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6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66화(866/1105)
866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7)
* * *
최근 들어 타락펜스가 유순해졌다.
오늘만 해도 낮에 악숭 세력의 은신처를 하나 탈탈 털고,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도 될 것을 굳이 도시로 와서 고급 여관에 방을 잡아 줬다.
저번에 동굴에서 나눈 대화가 녀석을 변하게 한 건가 싶으면서도.
녀석이 내게 법숭이를 죽이도록 강요했다가 미수로 끝난 이후, 밧줄을 느슨하게 묶었으니 그때가 기점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그날 타락펜스가 현재의 세르펜스에 관해 언급했었지?’
나는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생각에 잠겼다.
사실은 이렇게 혼자 고민하는 게 아니라 타락펜스에게 직접 묻고 싶다.
혹시 그날 도중에 멈췄던 건 현재펜스의 의지였냐고.
하지만 그 물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라서, 꾹 참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설마 나를 계속 몰아붙이면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길 것 같아서 태도를 바꾼 건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것인가는 둘째 치고.
타락펜스가 한 달이라는 기한을 지키지 않겠다며 버티더라도, 내 소중한 세르펜스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보였다.
그와 별개로 타락펜스의 태도가 변한 게, 몸을 빼앗길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은 아니었으면 한다.
기왕이면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무언가를 느껴서 반성한 것이길 바란다.
‘그래서 녀석이 스스로 물러나 주면 좋을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샤워기 물을 잠갔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는데 멍이 조금 옅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긴가민가 하지만 나날이 심해져 가기만 했던 멍이 더 악화하지 않은 게 어디랴 싶다.
잠옷을 입고 욕실에서 나가자, 가죽으로 만든 수갑을 손에 들고 있는 타락펜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건 또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내게 가학적으로 구는 건 그만둔 게 아니었나?
당황하여 욕실 문 앞에서 굳은 듯이 서 있는데, 타락펜스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와 내 상의를 들췄다.
“흐음···.”
“흐음이 아니잖아. 지금 뭘 하는 거야?”
“멍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게 답하며 타락펜스가 들췄던 상의를 내리고 흐트러진 내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애초에 멍을 만든 게 이 녀석이건만, 나도 모르게 살짝 감동하고 말았다.
“날 걱정해 준 거야?! 고마워!!”
“······!”
내 감사 인사에 타락펜스가 화들짝 놀라는가 싶더니,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으음거렸다.
그 모습이 흡사 현재펜스 같아서 저절로 녀석의 머리 위로 손이 향했다.
진작 이리도 예쁘게 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남긴 했으나 지금은 타락펜스의 변화에 순수히 기뻐하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밧줄을 느슨하게 묶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앞으로는 이걸 사용할까 한다.”
타락펜스가 내 손목에 가죽 수갑을 채우며 칭찬을 바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내 몸에 난 멍을 낫게 할 방도를 찾아준 건 기특했으나, 그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이런 걸 채워 줘서 고맙고 잘했다며 칭찬하는 건 왠지 좀 그렇다.
하지만 칭찬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으니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아도르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데, 네가 씻는 동안 편지지랑 펜을 써도 될까?”
“···선우를 믿겠다.”
잠깐 멈칫하긴 했으나 타락펜스가 순순히 내 아공간 주머니를 돌려줬다.
이제껏 녀석에게 몇 번 편지를 쓰긴 했지만, 그건 모두 녀석이 지켜보는 앞에서 적은 거였다.
욕실에서 씻는 동안에 내가 쪽지라도 남길까 봐, 소지품 검사까지 했던 녀석이니만큼 안 된다며 거절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편지지와 펜 정도만 꺼내주겠거니 했다.
‘그런데 아공간 주머니를 통째로 돌려주다니?!’
고작 내 물건을 돌려받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감격스러운지 모르겠다.
즐거운 마음으로 탁자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바로 욕실에 들어갈 줄 알았던 타락펜스가 따라와서, 손목에 채운 가죽 수갑과 똑같은 것을 내 발목에 채웠다.
“날 믿겠다며?”
“잘 봐라, 자물쇠가 달려 있지 않잖은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긴 했으나 편지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손이 자유로우니, 선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풀고 달아날 수 있다.”
녀석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손목과 발목에 감긴 가죽 스트랩은 버클을 이용해 풀고 채우는 방식이었다.
자물쇠는커녕 열쇠 구멍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아무 의미도 없는 걸 왜 채우는 거야?”
“선우를 구속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을 이렇게라도 달래는 게 나쁜가?”
“······.”
이 녀석의 집착과 독점욕은 진작 꿰고 있던 터라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밧줄로 꽁꽁 묶여서 옴짝달싹 못 하고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는 것보단, 이게 백배 천배 더 낫겠지.
조금 불편하기만 할 뿐 아픈 것도 아니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절대 풀지 마라.”
“알았으니까 가서 씻기나 해.”
타락펜스를 욕실로 보내고, 나는 새 편지지를 펼쳐 놓고 펜을 들었다.
첫 줄에는 받는 이, [ 오늘따라 좀 대견한 아도르에게 ]라고 적었다.
어차피 늘 같이 붙어 다니니 근황 같은 건 안 써도 되지만, 없으면 서운하니 아까 낮에 먹었던 간식에 관해 맛평가를 하며 가볍게 서문을 열었다.
그러고 나서 녀석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채워 나갔다.
나를 배려하고자 노력하고 믿어 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앞으로는 강제로 내게 무언가를 시키기 전에, 충분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슬쩍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베카 왕국은 처음 와 보는 거니까, 괜찮으면 디저트 쇼핑 겸 같이 구경 다니자는 글을 끝으로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완성된 편지를 곱게 접어 편지 봉투에 넣은 뒤.
양 발목을 감싼 가죽 스트랩을 연결한 쇠사슬 길이만큼의 좁은 보폭으로, 종종 걸어서 침대로 가서 엎어졌다.
‘내가 방에서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니!’
당연한 것이 무척이나 감사하게 느껴졌다.
나는 넓은 침대 위를 좌우로 굴러다니며 조그마한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다 천장을 보며 가만히 누워 있는데 불현듯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지할 데 없이 마음이 허해서 그런가···?’
감시 혹은 관찰하듯 바라보는 시선까지 없으니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낯설고 어색하기까지 했다.
꽁꽁 묶여 있었을 땐 밧줄이 신경 쓰여서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는데.
일감이 마구 몰아칠 때보다 살짝 숨통이 트였을 때 우울함이 밀려든다더니,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나는 공연히 침대 위를 다시 굴러다니다가 이불을 붙잡고 데구루루 굴러 셀프 김밥 말이를 시전했다.
포근한 이불이 온몸을 감싸니 안락함이 찾아왔다.
욕실 문이 열리고 타락펜스가 나온 것도 그때였다.
“······.”
“······.”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냥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있을 뿐인데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찔려서, 후다닥 이불에서 벗어났다.
차라리 당당히 있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후회가 든 건 이미 이불에서 빠져나온 후였다,
타락펜스의 표정이 의심으로 물들었다.
“선우는 역시···.”
“오한이 들어서 그래!”
“이 기온에 오한이라니,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감기 기운까지는 아니니까 몸을 따뜻하게 하고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사시사철 추운 프뤼네 왕국을 벗어나자 8월 특유의 후덥지근한 날씨가 돌아왔다.
오한을 느낄만한 계절이 아니다.
그래도 뻔뻔하게 밀어붙이니 돌연 타락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똑똑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락펜스가 비척비척 힘없이 걸어가 방문을 열더니, 와인과 과일 꼬치가 올라간 쟁반을 받아들고 문을 닫았다.
자신이 씻고 나올 시간에 맞춰 술상을 준비해 달라고 여관 주인에게 얘기해 놨었나 보다.
“으음···, 오늘은 선우와 함께 술을 마셔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선우가 씻는 동안 술과 안주를 주문해 놨는데···.”
자신의 손에 들린 쟁반을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녀석이 작게 한탄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비록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되어 안색이 어두워진 거였으나, 술을 마시자고 밀어붙이지 않는 걸 보면 내 몸을 생각하긴 하는 모양이다.
“그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오한이 든다고 했잖은가? 신성력으로 치료도 거부하면서, 크게 아프기라도 하면···. 음···, 병간호를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타락펜스가 솔깃하다는 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요 며칠 제법 나를 배려해 주는 듯했으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자리를 잡은 건 아직 아닌가 보다.
“안 아파도 병원 놀이든 간호 놀이든 하고 싶다면 같이 해 줄 테니까, 내 걱정을 마저 해 주지 않을래?”
“아···,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던진 말에 타락펜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다가와 내 이마를 짚어 열이 나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갑자기 없던 열이 타이밍 좋게 발생하는 일은 없었고, 타락펜스는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의문 가득한 녀석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다른 소리를 꺼냈다.
“것보다 이제 이거 풀어도 되는 거지?”
“기다려라, 내가 풀어줄 터이니.”
타락펜스가 수갑과 족쇄를 끌렀고,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 앞에 가서 앉았다.
내가 아는 세르펜스는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았고, [성검의 주인]에서 타락펜스가 술을 마셨다는 서술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하기야 식사도 제대로 안 하던 녀석이 기호 식품인 술을 찾았을 리가 없지.’
그런데도 타락펜스가 돌연 술상을 준비한 이유라면 뻔하다.
신성력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내가 현재펜스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얘기를 흘렸고, 그걸 듣고 부러워서 자기도 나와 대작해 보겠다고 이러는 걸 테다.
즉, 버킷 리스트 중 하나란 소리다.
“무리해서 마시지 않아도 된다.”
타락펜스가 슬그머니 의자에 앉아 조금 전 내가 쓴 편지를 챙기며 말했다.
걱정하면서도 할 건 다 하는구나 싶다.
“아냐, 괜찮아. 그리고 나랑 같이 술 마시는 거, 버킷 리스트 중 하나잖아?”
“고맙다, 선우가 아프면 내가 꼭 붙어서 간호해 주겠다. 안 아파도 간호해 주겠다.”
“어, 응. 그래, 고마워···.”
“선우도 날 간호해다오. 내가 아프지 않아도.”
“언제 하루 날 잡아서 오전에는 내가 환자 하고 오후에는 아도르가 환자 하면 되겠네.”
나는 타락펜스의 말에 적당히 호응해 주며 와인을 잔에 따랐다.
그러면서 안주를 슥 살펴봤는데 영 부실한 게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의 나는 고기도 치즈도 먹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린 것을.
쟁여둔 디저트 중에 와인과 어울릴 만한 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와인에 졸인 무화과를 넣은 파운드 케이크를 꺼냈다.
선정 기준은 간단하다.
재료에 와인이 있으니 와인과 함께 먹어도 이질감이 없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와인과 파운드 케이크는 제법 잘 어울렸다.
타락펜스도 굉장히 만족한 듯 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이 녀석과 술을 마시며 대화할 만한 주제가 마땅찮다는 점이다.
녀석이 알고 있는 악숭 은신처 중, 남은 곳은 어디인지 물어보고 났더니 할 말이 뚝 떨어졌다.
[연재] 공작님, 회개해주세요!출판등록: 2019년 1월 28일
지은이 : 별볆볆별명
발행처 : 글고운
주소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광로139번길 11, 1103호
E-mail : [email protected]
ISBN :979-11-89786-03-8
© 별볆볆별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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