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5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52화(852/1105)
852회
86. 공작님의 납치 (20)
* * *
새벽 일찍 타락펜스와 둘이서 여관을 나섰다.
조용한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래도 까눌레 매장 앞에 줄을 선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으나 우리가 첫 번째였다.
너무 서둘렀나 보다.
5시 45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한두 명씩 와서 우리 뒤에 줄을 섰다.
경비병이 알려준 6시가 되어도 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시간을 알려 줬는데, 괜히 경쟁한답시고 설레발을 친 것 같아서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뭐, 이런 것도 지나고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타락펜스가 멋대로 대꾸했다.
저기다 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다음에 또 이렇게 줄을 서서 뭔가를 사도 되냐고 물어보면, 지금 자신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거냐는 소리를 해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앞으로는 혼잣말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도넛을 베어 물었다.
이 도넛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제 돌아다니면서 산 간식 중 하나다.
줄 서서 기다릴 때 출출함을 달래기 좋을 것 같아서 챙겨왔다.
“그런데 더 제대로 된 추억이 되려면 무슨 대화라도 나눠야 하는 것 아닌가? 다들 그러고 있는 것 같은데···.”
타락펜스가 죽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힐끔 곁눈질하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스마트폰 같은 게 없었고 기다리는 동안 할 만한 거라고는 대화 정도다.
혼자 뜨개질을 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지금은 뒤에 온 사람과 실 종류와 색상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다.
‘나도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니까, 뭐라도 떠들고 싶기는 한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타락펜스와 나눌 만한 얘기가 있기는 한 걸까?
같이 온 사람이 현재의 세르펜스라면 평범하게 일상적인 얘기를 나눴을 테지만, 요 며칠 타락펜스와 함께한 시간은 지나치게 비일상적이라서 좀 그렇다.
할 말이 없을 땐 상대방이 잘 모르는 나의 최근 근황을 얘기하는 게 보통이겠지.
나는 도넛을 마저 먹어 치우며, 타락펜스와 만나기 직전에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악숭 살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 그런 취향을 공부하고 대본을 작성하여 완벽한 연기를 준비했다는 거?’
이건 주변에 사람이 없어도 타락펜스에겐 절대 말할 수 없다.
일단 살롱 관련 얘기를 넘기고 그 이전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사사건건 악숭 세력과 엮여 있었다.
말을 꺼내면 정체를 발각당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타락펜스의 근황을 묻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녀석의 근황이라 함은 2회차의 최종 결전일 테니까.
적당한 화제를 떠올리고자 끙끙대는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 저기, 너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 같은 거 있어?”
“평소처럼 ‘그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 그보다 지금 내게 ‘죽기 전’이라고 말한 건가?”
“내가 안 괜찮아! 그리고 말실수한 건 미안해. 버킷 리스트라도 작성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물어본다는 게···.”
“작성하면, 전부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건가?”
타락펜스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은밀하게 물어왔다.
그리 비밀스러운 얘기도 아닌데 저래야 하나 의문이 든 것도 잠시.
녀석이 바라는 것이라면 비밀스러운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아직 안 알려 줬으니까. 근데 떠오르는 게 있긴 해?”
“당장 떠오르는 거라면, 세상이 평화로워진 이후에···.”
“한 달 내로 할 수 있는 거.”
“칫.”
타락펜스가 혀를 차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래도 달래주지는 않을 거다.
아무리 진심으로 약속한 게 아니라도 지키는 시늉 정도는 할 것이지.
한 달 후에 돌아가기로 약속해 놓고 먼 훗날을 논하는 건 계약 사항 위반이다.
“좀 더 생각해 보겠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빨리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또 잔인한 말을 하는군.”
야속함이 가득한 녀석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헤어지기 전에 녀석이 바라는 걸 최대한 많이 이뤄주고 싶어서 채근한다는 게, 빨리 사라지라는 뜻으로 들렸나 보다.
나는 녀석의 손을 꼭 잡아주며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 사정이···!”
갑자기 가게 문이 열리더니 울컥한 표정의 남자가 튀어나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제 가게에 방문했을 땐 남자 직원이 없었는데 얼굴이 묘하게 낯익었다.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며 어디서 본 것인지 골똘히 고민하고 있노라니, 그 남자가 힌트를 꺼냈다.
“어쩐지! 그래서 이런 시기에, ‘죽기 전에 먹지 못하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보는 우리 집 까눌레’를 찾으셨던 겁니까?”
이제 알겠다. 어제 성문을 통과할 때 보았던 까눌레 마니아 경비병이다.
갑옷 대신 평상복을 입은 데다가 앞치마와 머리 두건까지 두르고 있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교대 근무 때문에 휴일이 불규칙한 경비병이 투잡을 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가게 주인의 남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가게 매출을 올리려고, 어제 까눌레를 사고 오늘 새벽에 또 사라고 권했었나 보다.
“신전에는 가 보셨습니까? 아! 물론 가 보셨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고향에 계신 신관님이 치료하지 못하셨더라도, 저희 영지에 계신 신관님 중에서는 치료할 수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잖습니까?”
그건 그렇고 이 사람은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왜 저러나 싶어서 나는 방금까지 타락펜스와 나눈 대화를 되새겨 보았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말하라면서 기한을 한 달밖에 주지 않다니, 마치 시한부 취급이 따로 없었고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인정해 버리면 당장 신전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며 친히 안내해 줄 것 같다.
“잠깐, 잠깐! 그런 거 아닙니다. 얘가 아픈 건 아니고 한 달 뒤에 어디 멀리 이사 가서 만나기 힘들어지거든요.”
“이런 시기에 이사를···?”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거라 몸만 가면 돼서, 딱히 옮길 짐이 없어서 별 상관없대요.”
“이런 시기에 결혼을···?”
“예전부터 얘기가 오가고 있었는데, 더는 미룰 수 없다고 그쪽 집에서 자꾸 재촉해서···.”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여행을···?”
“제가 몰래 데리고 나왔습니다! 친구로서 결혼 전에 작은 추억거리라도 하나 만들어 주고 싶어서요!”
성문 앞에서는 까눌레 사러 왔다는 말에 그냥 통과시켜 줘 놓고, 왜 이제 와서 심층적으로 캐물으며 불심 검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옷차림을 보아하니 오늘은 비번인 것 같은데.
평소에 설정 놀이를 자주 하며 순발력을 키워 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신전까지 끌려갈 뻔했다.
“그건 그렇고 손에 들고 계신 그건 뭡니까?”
“아차! 기다리시는 손님분들께 하나씩 나눠 드리려고 가지고 나온 건데···. 드시겠습니까?”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나는 앞치마를 한 경비병이 손에 든 쟁반에서 쿠키를 집어서 입에 물고, 다시 하나를 더 집어서 타락펜스에게 내밀었다.
진작에 도넛을 다 먹은 나와 달리 녀석은 아직도 손에 도넛이 들려 있었다.
가게 오픈 시간이 일곱 시니까 시간 배분을 하며 아껴먹는 중이었나 보다.
한 손에 도넛이 남아 있어서 곤란하다면, 다른 손으로 잡은 내 손을 놓아주면 될 텐데.
타락펜스는 도넛과 쿠키를 번갈아 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 행동이 흡사 현재펜스 같아서 녀석의 입에 쿠키를 물려 주었다.
쿠키를 문 타락펜스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자신을 챙겨줘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기다리는 동안 쿠키라도 드세요. 앗, 잠깐! 아저씨 뭐하시는 겁니까? 뒤에 계신 분들도 드셔야 하니까 하나만 가져가십시오. 오늘 처음 줄 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십니까?”
방금까지 내게 이것저것 캐물었던 경비병은 이제 까눌레 매장의 직원이 되어, 줄을 선 손님들에게 쿠키를 나눠주고 있었다.
단골 얼굴도 기억하는 거로 보아 이 일을 하루 이틀 한 게 아닌 모양이다.
어쨌거나 경비병이 딴 데 정신이 팔려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맨 앞에 줄을 선 게 누군가 했더니, 여행객이었나 보네.”
뒤에 줄을 선 손님들이 쑥덕대며 나와 타락펜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한 새벽에 너무 큰 목소리로 경비병과 얘기를 나눈 탓에 이목을 끌어 버렸나 보다.
나는 타락펜스의 후드를 앞으로 잡아당겨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더 깊이 씌웠다.
그리고 쿠키를 야금야금 갉아 먹으며 귀를 쫑긋 세워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거짓말로 둘러댄 내용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대는가 싶더니, 당사자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눈치가 보였던 걸까?
어느 순간 화제가 ‘여행객’이라는 키워드로 옮겨갔다.
“그러고 보니 망가진 철로를 조금씩 복구하고 있다던데, 기차 운행이 다시 시작되면 여행객들이 다시 찾아와 주려나?”
“고치더라도 일반 운행은 안 하고 화물만 옮기지 않을까? 마물 조련사가 없다고 악마 숭배자들이 기차를 전복시키지 못하게 된 건 아니잖아. 그런데 누가 기차를 타려고 하겠어? 기차가 엎어지면 도망도 못 치고 그냥 제물행일 텐데.”
“하긴 그것도 그러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곧 기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일행들의 능력이면 악숭이들이 기습해도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고, 악마가 나타나더라도 미리 감지하고 기차를 멈춰 세울 수 있으니까.
운영을 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돈을 지불하고 기차 한 대를 전세 내겠다고 하면, 철로 수복 과정에서 엄청난 지출을 한 철도 공사 측에서도 환영하겠지.
‘근데 마물 조련사라면 마인 러스티를 말하는 거겠지···?’
언제 그런 별칭이 붙은 건지 모르겠다.
교단과 악숭 세력, 그 어느 쪽도 마인 러스티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니.
공식 명칭은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며 퍼지게 된 별칭이 아닐까 한다.
“마인 러스티가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마물 조련사보다는 ‘철로 파괴자’나 ‘매국노 러스티’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지 않나?”
사회 부적응자 느낌이 나서 하찮게 느껴지는 효과도 있으니, 악당의 별칭으로써 이보다 훌륭한 별칭도 없으리라.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들 내 혼잣말을 재밌게 들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대륙은 언제쯤 평화를 되찾게 될 수 있을까?”
웃음 소리 사이로 부정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일부러 목청을 높인 것 같지는 않았으나 제법 큰 목소리였기에, 일부러 들으려 한 것도 아닌데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무슨 의도로 그런 소리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들 마인 러스티를 비웃고 있었다.
재밌는 얘기에 초 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화로운 수준 아닌가? 악마 숭배자에 관한 것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지, 우리가 사는 곳은 실제로 공격받은 적도 없고···.”
“그러게? 사실 나는 선택의 날이 지나고 나면 악마 숭배자들이 허구한 날 도시를 공격해서, 사람들이 죄다 죽어나갈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더라. 큰 피해를 본 나라도 매국노···, 푸훕! 아무튼 그 사람이 다스렸던 공국 하나뿐이잖아?”
그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