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7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78화(878/1105)
<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19) >
비비가 몸을 움츠리는 걸 느꼈는지, 그의 어머니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시온, 형이 돼서 동생을 겁주면 안 되지.”
“나, 나 겁 안 먹었어!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악마 숭배자를 제압하고, 최연소로 명예 기사 작위까지 받은 이 레비비솉, 솃, 솅···. 이 비비 경이 고작 이런 거로 겁먹을 리가 없자나!”
누가 봐도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면서, 비비는 과장된 말투로 자신은 겁먹은 적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면서 자신의 옷에 달린 큼직한 브로치를 뽐내듯이 만지작거렸다.
작은 몸에 비해 너무 커서 무겁지 않을까 싶지만, 저래 봬도 비비는 리벨론 가문의 최강자다.
고작 훈장처럼 생긴 커다란 장신구를 달고 다니는 것쯤이야, 본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보다도 쉽겠지.
‘···잠깐, 훈장? 설마 저거 진짜 훈장이야?’
비비가 제압했다는 악마 숭배자란 그를 죽이려 했던 민숭이를 지칭한 걸 테다.
무력을 갖춘 악숭이도 아니고 한낱 민숭이에 불과하건만.
심지어 자기 자신을 보호했을 뿐인데, 제국 황실이 두 살배기 아기에게 훈장에 명예 작위까지 내렸을 줄은 몰랐다.
‘나도 황실로부터 아무것도 못 받았는데?’
황제의 꿍꿍이가 몹시 의심스럽다.
설마하니 될성부른 떡잎이 교단에 홀라당 들어가 버릴까 봐, 귀족 사회에 붙여 놓으려고 미리 손을 쓴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와 현재펜스가 추측한, 타락펜스의 타락 원인 중에는 ‘황제의 자식 사랑’도 있었다.
이 추측이 맞는지는 타락펜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으리라.
방금 떠오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내 정체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그럼, 그럼~. 우리 귀엽고 강한 비비 경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겁먹을 리가 없지~!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네, 비비는 정말···. 이렇게나 작고 어린데 이 어미보다 더 듬직해서···.”
시온의 어머니가 남편의 말에 대답하다 말고 돌연 울컥해 하며 목소리를 떨었다.
자신의 친구가 비비를 죽이려 한 사건이 떠올라서 저러는 걸 테다.
아찔한 기억을 상기하고 자책하는 아내가 안쓰러웠는지, 시온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비비는 자신을 소중히 끌어안은 어머니의 손등을 토닥였다.
조금 전 그가 과장스러운 태도로 자신은 겁먹지 않았다고 주장한 건, 잘난 척이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필시 그런 거였겠지.
“엄마, 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차나.”
“우리 비비가 또래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한 신성력 천재라는 건, 이 엄마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너는 아직 아기잖니.”
“나는 보통 아기가 아냐.”
“그래, 그래. 우리 비비는 보통 아기가 아니라 이 대륙 제일가는 천재 아기지!”
비비와 대화를 하다 보니 기분이 나아졌는지 그의 어머니가 밝게 웃음 지었다.
반대로 비비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쳤다.
“그런 뜻이 아냐, 엄마. 내가 진짜 시오니야!”
“갑자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혹시 형의 장난에 맞춰주고 있는 거니?”
“그런 거 아니래두! 저기 내 예전 몸에 들어있는 건 정말 신 룩스메아 님께서 불러온 다른 세상의 사람이고, 나는 신성력이 있는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난 거야!”
무슨 말을 해야 시온의 부모님들이 내 말을 믿어주실까 고민이 참 많았는데.
비비의 주장을 듣고 있자니 괜한 고민이었구나 싶다.
내가 시온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보단, 비비가 시온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게 더 빠를 테다.
나는 잘못된 노선을 수정하여 계획을 다시 짰다.
“비비가 하는 말이 맞습니다. 신성력과 연이 없는 리벨론 가문에서, 갑자기 비비처럼 강한 신성력을 갖춘 아기가 태어난 게 어째서겠습니까? 그 신성력은 제게 몸을 내어준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입니다.”
“비비의 신성력은 네가 신의 사자로서 열심히 일해서 받은 선물 아니니?”
“제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건 비밀이라서 대충 그렇게 둘러댄 겁니다.”
내가 진지하게 얘기하고 비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에 동조하자, 슬슬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시온의 부모님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대충 ‘저 말을 믿어요?’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 다 확신이 없었으니 결론 같은 게 나올 리가 없다.
“정히 저와 비비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시온만 대답할 수 있을 법한 질문들을 비비에게 던져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비비가 시온이라는 게 확실해질 테고, 제가 시온이 아니라는 것 또한 증명될 겁니다.”
오늘을 제외하면 내가 비비를 만난 건 딱 한 번뿐이며, 그때 그는 고작 생후 2개월 남짓한 갓난아기였다.
내가 비비에게 시온의 개인 정보나 추억 같은 걸 알려 준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비비가 시온에 관해 속속들이 안다는 건, 그가 시온 본인이라는 근거가 된다.
둘째 아들이 이제는 둘째 아들이 아니며, 막내아들이 사실은 둘째 아들이라는 이 괴상한 얘기를 대체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제 장난은 그쯤 하라며 화를 낼 만도 하건만, 시온의 부모님은 장난에 동참하는 셈 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얼굴이 굳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말 비비 네가 그 소심한 둘째 시온이라고···?!”
“그, 그렇다기엔···, 성격이 너무 다르지 않아···?”
늦둥이 비비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그의 성격을 바꾸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두 사람이 나란히 경악했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도 비비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난 이제 귀엽고 강하게 다시 태어났으니까! 앞으로는 당당하게 살아갈 거야!!”
저번에 만났을 때 다시 태어난 몸이 마음에 든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이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몰랐다.
비비로서의 삶을 즐기다 못해 아주 만끽하고 있나 보다.
굉장히 얼떨떨하지만, 행복해 보이니 됐다.
“그럼 신성력을 지닌 귀여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겠다는 얘기에, 우리와 상의도 없이 몸을 넘겨 줬다는 거야?”
시온의 어머니는 안 됐나 보다.
하기야 배 아파 낳은 자식이 타고난 몸이 마음에 안 들어서, 기존의 몸을 남에게 주고 다른 몸으로 갈아탔다는 듯한 소리를 해댄 격이니.
어머니로서 섭섭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겠지.
그런 감정들이 뒤섞인 제 어머니의 표정에 비비가 아차 하며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냥···, 갑자기 다시 태어난 거라서···.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한 건, 저번에 보좌관님을 만난 이후야! 그래서 내가 보좌관님을 보고 놀라서 머리를 쥐어 뜯었자나!”
“그···게 그런 이유였니?”
“응! 누가 내 몸에 멋대로 들어가서 가족들에게 접근하니까, 내가 모두를 지켜야 할 것 같아서!”
비비의 기특한 대답에 그의 어머니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가, 돌연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몸이 굳었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좌관님께 뭐라고 하지 마. 얘기를 들어 보니까, 보좌관님도 사전 동의 없이 불려 왔다는 것 같더라고. 그 탓에 가족들과 인사도 못 나누고 갑자기 낯선 세상에 오게 돼서···. 아무튼 보좌관님은 시온 형의 몸을 가로챌 생각조차 없었고, 그런데도 자신이 내 소중한 가족을 빼앗은 것 같다며 무척이나 미안해하셨어.”
제온이 말을 하던 도중 잠깐 나를 곁눈질하며 말끝을 흐리더니 화제를 살짝 틀었다.
내가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힘들어했다는 얘기를 자기가 멋대로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한 걸 테다.
처음 제온에게 정체를 들켰을 때만 해도, 그가 나를 이렇게 두둔해 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편들어 줘서 고마워.”
“편을 들어준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리고 내 가족들이 보좌관님의 사정을 뒤늦게 알고, 나처럼 후회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틱틱거리는 말투만 들었다면 얘가 아직도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보건대 감사 인사를 받은 게 민망하기도 하고, 과거의 일이 미안해서 괜스레 쌀쌀맞게 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분위기가 너무 숙연해진 것 같은데···.’
제온이 도중에 말을 바꾸긴 했지만, 내가 아무런 예고도 받지 못하고 가족들과 떨어졌다는 얘기만은 제대로 전달되었다.
가족을 아끼는 리벨론 가의 사람들이 내 처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하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제 아셨겠지만, 저는 두 분의 진짜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지내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할 말을 다 끝냈으니 이만···.”
“호, 혹시 내가···! 아, 아니, 제가 프라시더스 님께 전해 달라고 했던 얘기 때문에 사실을 밝히러 오신 겁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시온의 아버지가 나를 붙들고 질문했다.
그도 나이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에일리히를 ‘어르신’이라고 부르기 뭐해서, ‘프라시더스 님’이라고 부르기로 한 모양이다.
아니면 에일리히가 조카와의 연결 고리인 가문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했거나.
“그 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얘기 덕분에 깨달았을 뿐입니다. 두 분께서는 제가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고, 절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저희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요. 그보다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말은 다시 낮춰 주세요.”
“알겠습···, 그래. 그럼 너도 말을 편히 하렴.”
“네, 그럴게요.”
존댓말을 쓰는데 말을 편히 하고 말고가 어딨겠느냐마는.
편히 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건, 내가 그만큼 경직된 자세로 어색하게 대화에 참여했다는 뜻이겠지.
나도 모르게 긴장을 많이 했나 보다.
사실 지금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대화가 잘 풀려서 얼떨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원망이 담긴 말을 한마디 이상 들을 줄 알았는데, 별말 없이 조용히 넘어가서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해도 괜찮으냐?”
“물론이죠.”
“네가 신의 사자라는 것을 숨기려 한 이유는 우리가 위험해질까 봐서겠지. 그리고 방금 우리에게 정체를 밝힌 건, 우리가 너를 걱정할까 봐 그런 거고. 그럼 네가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숨기려는 이유는 뭐지?”
질문이 제법 예리하다.
한미한 시골 영지긴 해도 영주직에 오래 앉아 있었으니 연륜은 무시할 수가 없나 보다.
잠시 고민해 봤지만,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떠오른 대로 사실을 말했다.
“저는 이곳에 상당히 오래 머무를 예정인데, 제가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제게 이질감을 느낄 테니까···. 그래서 비밀로 하고 싶어요.”
“···본명이 어떻게 되나?”
“선우입니다, 유선우.”
“낯선 발음이군.”
“아무래도 다른 세상의 언어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최대한 가볍게 말한다고 말한 거였는데 나를 바라보는 부부의 표정이 어두웠다.
진짜 아들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계속 걱정해 주는 건가?
가족의 정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 동정을 베푼 것일 뿐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가족들이 내 처지를 안다면, 저들과 똑같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목구멍이 저릿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제 가 볼게요. 바쁜 와중에 시간 내서 온 거라서···. 제온, 비밀 통로 좀 열어 줄래?”
지금 당장 바쁜 일은 없다.
그래도 나는 시온의 부모님이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저, 저기. 서언···우 군이라고 했···지?”
“어차피 정체를 숨겨야 하니까, 껄끄럽더라도 시온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럼 시온도 우리가 불편하겠지만, 가족처럼 여겨 주겠니?”
시온의 어머니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부탁을 가장한 위로를 건넸다.
짧은 그 한 마디에 담긴 배려가 너무 따뜻하고도 무거워서, 나는 차마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비밀 통로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