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7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79화(879/1105)
<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20) >
곧바로 비밀 통로의 입구가 닫혔다.
어두운 통로를 걸어가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건 타락펜스와 에일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에일리히는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워서 그렇다 쳐도, 타락펜스라면 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떠들 줄 알았건만.
구경하고 싶다며 따라온 녀석이 아무런 감상평을 내놓지 않으니 더 찝찝하다.
‘에일리히 님은 표정이 어두워져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라도 가는데, 저 녀석은···.’
무표정한 모습이라 짚이는 바가 없다.
그 까닭에 오히려 내가 타락펜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차라리 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 건, 도로 세르펜스의 방에 도착한 직후다.
“혹시 할 말 없어?”
“음···, 리벨론 경의 성격이 많이 달라졌더군. 같은 사람이 동일 가정에서 자랐는데도 이렇게나 달라지는 게 가능한 일인가?”
이 녀석이 비비에 관한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다.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다.
“동일 가정이라 해도 똑같은 환경은 아니니까. 일차적으로 신성력 덕분에 본인의 능력에 믿음이 생긴 데다가, 늦둥이라서 가족들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잖아? 게다가 제온의 말에 따르면, 가족이 아닌 사람들까지 귀엽다며 입 모아 칭찬하는 모양이고. 어른이었던 시온의 눈으로 보기에도 아기인 비비의 모습이 귀여워 보일 테니, 저렇게 변할 만도 하지.”
“그런 건가?”
“그런 거야. 자신감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주변의 인정, 그 두 가지가 모두 뒷받침되었을 때 생겨나는 법이거든.”
나는 타락펜스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며 현재펜스의 최근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에드나에게 자신이 ‘야옹’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힌다거나.
성검 일행이 다 듣는 자리에서, 자신도 에일리히의 조카이니 귀여워해 달라고 요구한다거나.
비비처럼 ‘나는 귀여워!’라고 외치고 다닐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지만, 그 녀석도 상당히 많이 변했다.
‘나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걸, 자기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거겠지.’
문득 손이 허전한 것 같아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지금 이곳에 현재펜스가 있었다면 조용히 내 손을 잡으며 위로해 줬을 텐데.
그랬다면 무언가 긍정적인 생각이 떠올랐을 텐데.
어쩌면 허전한 건 손이 아니라 다른 곳일지도 모르겠다.
“저, 선우 님···. 괜찮으십니까?”
“네? 아, 예. 괜찮아요.”
에일리히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움켜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풀고 방 한쪽에 마련된 의자로 가서 앉았다.
제온이 하는 얘기를 들었으니 에일리히가 이것저것 물어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타락펜스가 내 옆에 앉고 에일리히는 맞은 편에 앉았다.
간식은 아까 먹었고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 얘기 중 목을 축일 수 있는 차만 준비하기로 했다.
잔을 꺼내어 시원한 세계수 잎 차를 따랐다.
타락펜스의 차에만 꿀을 타 주자, 녀석은 그제야 내내 들고 있던 ‘나의 벗’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차를 홀짝였다.
에일리히가 그런 녀석을 잠시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나에게로 옮기고 입을 열었다.
“집사의 말이 정말 사실입니까?”
“제가 리벨론 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거요? 아니면 동의 없이 갑자기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어느 쪽이든 사실이지만.”
“선우 님께서 리벨론 가문에 부채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건, 전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에일리히의 차분한 답변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니,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어보려고 입을 열자 괜히 목이 타는 것 같아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꺼냈다.
“···어떻게요?”
“과도할 정도로 리벨론 가에 신경을 많이 쓰셨잖습니까. 선우 님께서 인정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우 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두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혹시 알타르 님도 눈치채셨을까요?”
“그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는 건 눈치챘겠지만, 정확한 이유까지는 모를 겁니다. 사실 저도 조금 전까지는 신의 사자라는 게 알려진 까닭에, 리벨론 가문이 악마 숭배자들의 표적이 되어 그런 줄로만 알았으니까요.”
두 사람은 당연히 시온의 동의하에 내가 이 몸을 쓰게 되었다고 알고 있었나 보다.
아마 교황을 비롯하여 내가 ‘시온’이 아니라는 걸 아는 극소수의 성직자들도 마찬가지겠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멋대로 남의 육체를 바꿔치기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
“혹시 선우 님은 어째서 신 룩스메아 님께서 그런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셨는지, 아는 바가 있습니까?”
“세상을 여러 번 다시 시작한 탓에 의사소통할 힘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도르나 세계수의 말에 따르면, 현재 룩스메아의 힘은 굉장히 약해져 있다는 것 같으니까. 제가 막 시온의 몸에 빙의했을 시점에는 더 했겠죠.”
그렇게 답하고, 나는 또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룩스메아는 이번 회차를 시작하기 전, 솔레르티아를 내가 살던 세상에 환생시켜 [성검의 주인]을 집필하게 했다.
그리고 세상을 재 시작하며 나와 솔레르티아의 영혼을 불러들였다.
누나가 아닌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되면서, 계획에 없던 시온 환생 작업에 보상으로 신성력까지 쥐여 줘야 했고.
‘선택의 날에 세르펜스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각성을 도와줄 힘도 남겨 둬야 했겠지.’
어디 그뿐이랴?
볼타 산맥의 결계가 깨지는 건 예정된 일이며, 세계수는 죽어가고 있었고, 그 밖에도 돌발 상황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
그러한 사건 사고에 대비하느라 힘을 아낀 거라면 뭐라 비난하기도 힘들다.
더구나 룩스메아는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솔레르티아도 붙여주지 않았던가?
비록 제약이 걸려 있어서 그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낼 수 없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솔레르티아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힌트라도 슬쩍 귀뜸해주지.
‘아니지···? 현재펜스는 뒤늦게나마 솔레르티아가 작가라는 걸 알아챘으니, 힌트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닌가?’
그래도 정체를 들키자마자 도망치듯 떠나버린 건 다시 생각해도 정말 너무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일방적인 미움만 커진다.
낯선 이 세상에 적응하느라 바빠 자주 찾아가진 못했지만,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는데.
여유만 있다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래서 배신감이 더 컸다.
“선우 님은 신 룩스메아 님이···,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에일리히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어왔다.
지금으로서는 룩스메아보다는 솔레르티아가 훨씬 더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 말을 꺼낸다 한들, 에일리히는 그녀를 모르니 당혹스럽기만 할 테지.
그나저나 전직 이단 심문관으로서 신을 원망하느냐는 물음은 꺼내기 힘들었을 텐데, 온 정성을 쏟아 내게 공감해 주려 하는 게 느껴져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차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애써 미소 짓는 얼굴로 입을 뗐다.
“예전에는 원망스러웠고 지금도 썩 좋지는 않지만···. 이제 원망은 그만두기로 했어요. 저를 여기로 데려온 존재를 미워하기엔, 이곳에서 만든 인연들이 너무 소중해져 버렸거든요. 종종 힘들 때도 있었지만, 즐거웠던 날이 훨씬 많기도 하고.”
최근에는 누구 때문에 많이 힘들지만.
그 누구가 옆에 앉아 있는 상황에 할 말은 아니었기에 찻물과 함께 뒷말을 삼켰다.
정면을 보자 에일리히가 먹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 타락펜스의 반응을 확인했다. 이쪽은 예상과 다르다.
앞서 한 얘기가 얘기이니만큼, 광기와 집착으로 물든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을 줄 알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의외로 녀석은 담백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나는 아도르가 방금 그 말을 엄청···, 격하게 좋아할 줄 알았거든.”
“선우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방금 그 얘기를 들은 건 처음이 아닌지라. 그리고 그때는 가장 소중한 인연이 나라는 말까지 덧붙였지.”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이 녀석도 룩스메아를 원망하느냐는 질문을 던졌었나 보다.
타락펜스가 다시 없을 황홀한 추억이라도 떠올리듯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몽롱한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 녀석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기억은 신성력으로 내 정신을 쥐락펴락했을 때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도 마음도 전부 불편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불편한 감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일리히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요···?”
“얘가 저랑 술을 마시고 싶대서, 같이 마신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제 필름이 끊겼···. 아, 여긴 필름이 없지 참. 아무튼 의식이 끊겼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지나치게 걱정할 것 같기도 하고, 전직 이단 심문관에게 신성력을 ‘그딴’ 식으로 사용했다는 말을 꺼내는 것도 껄끄럽다.
그래서 급히 변명을 둘러댔는데 꽤 그럴듯했다.
얼마나 그럴듯하냐면, 신성력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는 얘기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녀석과 와인을 마신 적도 있으니 반쯤은 진실이기도 하고.
자신만의 ‘추억’을 에일리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는지, 타락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변명에 동조했다.
“아무리 만취하고 싶은 상황이라도, 의식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는 건 안 좋은 버릇입니다.”
에일리히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변명이 제대로 먹혀들어간 모양이다.
그래도 이 화제를 길게 가져가서 좋을 건 없다. 나는 앞으로는 조심하겠다는 말로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모든 고비를 넘긴 줄 알았다.
에일리히가 저녁 식사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그보다 슬슬 저녁 시간인데 식사는 안 하십니까?”
“저희는 도시락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에일리히 님 혼자 다녀오세요.”
“입맛이 없으니 내일 아침까지 거르겠다고 주방에 얘기해 놓았습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죠! 어서 가서 먹고 오세요!
“도시락을 같이 먹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2인분밖에 안 남았는데···.”
“간식도 늘 며칠 치 여유를 두고 쟁여두시는 분이,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뭐라 반박할 말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에일리히의 눈치를 보며, 풀떼기만 가득한 음식들을 슬그머니 꺼내 놓았다.
그것을 본 에일리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세르펜스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는 걸 일생의 과제처럼 여기는 분이 대체 왜···?”
“이, 이것들도 맛있거든요?! 전부 유명 음식점에서 사 온 겁니다!”
“단백질 섭취는 신경 쓰지 않으면 부족해지기 쉬우니, 매 끼니 육류가 상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셨던 분이 어찌···.”
“여기 콩 많잖아요, 콩! 지금 식물성 단백질 무시해요?”
“저는 무시하지 않으나, 평소 선우 님께서 무시하셨잖습니까. 고기가 훨씬 맛있다고.”
“······.”
과거의 내가 뱉었던 말들이 발목을 잡았다.
더 이상 둘러댈 말이 없어 가만히 입을 닫고 있자, 에일리히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저와 식사를 따로 하려 하신 게, 이 식단 때문입니까?”
“에, 뭐···. 그런 셈이죠···?”
“어째서입니까?”
걱정이 지나치면 화가 나게 된다.
지금 에일리히의 반응이 그러했다.
싸늘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모습을 보아하니 어물쩍 넘기는 건 불가능할 성싶다.
“말하자면 긴데, 먹으면서 얘기해도···. 아니다. 우선 먹고 나서 얘기해도 될까요? 얘기하고 나면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에일리히가 마지못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