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6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70화(870/1105)
870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11)
그러고 보면 신성력은 원래 이런 것이었다.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는 듯한 폭력적인 힘이 아니라, 다정하게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듬어주는 상냥한 힘이 바로 신성력의 본질이다.
이 사실을 그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너무하는군. 내 것은 거부했으면서···.”
뒤에서 타락펜스가 서운함을 피력하며 내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에일리히의 손을 놓쳐버렸다.
어차피 회복을 마쳤으니 더 잡고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선우 님? 조금 전에 말씀하신 재시작 얘기도 그렇고, 지금 세르펜스가 한 얘기도 그렇고···. 제가 들어야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파 보이는 사람을 보고 치료를 우선시했을 뿐, 내 얘기를 흘려들은 건 아니었는지 에일리히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힐끔힐끔 타락펜스를 쳐다보는 그의 두 눈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저 녀석이 현재펜스가 아닌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걸 테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얘기하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로 향했다.
타락펜스는 기차놀이라도 하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졸졸졸 나를 따라왔다.
그러다 소파에 나란히 앉게 되자 계속 내 어깨를 짚고 있기 불편했는지, 그때서야 손을 뗐다.
어린애처럼 나를 따르는 녀석의 모습에서 현재펜스의 편린을 본 것일까?
심각하게 굳어있던 에일리히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일단···, 설명하기 전에 간식부터 준비해도 되죠?”
“네, 기다릴 테니 편하실 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참 고맙게도 에일리히는 기꺼이 기다려 주겠노라 대답했다.
내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간식과 세계수 잎 차, 그리고 찻잔과 접시 등을 꺼내어 테이블을 세팅하는 동안.
두 명의 프라시더스는 맞은 편에 앉은 서로를 조용히 관찰했다.
조카를 바라보는 에일리히의 표정에는 걱정과 의아함이 혼재해 있었다.
반면에 그를 바라보는 타락펜스의 표정에 떠오른 건 호기심 섞인 기대감이었다.
에일리히가 내게 신성력을 쓴 것 때문에 타락펜스의 기분이 상할까 걱정했건만, 다행히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심하며 석 잔의 찻잔을 모두 채운 뒤 말문을 열었다.
“아까도 말하긴 했지만, 그땐 너무 급하게 되는 대로 말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 다시 얘기할게요. 이 세상은 악숭 세력을 막지 못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보았고, 그 까닭에 신 룩스메아의 힘으로 재시작한 결과가 현재입니다.”
“그래서 선우 님께서 시온 님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게 된 겁니까?”
“네, 맞아요. 내부적으로 문제 해결이 안 되니까, 외부에서 절 불러온 거죠.”
“평범한 신의 사자와 다르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런 사정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리는 에일리히의 반응으로 보아, 여기까지는 잘 이해한 모양이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에일리히는 제 조카의 바뀐 분위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녀석의 허리춤에 걸린 성검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 사실을 설명해야 할 때다.
“그리고 여기, 제 옆에 있는 이 녀석은 그 시기의 세르펜스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세르펜스는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이전 회차의 세르펜스가 튀어나온 거냐는 물음보다, 현재펜스의 안위에 관한 질문이 먼저 나왔다.
무엇보다도 조카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에일리히의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타락펜스는 자신을 앞에 두고 현재펜스를 찾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불만스레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타락펜스의 앞에 놓인 빈 접시에 오늘의 간식 ‘티그레’를 하나 옮겨 담았다.
설명하는 동안에는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그거나 먹고 있으라는 뜻에서 한 행동이다.
그게 통했는지 타락펜스는 불만을 입 밖으로 표출하는 대신 간식을 입안에 넣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세르펜스가 성검을 잡는 바람에 얘가 튀어나온 거니까, 성검을 휴마누스에게 돌려주고 나면 현재펜스도 돌아올 겁니다.”
“네?! 세르펜스가 성검을···?”
현재펜스가 성검을 잡았다는 소리에 에일리히가 깜짝 놀라며, 간식을 먹던 타락펜스의 손을 낚아채 녀석의 손바닥을 자세히 살폈다.
자격 없는 자가 성검을 잡으면 신성력으로도 치료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보인 행동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타락펜스의 허리춤에 걸린 검에 먼저 시선이 갔을 텐데.
그러지 아니하고 조카가 다쳤을까 봐, 걱정부터 한 에일리히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타락펜스는 에일리히에게 얌전히 손을 내어주며 걱정 받는 이 상황을 즐겼다.
정작 에일리히는 조카의 손바닥을 세심하게 살펴보느라, 타락펜스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했다.
흉터 하나 없이 멀쩡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인지.
정말 성검에 의해 다쳤다면 소용없었을 신성력까지 발휘해 가며, 에일리히는 타락펜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세르펜스는 성검을 쥐어도 다치지 않습니다. 원래 성검의 선택을 받은 건 휴마누스가 아닌 세르펜스였거든요.”
“그 말씀은 세르펜스가 진짜 성검의 주인이고···. 대륙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입니까···?”
에일리히가 타락펜스의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옥 붙잡으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성검의 주인이었으면서 어째서 대륙을 구하지 못했느냐고 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그 일관적인 태도에 타락펜스가 말없이 눈을 빛냈다.
‘부디 저 녀석이 나 하나로 만족해 줬으면 좋겠는데···.’
녀석이 납치하고 싶은 건 나뿐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저러다 마음이 바뀌었다며 에일리히까지 덜컥 납치해 버릴까 봐 걱정이다.
아니면 에일리히에게 함께해 달라고 부탁한다거나.
이 경우 ‘납치’는 아니니까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닌지라 뭐라 따지기 힘들다.
“네. 하지만 그건 세르펜스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타락펜스가 에일리히에게도 집착할까 봐 불안한 건 불안한 거고 설명은 설명이다.
나는 타락펜스가 아니라 1회차의 성검펜스가 겪었던 일을 간략하게 줄여서 얘기했다.
최대한 곁가지를 쳐낸 짧은 설명에도, 에일리히는 성검펜스가 느꼈을 고독함을 읽어내어 비통에 잠겼다.
그리고 휴마누스가 성검의 주인이 된 과정에 관해 얘기했을 땐 감격하며 안도했다.
“이제까지 얘기한 내용은 전부 비밀입니다. 휴마누스보다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으로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세상은 다시 그 시기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교단에도 비밀로 해야 합니까?”
“네. 절대, 무조건. 에일리히 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데 순수하게 기뻐할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 시절의 일은 알아봤자 하등 좋을 게 없는 반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은 법이니. 그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마세요.”
나는 에일리히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대륙의 미래와 자신의 조카, 양쪽 모두를 위한 일이며 이제 교단에 매인 몸도 아니니.
에일리히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꼭 비밀을 지키겠노라 약속했다.
“그보다 세르펜스는 어쩌다가 성검을 잡게 된 겁니까?”
“악숭 살롱에서 악마를 찾은 것까진 순조로웠는데, 놈이 예상했던 것보다 강하기도 하고···. 그래서 세르펜스가 성검을 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악마가 도망치지 않도록 성검과 휴마누스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세르펜스가 악마를 상대하며 시간을 끌다 인질로 잡혔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세르펜스에게 성검을 넘기는 과정에서, 그것이 녀석의 복부를 꿰뚫었다는 얘긴 더더욱 할 수 없었고.
“아! 참고로 이런 얘기도 비밀인 거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비밀을 어째서 제게만 알려주시는 겁니까? 그리고 ‘이 세르펜스’를 데리고 저를 찾아오신 이유도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에일리히 님께서 현재펜스에게 쓰신 편지를 이 녀석이 읽더니,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요.”
“저를 말입니까···?”
에일리히가 감동과 미안함이 뒤섞인 시선으로 타락펜스를 바라보았다.
타락펜스는 다정함이 깃든 그 눈동자를 마주 보며 눈을 반달처럼 휘며 웃었다.
“진심으로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혈육이 있다길래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습니다. 수도에서 머무르신다는 건 진작에 알았으나,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피했었는데···. 이런 분이실 줄 알았으면 성검의 주인 내정자이던 시절, 온갖 핑계를 대며 대신전에 찾아가 만남을 청할 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저도 사랑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 테고, 그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았을 텐데 실로 아쉽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들뜬 목소리로 유감을 표하는 타락펜스의 말에, 에일리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나 마나다.
어른인 자기가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후회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낸 에일리히를 바라보며 타락펜스는 희열에 찼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인데 어째 타락펜스는 상대방이 걱정이나 후회 등, 그런 ‘아픈 감정’을 느낄 때 유독 기뻐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지 고민하고, 내가 웃으면 더 환하게 웃는 현재펜스와는 딴판이다.
“내가 혼자 남은 너를 신경 써 줘야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럼 그만큼 저를 아껴주십시오.”
“꼭 그리하겠다.”
“백부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저를 아껴 주실 겁니까?”
마치 빌려준 돈을 언제 갚을 거냐고 독촉하는 듯한 말투다.
그 태도에 에일리히는 크게 당황하며 어버버거렸고, 타락펜스는 얼굴에 떠오른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삼키며 녀석을 달랬다.
“아도르, 에일리히 님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이미 행동으로 보여주셨잖아. 어떻게 대해야겠다고 미리 생각해 뒀다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든, 그때그때 감정과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든. 애정의 크기와는 무관해.”
“그런 건가?”
“그런 거야. 너도 에일리히 님께서 너를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신다는 걸 느끼고 있잖아?”
“으음, 그거야 그렇지만···.
못내 아쉽다는 듯 타락펜스는 말끝을 흐렸다.
에일리히의 진심을 느끼고 있긴 하나 좀처럼 믿기 힘든가 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은 사람들 앞에서는 세르펜스를 사랑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온갖 학대를 저질렀다.
그러니 닮은꼴인 에일리히의 진심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현재펜스는 에일리히를 빨리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녀석은 나와 유지스와 윈스톤을 곁에 두었으며, 공작저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존경하며 따른다는 사실까지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에일리히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반면에 타락펜스 이 자식은 나만 쏙 납치해서 데리고 다녔다.
가뜩이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애정의 기준이 전부 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에일리히에게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아껴줄 거냐고 물은 것도 그런 연유겠지.
[연재] 공작님, 회개해주세요!출판등록: 2019년 1월 28일
지은이 : 별볆볆별명
발행처 : 글고운
주소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광로139번길 11, 11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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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89786-03-8
© 별볆볆별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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