 감정까지 더해졌다.
비정상적인 감정 변화 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튼 외로웠겠군.”
타락펜스가 공감하고 위로하는 척 말했지만, 녀석의 진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어떻게든 내게 외로움을 주입하려는 거겠지.
그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녀석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응···. 너무, 흐읍···! 외로···워···.”
정말로 외로웠으니까.
나는 화가 나서 잡았던 타락펜스의 멱살을 마치 구명줄처럼 간절히 붙들고, 외로움을 호소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은 했으나 마음이 따라주질 않았다.
아니, 그냥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무엇이 선우를 가장 외롭게 하는가?”
“가족···. 가족들이, 흑! 너무너무 보고 싶어···!!”
결국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입 밖에 꺼내 놓으며, 소리 높여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