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6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64화(864/1105)
864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5)
“으, 아아, 아···!”
콱 막혔던 숨통이 트이며 입에서 울음도 비명도 아닌 이상한 괴성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바닥을 짚은 손바닥을 통해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딱딱하고 거친 돌 타일의 감촉에, 내 손에 잡힌 것이 검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도배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물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그저 멍하니 귀로 들려오는 내 호흡 소리에 집중했다.
거친 숨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날 뻔했던 거지···?’
여전히 머릿속이 멍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가득 차올랐던 눈물을 떨구고, 소매로 눈가를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 나서 팔을 내리자 바닥에 쓰러진 채 기절해 있는 법숭이가 보였다.
‘역시 아까 발끝에 닿았던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섬뜩함이 등줄기를 훑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고 손이 달달 떨렸다.
“흐음, 이 정도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줄은 몰랐군.”
머리 위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고저 없이 평이한 목소리 톤이었으나 위선자라며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나?
차마 위를 올려다볼 용기가 나질 않는다. 어떤 낯으로 녀석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따져야 하나···?’
한데 내가 녀석에게 따질 상황이 맞기는 하나 의문이다.
각오도 없이 입을 가볍게 놀렸느냐는 타락펜스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질 뿐이다.
요즘 타락펜스는 화가 나더라도 폭력적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고, 신성력도 내가 거부하니 사용하지 않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녀석이지만, 성실한 성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과거의 상처를 마주 보고자 노력해 보겠다는 약속도 아마 지키지 않을까 싶다.
반면에 나는 이 세상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다지 노력한 게 없는 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신해 왔으나, 타락펜스의 시선으로 보면 나태하고 오만해 보일 만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켜보겠다는 각오조차.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기 위한 변명이 아니었을까, 그런 비관적인 생각마저 떠올랐다.
“정신을 차린 것 같은데 아니었나?”
“···잠깐, 혼자 있고 싶어.”
대답을 하지 않으면 녀석이 어떤 돌발 행동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타락펜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녀석의 생각이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감도 커졌다.
어째서 녀석이 도중에 마음을 바꾼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금 변덕을 부리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또다시 억지로 검을 쥐여주고 내게 살인을 강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선수 치기로 했다.
“프레이 님. 아까 이곳에 오래 붙잡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심문을 못 하더라도, 어딘가 중요한 정보가 적힌 서류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조사라도 하고 오세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과연 타락펜스가 이 설정 놀이에 동참해 줄지 몰라 긴장됐다.
“지금은 ‘나’와 대화하기 싫다는 뜻인가?”
“······.”
“···주교님을 흑마법사들과 한 공간에 둘 수는 없으니, 저자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타락펜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그런 나 자신이 굉장히 비겁하게 느껴졌다.
뒤에 서 있던 녀석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후 무슨 일이 이어질지 알기에 앞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바라보는 것조차 못하느냐고 타락펜스가 비웃고 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확인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타락펜스의 발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 걷는 소리가 내 주위를 빙 도는 거로 보아, 위층으로 올라간 건 아니고 이 지하실을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다.
온 신경이 그 발소리에 쏠렸다. 긴장했는지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두근거리는 소리 때문에 타락펜스의 발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더 집중해야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청력이 아닌 시력으로 녀석의 움직임을 살피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녀석이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볼지 불안하여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위층을 살펴봐야 하는데···.”
천천히 발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락펜스는 평소에도 내가 본래 세상으로 도망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태가 불안정하기까지 하니, 나를 혼자 두는 게 더 꺼려졌나 보다.
“묶어두고 싶다면 맘대로 하세요.”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교님.”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까지 꼬박꼬박 주교님 소리를 붙여야 하나? 더군다나 허락해 줬다는 표현은 또 뭐고?
불만이 샘솟았으나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녀석에게 몸을 내맡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지금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위험한 것이 없다는 건 전부 확인했으나, 혹시 모르니 너무 움직이지 마십시오.”
타락펜스가 내 입에 재갈을 물리며 말했다.
사람을 밧줄로 묶어놓고 움직이지 말라니, 내가 지하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라도 할 줄 아나 보다.
가뜩이나 조금만 움직여도 멍든 곳이 눌려서 아픈데 그딴 짓을 할까 보냐.
‘그런데 어쩐지 이번에는 덜 아프게 묶인 것 같다···?’
밧줄이 팽팽하다 못해 꽉 조여지던 평소와 다르게 살짝 느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혼자서 밧줄을 풀고 벗어날 수 있을 정도는 아니긴 해도.
변장하느라 옷을 갈아입을 때 내 몸에 난 멍을 보고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내 발로 녀석이 있는 지하실까지 걸어온 게 주효했던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냥 좋게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주변에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고요 속에 잠기고 나서야 현 상황이 제대로 인지되었다.
‘잠깐만. 지금 내가 자진해서 밧줄에 묶인 채 낯선 지하실에 방치된 거야?!’
정말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다.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거나.
아니면 근래 들어 매일 같이 포박당하다 보니, 묶이는 것에 거부감이 사라지기라도 했나 보다.
어느 쪽이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펜스와 떨어지고 싶었다.
‘이제 와서 타락펜스가 무서워진 건 아니지만, 녀석이 내게 저지르려 했던 짓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만 생각하자. 어차피 엎어진 물인데 뭐 어쩔 거야?’
나는 애써 침착해지려 심호흡을 하며, 원래 하려던 생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타락펜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던 것도 잠시 치워뒀다.
‘방금 내가 겪었던 그 상황, 세르펜스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일과 비슷했지···?’
세르펜스는 어린 시절 무방비 상태에 놓인 마물을 죽이도록 강요받았다.
그것도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 반복해 가며 말이다.
비록 어린 세르펜스가 죽였던 건 인간이 아닌 마물이긴 했지만.
그때의 세르펜스는 현재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까마득히 어린 나이였다.
심지어 마물은 기절도 하지 않은 터라 생존 본능이 가득한 눈을 마주해야만 했다.
‘세르펜스는 익숙해지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었어.’
적응하고 무감각해지는 것만이 녀석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분명 알고 있던 거였는데 그 사실을 간과했다.
시간이 3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급해졌나 보다. 혹은 타락펜스가 내 말을 은근히 잘 들어주는 것 같아서 방심했거나.
어찌 생각해 보면 몸 상태가 너무 나빠서 생각이 짧아져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이것저것 다 아니라면, 나도 모르게 현재의 세르펜스를 기준으로 잡고 타락펜스를 가르치려 들었던 걸 수도···.’
현재펜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문이나 폭력이 나쁘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신을 혐오하고 있긴 했지만.
반대급부로 어렸을 적 자신이 겪은 일들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걸, 비교적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함께해 온 그 세르펜스는···, 내게 변하지 말아 달라고 했단 말야···.’
그 녀석은 내가 ‘나’로서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말로만 그러한 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지켜줬다.
현재펜스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긴 시간이 흐른 뒤 돌아가도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기에 나는 이 육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이 세상에 남겠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타락펜스와 함께 있으면 하루하루 ‘나’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아, 이런 생각을 하려던 게 아닌데···.’
타락펜스가 왜 내게 살인을 강요했는지 찬찬히 생각해 보고, 앞으로 그러지 못하도록 설득할 말을 준비해야 하건만.
눈앞이 또 뿌옇게 흐려졌다.
세르펜스가, 아도르가 너무 보고 싶다.
호칭만 ‘아도르’일 뿐, 본질적으로 그 이름과 너무나도 멀어져 버린 타락펜스가 아니라.
내가 애지중지 길렀고, 나를 귀히 여겨주었던 그 아이를 보고 싶다.
“우윽, 읏···, 흑···!”
입이 막혀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목놓아 꺼이꺼이 울어 젖히며, 세르펜스를 데려오라고 소리 질렀을 테니까.
그렇게 혼자서 울고 또 울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폐광으로 보이는 어느 동굴 안이었다.
나도 모르게 울다 지쳐 기절하듯 까무룩 잠들었고, 그런 나를 타락펜스가 들어다 옮긴 거겠지.
“드디어 깨신 겁니까?”
내심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타락펜스는 내가 깬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어느새 밧줄이 사라져 있었기에 나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후, 내 손으로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손발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이건 왜 계속 물려 놨는지 모르겠다.
“주교님께서 자꾸만 잠결에 프라시더스 공작을 찾으시기에, 제가 질투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계속 막아뒀습니다.”
내가 재갈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자 타락펜스가 내 의문을 풀어 주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비꼬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 예. 참 자알~ 하셨습니다.”
이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건지 타락펜스가 쓰다듬어 달라며 내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순간 이걸 쓰다듬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어쨌거나 자제심을 발휘했다는 것에 큰 점수를 주기로 했다.
나는 녀석의 머리칼을 대충 헝클어뜨리고 손을 뗐다.
“그보다 아까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선우로서 말하는 거라면, 머리색을 본래 색으로 되돌려 놓고 대화를 나눠도 되겠는가?”
타락펜스가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색 염색약을 꺼내며 말했다.
고작 머리카락 색은 원래의 내가 지녔던 색을 고집하는 주제에, 어째서 ‘나’라는 존재의 근본을 바꾸려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 의문은 곧바로 내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너는 내가 너처럼 변하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정신이 망가져서 너에게 모든 의지를 의탁하길 바라?”
[연재] 공작님, 회개해주세요!출판등록: 2019년 1월 28일
지은이 : 별볆볆별명
발행처 : 글고운
주소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광로139번길 11, 1103호
E-mail : [email protected]
ISBN :979-11-89786-03-8
© 별볆볆별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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