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8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81화(881/1105)
<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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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녀오십시오.”
나와 타락펜스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에일리히는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가능하다면 우리를 따라오고 싶다는 생각이 표정에서 읽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에일리히가 함께 해 줬으면. 아니, 그 누구든 좋으니 함께 해 줬으면 좋겠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타락펜스가 에일리히 님까지 납치할까 봐 걱정됐었는데···.’
아이를 키우다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다지도 크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타락펜스는 에일리히의 합류를 절대 허락하지 않겠지.
원래도 그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그에게 위로를 받으며 우는 모습까지 봤으니 더욱 강경하게 반대할 테다.
나와 에일리히가 합류에 관해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어차피 거절당할 게 뻔한데, 굳이 말을 꺼내어 타락펜스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으니까.
‘내가 에일리히 님께 기대어 울 때, 가만히 내버려 둔 게 조금 의외긴 하지만···.’
그때 이후로 녀석은 줄곧 무표정을 유지했고 말수도 확연히 줄었다.
공작저를 떠나 단둘이 되면, 어째서 남에게는 그렇게 쉽게 기대는 거냐며 따지는 게 아닐까 우려스럽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바짝 긴장하며 타락펜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녀석은 손에 든 ‘나의 벗’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에일리히에게 내밀었다.
“···’나의 벗’을 잘 부탁합니다.”
“그래,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
“네게 많이 신경 써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는 선우 님의 상태를 먼저 살필 수밖에 없었단다. 그 이유는 세르펜스 너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부디 네가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에일리히가 화분을 든 타락펜스의 손등을 가볍게 감싸며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속에 담긴 걱정을 과연 타락펜스가 제대로 읽어냈을지 모르겠다.
여전히 무표정한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에일리히는 쓴웃음을 머금고 ‘나의 벗’이 든 유리병을 받아갔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에일리히 님은 계속 마음 졸이며 나와 타락펜스를 걱정하시겠지?’
나중에 현재펜스가 돌아오면 꼭 편지를 써야겠다.
그렇게 다짐했으나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타락펜스의 눈치가 보였으니까.
밖과 연결된 지하 통로가 열리고, 나는 타락펜스를 따라 어두컴컴한 비밀 통로로 발을 디뎠다.
긴 통로를 걷는 동안. 공작저에서 나와 제국의 수도를 벗어날 때에도. 이윽고 아무도 없는 곳에 다다라 하늘 높이 몸을 띄울 때까지.
내 우려와 다르게 타락펜스는 질투도 소유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안심해야 할 상황이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느껴져서 되려 초조해졌다.
타락펜스 이 녀석이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하며 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에 절실히 공감하며, 이 녀석이 일부러 나를 피 말리게 하려고 시간을 끄는 건가 의심하는 그때.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고도가 점점 낮아졌다.
땅에 발이 닿자마자 타락펜스는 빠르게 하네스에 연결된 고리를 풀어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기나긴 침묵을 뚫고 목소리를 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불안에 떨고 있는가?”
어젯밤부터 내내 무표정했던 녀석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드디어 슬슬 화를 내며 날 다그칠 생각인가 보다.
내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너무 오래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이제부터 독점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내게 강압적으로 을러대면서 막 위협할 작정이지? 자, 할 거면 빨리해! 마음의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내가 그렇게 해 주길 바라나?”
“싫다고 해도 어차피 그렇게 할 거였잖아! 자신의 신성력은 거부했으면서, 어떻게 에일리히 님의 신성력은 넙죽넙죽 받을 수 있느냐면서 따질 거잖아! 질투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분노하며, 이래도 자신의 신성력을 거부할 수 있을 것 같냐면서 내게 고통을 줄 거잖아!”
“···그런 상황을 기대하여 일부러 내 화를 돋울 작정으로 백부에게 위로를 받은 거였나?”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라면 진정해라.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선우가 기뻐할지 헷갈리잖는가.”
타락펜스가 몹시 떨떠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살짝 난감한 기색도 느껴지는 게, 진심으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멀뚱멀뚱 눈을 끔벅이며 녀석이 방금 한 말을 되새겼다.
“···나를 기쁘게 하고 싶어?”
“그렇다.”
“화 안 낼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질투도 나고 화도 난다. 하지만 참아보려고 한다.”
“정말로?”
“물론 선우가 화를 참지 말고 자신에게 쏟아내길 원한다면 그리하겠지만···.”
“아니, 그런 건 원치 않으니 제발 참아줘.”
더 이상 오해가 깊어지지 않도록, 나는 최대한 정색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타락펜스가 알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표정은 침착하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눈빛은 조금 탁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종합해보자면 내게 화를 낼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행···이긴 한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지?’
부모가 아무리 신경 쓰려 해도 아이의 작은 변화를 모두 파악하긴 힘든 법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큰 변화라면 그 원인을 반드시 확인해 두어야 한다.
당장은 긍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까놓고 보면 그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니까. 그게 겉으로 나타났을 때는 늦다.
“왜 갑자기 나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것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까지?”
“불현듯 선우가 밝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욕심이 선우에게서 웃음을 앗아간 거겠지.”
후회할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에일리히의 말을 들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타락펜스의 목소리에서 진한 후회가 묻어났다.
하지만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은 아닐 테다. 이 녀석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밖에 못 하니까.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상황과 멀어지는 것 같아서 뒤늦게 다급해진 걸 테다.
“이대로라면 웃음뿐만이 아니라, 다른 감정들까지 차례차례 사라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러다 동정심마저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선우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내 욕심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죽이겠다니, 단어 선택 한번 살벌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나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거리며 끄응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게 건강한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기엔···. 내가 더 못 버틸 것 같아.”
“······.”
“아도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고 짓뭉개 버리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내 기준에서의 타협은 선우에게 한없이 불리할 거다.”
“그걸 알고 있다면 타협점을 옮길 생각을 해야지. 조금 더 양보할 자신이 없다고,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지워버리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녀석의 극단적인 판단에 어처구니가 없어 짜증까지 솟구쳤다.
뾰족하게 날이 선 내 목소리에도 타락펜스는 감격했다는 듯 울멍울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도르가 내게 아무것도 아니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도저히 밝게 웃어주지는 못하겠어. 그러기엔 너는 내게 웃음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앗아갔으니까. 물론 그게 네 의지가 아니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어. 내가 원치 않게 ‘시온’의 몸을 뺏은 것처럼, 너도 그냥 정신이 드니까 지금 그 몸이었던 거잖아?”
타락펜스의 사정이 딱하고 안쓰럽지만, 내 소중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을 이길 수는 없다.
비로소 제온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동시에 그가 부러웠다.
시온은 비비가 되어 다시 태어났지만, 타락펜스와 현재펜스는 사실상 한 사람인지라 그런 게 불가능했으니까.
만약 둘을 분리할 수만 있다면, 눈앞의 이 가여운 아이를 계속 밀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럼 좀 더 온건한 방식으로 긴 시간을 들여 살살 타이르고 달래가며,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이 상황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 같다. 나에게도, 타락펜스에게도.
“나는 너를 외면하고 싶은 게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아껴주고 싶지. 하지만 내가 곁에 있어서 행복해질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도. 간신히 손에 쥔 자신의 행복보다 내 행복을 우선시하며,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법을 찾아 헤맸던 그 아이를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자신이 붙잡으면 내가 붙잡힐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내 외로움을 모른 체하지 못하고 남아 달라는 말을 삼키는 꼴을 봤는데 어쩌라고! 내가 먼저 그 녀석을 포기한다는 건 불가능해. 절대로.”
“···선우에게 있어 ‘아도르’는 내가 아닌 ‘그’로군.”
“그래,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인정했다.
눈앞의 타락펜스를 ‘아도르’라 부르고 있긴 하지만, 내게 있어 ‘아도르’는 현재의 세르펜스뿐이다.
타락펜스도 세르펜스라는 건 인정해도 ‘아도르’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어째서 선우가 선택의 날 이전에···. 아니, 내가 두 번째 보좌관을 살해하기 전에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뜬금없이 타락펜스가 앞선 대화와 동떨어진 얘기를 꺼냈다.
그렇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다.
나는 녀석의 입술이 다시 열리길 기다리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자는 내가 최초로 죽인, ‘죄가 없는 사람’이다. 악마 숭배자들에게 속아 나를 모함하려 했으나 악인은 아니었다. 악인은 나였지. 그렇기에 조작된 정보에 불과할지라도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뒤집어쓴 가면은 작은 의심에도 쉽게 벗겨질 수 있었기에, 내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 버릴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를 만나지 않았던 ‘세르펜스’가 시온과 대화를 나눠보려 하지도 않고, 그를 죽였던 이유를 알겠다.
자신이 쌓아올린 노력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었는지 몰랐던 거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부정한 까닭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자는 가면 너머의 내 본성을 마주하고는 끔찍한 것을 보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더군. 그 순간 나는 인정하고야 말았다. 나는 이기적인 괴물이라고. 그래서 더 쉬웠다. ‘나’를 위해 내 힘을 휘두르는 것이. 어차피 나는 그런 존재였다는 걸 받아들이니, 망설임이 사라지더군. 앞에서는 선인을 연기하며 뒤에서는 세 치 혀로 사람을 농락하고, 벌레 하나 못 죽이지만 사람의 목숨은 얼마든지 거둘 수 있는 게 바로 나라는 작자다.”
“아도르, 너는 그런 존재가···.”
“선우의 아도르는 그런 존재가 아니겠지.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 희생할 줄도 알고, 자신의 마음속에도 선함이 있다고 여기며, 선우를 닮아가려 노력하다 보면 그리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겠지.”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내 의견을 말할 기회를 줄 생각이 없는가 보다.
타락펜스가 내 말을 가로채며, 자신이 생각한 현재펜스에 관해 말했다.
“나는 그럴 수가 없다. 그리고 현 시간대의 나도 리벨론 경을 죽인 이후 선우를 만났다면 마찬가지였을 거다. 자신이 죽인 존재가 악하기는커녕 타인의 말을 쉽게 믿는 순진한 자라는 걸. 그런 자를 죽인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악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 녀석은 어째서 내게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대체 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거듭 되뇌었다. 답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깨달았다.
‘얘, 지금 자기가 아도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지?’
타락펜스가 자신의 원죄(原罪)를 고하며, 자신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