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3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40화(840/1105)
840회
86. 공작님의 납치 (8)
* * *
정신이 멍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깜박이며, 어젯밤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았다.
“미친···.”
정말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엉엉 울어 젖히며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소리친 건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울다가 지쳐갈 때 즈음. 타락펜스는 신성력으로 내 체력을 회복시키는 한편, 정신을 안정시키고 가족들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왔다.
‘나는 거기에 술술 대답해 줬고···.’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는 도중 예고 없이 신성력이 끊겼다.
평온함이 사라졌고 추억은 그리움이 되어 날 우울하게 했다.
타락펜스는 우는 나에게 진심이 담기지 않고 표현마저도 진부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게···, 위로가 되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녀석에게 매달리며 울어댔고, 내가 알아서 진정하기 전에 또다시 신성력이 밀려들었다.
안온한 기분에 취해 타락펜스에게 기대어, 녀석의 질문에 따라 나에 관해 이것저것 얘기했다.
간단하게 취미부터 시작해서 내가 아동복지학을 배우는 대학생이라는 것과 교우관계까지.
그러고 나자 녀석은 친구들이 그립지 않으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립다고 대답했고, 바로 신성력이 사라졌다.
또다시 그리움에 사무쳐 울음을 터트리자, 어김없이 타락펜스의 어쭙잖은 위로가 이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타락펜스는 내 슬픔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희열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판단할 정신이 아니었고, 무의식중에 녀석을 의지해 버렸던 것 같다.
힘없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울고 있자니···.
‘녀석은 내게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지.’
정신이 하도 오락가락한 탓일까?
이때 타락펜스가 내게 신성력을 썼는지, 안 썼는지. 그 사용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따스한 기운이 몸 안을 휘돌며 안정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흐느끼면서 무어라 뜨문뜨문 말했던 기억이 있으니, 그냥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녀석의 물음에 답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비록 어디부터 어디까지 얘기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서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어낸 타락펜스는 아무런 감상도 없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감정의 교류 같은 건 없었다. 녀석에겐 그저 정보를 취득하는 행위에 불과했겠지.
나 혼자 일방적으로 감정을 쏟아내며 정보까지 흘려댄 꼴이다.
‘그다음 질문···이 뭐였더라? 아, 어떻게 현재의 세르펜스와 가까워질 수 있었는가. 그거였지?’
그 외에도 이것저것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타락펜스를 붙잡고 늘어지다시피 하며,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들을 잔뜩 쏟아냈다.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내가 무슨 말을 해댔는지 모르겠다.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해 봤으나 그런 게 될 리가 없다. 사람은 무의식이 한 행동을 전부 기억할 수 없으니까.
폭풍이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리듯, 감정이 큰 폭으로 오르락내리락 요동쳤다.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잠이 들 때까지 타락펜스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휘둘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 침대로 와서 잠든 건지도 불분명하다.
언뜻 날이 밝아진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신성력의 빛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아···, 나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밤새도록 울거나 떠들거나, 아니면 울면서 떠들어대거나. 이래저래 쉴 새 없이 목을 혹사한 까닭인지 쉰 목소리가 나왔다.
눈이 퉁퉁 부었는지 시야도 미묘하게 좁아진 것 같다.
“그만큼 외롭고 힘들었던 거겠지.”
불쑥 시야에 침범한 타락펜스가 부드러운 미성으로 말했다.
녀석이 내게 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화가 날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하다.
정신이 위태롭게 흔들릴 때마다 녀석에게 매달리며 안정을 느끼길 반복해서 그런가?
아니면 쌓아왔던 감정을 모두 소진해 버린 나머지 마음이 공허해진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신성력을 남용해 놓고 치료는 하나도 안 해놓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후후, 미안하군.”
투정 부리는 내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듯, 타락펜스가 내 이마를 짚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따끔거리던 통증이 사라지고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띤 녀석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죽어있던 두 눈이 묘한 생기를 띠었다.
“···좋냐?”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선우가 내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놔 주었는데.”
타락펜스가 나를 일으켜 앉히며 말했다.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와 멋대로 휘젓고 다닌 주제에,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녀석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손에 물잔이 쥐어졌다.
목이 건조해서 말을 못하는 줄 아는 건지, 아니면 많이 울었으니 수분을 보충하라는 건지.
타락펜스가 어떤 의도로 내게 물잔을 준 건지는 몰라도, 마침 목이 마르긴 했으니 얌전히 마시기로 했다.
벌컥벌컥 물을 단숨에 들이켰더니 멍한 정신이 조금쯤 명료해진 듯하다.
“이런 짓, 많이 해 봤어?”
“이런 짓이라니?”
“신성력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사람 정신을 쏙 빼놓는 거.”
“어제가 처음이었다.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고문을 하고, 누군가를 이용하고 싶다면 원하는 것을 제시하면 되니까.”
전직 최종보스다운 답변이라는 건 일단 덮어 두고, 얘기하는 걸 들어 보니 정말 처음이었나 보다.
그런데도 그렇게나 절묘하게 정신을 뒤흔들어 놓다니.
정말이지 뱀 같은 녀석이다.
“내 얘기를 들었으니 알겠지만,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누굴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하지도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하지도 않아.”
“나의 착하고 어진 벗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선우, 그대가 쓴 이력서를 읽었으니까.”
“······!”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타락펜스가 필담과 롤링 페이퍼만 언급하기도 했고,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녀석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 그만 잊고 있었다.
내가 이력서를 써서 세르펜스에게 제출했었던 사실을.
거기에는 내 성장 배경을 자세하게 풀어쓴 자기소개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다 읽었으면서 일부러 물어봤다는 거야? 사람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면서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어?”
“이미 쓰인 글을 훔쳐 읽는 것이 아니라, 선우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 만족해?”
“과연, 정돈된 글을 읽는 것과 직접 듣는 건 다르더군. 선우가 가족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며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평범한 가족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보통은 그렇지.”
안 그런 가정도 있다는 건 나보다 타락펜스가 더 잘 알 테니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 누가 봐도 들뜬 듯한 녀석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자신의 감정에 취한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감정이 없는 존재처럼 무감각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다워졌다.
비록 정상적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움을 묻어두고 외로움을 참아내면서까지, 내 곁에 남아 주겠다 약속하다니···. 나를 아낀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군. 이게 바로 기쁘다는 감정이겠지.”
“내가 곁에 있겠다고 약속한 상대는 아도르, 네가 아니라 현재의 세르펜스야.”
타락펜스의 말을 정정해 주며, 나는 녀석 몰래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일부러 이곳에 남겠다는 얘기를 했다는 건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얘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얘기까지 했을 정도면, 녀석에게 안 한 얘기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렸어야 했는데···. 아니, 그 상황에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내가 아니라도 누가 됐든 그딴 상황에 놓였으면 정신을 놨을 거다.
그러니 나는 말실수를 한 어젯밤의 나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기로 했다.
“선우가 현재 이 시간대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서 선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바로 나다. 앞으로 함께할 이 또한 나고. 지금의 내가 곧 현재이고 미래다.”
“내가 그걸 인정해 줄 것 같아?”
“당장은 못 하겠지. 하지만 곧 인정하고 나를 받아들이게 될 거다.”
어젯밤의 내가 미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미친 건 타락펜스였다.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쳤다.
밤새도록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건 난데, 왜 얘가 미친 걸까 의문이 든 것도 잠시.
“나를 가족과 동등하게 여겨서, 차마 나를 두고 돌아갈 수 없다고 했던가? 그 말에 감정이 크게 동요했다. 그래, 나는 감동했다. 선우는 가족들을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괴로움에 시달릴 정도로 그들을 아끼잖는가? 그런 커다란 애정이 나에게도 베풀어진다니, 너무나도 설레어 잠조차 오지 않았다. 다른 이유로 잠 못 든 적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이렇게 기분 좋게 잠 못 이룬 적은 난생처음이다.”
나는 타락펜스가 원래 미쳐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검의 주인] 속 타락펜스는 악숭 세력에 붙고 난 후 광기를 드러냈다.후반부로 가면서 그런 모습이 차차 사라지긴 했지만, 그건 광증이 사라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감정이 거의 마모되어 무감각해진 상태라 티가 안 났을 뿐.
녀석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미쳐있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내게 그딴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었던 거겠지.
“그래서 선우의 그 애정에 보답하고 싶어졌습니다.”
“···뭐?”
“선우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효도하고 싶다는 뜻이다.”
대체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 무슨 얘기를 했길래, 타락펜스의 입에서 ‘효도’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효도하겠다는 말을 들었어도 흐뭇한 감정은 개미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불 속성도 아니고 타락 속성의 아들이 대체 무슨 효도를 저지를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하기까지 했다.
“선우의 도움 아래 내가 성장하여 신이 된다면, 가족들을 만나게 해 줄 수도 있다.”
“자, 잠깐! 그 얘기는, 나를···.”
“죽이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착하고 어진 벗의 목숨을 내가 어찌 거둘 수 있겠는가?”
이어진 타락펜스의 말에 일단 한시름 놓긴 했지만, 완전히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는 긴장하며 녀석에게 물었다.
“그럼 무슨 뜻인데?”
“신의 힘으로 그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여,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뜻이다. 신 룩스메아가 선우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것처럼 말이다. 나도 신이 된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어어···, 아마, 그렇겠···지?”
얼떨떨하다.
불과 몇 분 전. 녀석은 황홀경에 젖어든 표정으로 광기를 유감없이 뽐내며, 세르펜스를 아끼는 내 마음마저 자신의 것이라 우겨댔다.
그렇기에 세르펜스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집착을 보여줄 거라고 예상했는데.
갑자기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는 네가···, 나를 평생 옆에 묶어두려 할 줄 알았는데···?”
“신이 된다면 영생을 살게 될 텐데, 선우가 10년 정도 가족들 곁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대수겠는가? 선우가 어젯밤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울었던 것처럼, 그 10년 동안 나를 그리며 울어주면 무척이나 기쁠 것 같군.”
“10년? 그럼 그 이후에는···?”
“그 이후 선우는 나의 천사로서 영원히 나를 보좌하면 된다.”
10년 장기 효도 관광 코스만으로도 아찔한데, 신이 된 자신을 영원히 보좌하라니.
스케일이 너무 커서 못 따라잡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