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8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82화(882/1105)
<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23) >
* * *
공작저에 다녀온 이후에도 나와 타락펜스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이가 특별히 나빠지거나 좋아지는 일은 없었다.
그럴 만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나는 여전히 채식주의자와 다름없는 식단을 유지했고, 타락펜스가 씻으러 가면 수갑을 차야 하는 것도 그대로였다.
낮에는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고, 깊은 밤이 되면 타락펜스를 토닥이다 잠들었다.
이게 전부였다.
워낙 단조로운 나날이었기에 이 생활은 고작 며칠 만에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더 갑작스럽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타락펜스와 서로 조건을 내걸고 약속했던 날로부터, 꼭 한 달째 되는 날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마지막 날에 딱 맞춰서 목적지에 도착했네?”
“일부러 맞추려고 한 건 아니다.”
타락펜스가 하네스를 벗어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표정도 말투도 여상하기 그지없어, ‘마지막 날’이라는 소리를 제대로 들은 건지 의문스러웠다.
나는 녀석을 노려보다가 후드를 깊숙이 뒤집어썼다.
어차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우리는 여기서 곧장 악숭 세력의 숨겨진 거점으로 향할 예정이다.
그런데도 후드를 뒤집어쓴 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햇빛을 막기 위해서다.
아레나 왕국의 영토 중 절반은 사막이고, 악숭 세력의 거점은 그 사막 한복판에 있었으니까.
영토 중 절반이 사막이란 소리는 나머지 절반은 그런대로 멀쩡한 땅이라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아레나 왕국민 대부분은 그 멀쩡한 지역에서 거주했다.
사막에서 사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 이외의 광활하고도 황량한 땅은 사실상 버려진 땅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니까 이사하는 게 힘들 정도로 커다란 규모의 악숭 거점이 있는데도, 아무도 못 알아채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방향을 봐도 모래 언덕밖에 없다.
그것 말고 달리 보이는 거라고는 내 옆에서 서 있는 타락펜스뿐이다.
녀석은 긴 청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눈을 감은 채 건조한 모래바람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었다.
얘가 왜 이러고 있는지는 둘째 치고, 저 꼴을 가만히 둘 수는 없다.
사막의 햇빛은 따가울 정도로 뜨겁다. 제대로 가리지 않으면 화상을 입기에 십상이다.
체내의 신성력 덕분에 고작 햇빛만으로는 화상을 입지 않을지도 모르나, 아기답게 뽀얀 세르펜스의 피부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타락펜스의 품을 뒤져서 찾아낸 아공간 주머니에서 로브를 꺼내어 걸쳐주자, 녀석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니 싱긋 눈웃음을 짓는다.
‘설마하니 내가 챙겨주길 바라서 일부러 햇빛과 모래바람을 맞고 있던 건가?’
어쩐지 녀석의 수법에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나는 로브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 씌워서 녀석의 웃는 얼굴을 가려버리며, 타락펜스가 로브에 관한 얘기를 꺼내기 전에 다른 화제를 꺼냈다.
“왜 그러고 서 있었던 거야?”
“결계를 펼칠 범위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냥 입구만 막으면 되는 거 아니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하나뿐이지만, 출구는 여러 군데에 퍼져 있다.”
악숭 거점의 실체는 아직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번거롭기 그지없다.
내가 질색하는 동안 타락펜스는 성검을 검집에서 뽑아들고 룩스메아의 힘을 끌어왔다.
곧 찬란한 오색빛이 하늘을 뒤덮었다.
대체 결계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이곳에서는 땅과 맞닿은 가장자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볼타 산맥의 결계와 비교해 보려 해도 내부에서는 결계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얼마 없는 룩스메아의 힘을 이렇게 팍팍 써도 되는 거야?”
“결계를 거둘 때 대부분 회수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다면야 다행이고. 것보다 입구는 어딨어?”
“여기서 5분 정도 이동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타락펜스가 나를 들어 올렸다.
녀석은 낮은 고도로 비행하며, 악숭 거점은 땅 밑에 있고 방금 내려선 곳은 거점의 중심쯤 되는 위치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편의상 그곳에서 결계를 펼친 거라나 뭐라나.
나로서는 아는 게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이제까지는 다짜고짜 찾아가서 기습했는데, 이러면 미리 쳐들어가겠다고 알려주며 대비할 시간을 주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긴 했으나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타락펜스는 이 거점의 함정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을 테고 엄청나게 강하니까.
악숭이 놈들이 그간 모아 놓았던 제물들로 악마를 소환하더라도 손쉽게 처리하겠지.
그럴 자신이 없었으면, 타락펜스가 적들을 만나기도 전에 놈들의 도주로부터 막는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근데 말이야, 전에도 생각했던 건데···. 룩스메아의 힘은 왠지 신성석에 반사된 빛의 색과 비슷하지 않아?”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과거 신의 힘을 두른 성검을 보며, 세니어를 연상했던 게 떠올라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다.
그런데 타락펜스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심지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언젠가 들었던 룩스메아의 탄생 설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다. 신 룩스메아는 많은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염원하여 만들어진 존재다.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의 바람으로 생성되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신성석을 만드는 방법과 동일한 원리지.”
“그럼 룩스메아는 이 대륙의 평화를 지키는 목적을 지닌 신성석···이라고 보면 되는 거야? 세니어가 나를 지키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하는 게 편하다면 그리 생각해도 무방하다.”
조금···. 아니, 굉장히 충격적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그냥 그렇구나 싶다.
룩스메아가 다수의 바람 속에서 탄생한 신이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정황상 그 ‘다수’란 아무래도 신성력 보유자들을 뜻하는 걸 테고.
“그 말은 즉, 우리 세니어도 신이 될 수 있다는 뜻이야?”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에는 그 신성석이 담아낼 수 있는 힘의 총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보통의 신성석은 제작자 말고는 신성력을 채울 수가 없지 않은가? 신이 되기에는 존재의 근간이 너무 불안정하다.”
일반적인 신성석은 제작자의 능력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없고, 제작자가 죽으면 소모된 힘을 채울 방법이 영영 사라지니.
그런 불완전한 것을 숭배하는 이가 존재할 리가 없다.
여러모로 신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쳇, 좋다 말았네.’
반면에 오래전에 만들어진 룩스메아가 아직도 신으로서 존재하고,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수많은 이들의 신성력과 바람으로 만들어진 까닭이겠지.
그래서 누구의 신성력이든 전부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제작자의 사망으로 쓸모를 다한 신성석이 룩스메아에게 바쳐지는 것도, 어쩌면 무언가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여러 사람이 모이면, 룩스메아와 같은 신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해?”
“신 룩스메아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건, 당시 대륙의 상황이 특수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순수하고 선한 의도로, 잡념 하나 없이 같은 것을 바라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불가능하겠지.”
하기야 애초에 신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의도부터 글러 먹었다.
룩스메아의 탄생은 정말 다시없을 우연의 산물이며, 그렇기에 이 대륙에 생겨난 최초이자 최고의 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
인위적으로 신을 만드는 시도가 대륙 역사상 아예 없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실패한 걸 테다.
“도착했다.”
타락펜스가 우뚝 멈춰서 제자리비행을 하며 말했다.
주위를 살펴봐도 모래 언덕뿐인데, 악숭 거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친절한 안내판은 없더라도, 입구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끔 돌멩이라도 하나 놓여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위치는 좌표로 파악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모래밖에 없는 사막 한복판에 돌멩이가 놓여있으면 수상하잖은가? 행여 가져다 놓았다 하더라도 금방 모래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게 될 테고.”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근데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으면 악숭 거점에는 어떻게 들어가? 나는 뭔가 특수한 장치로 숨겨진 입구를 드러나게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건 필요 없다.”
그렇게 대답하더니 타락펜스는 우리를 겨우 감쌀 크기의 작은 결계를 펼쳤다.
혹시 적이 공격해 온 건가 싶었지만, 결계로 날아드는 공격 같은 건 없었다.
타락펜스가 신성력 날개를 없애고 모래 위. 아니, 구 형태의 결계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자 우리를 감싼 결계가 통째로 모래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래가 아래로 흘러내리며 늪처럼 빠져들게 되는 걸 유사(流沙)라고 하던가?’
거점이 지하에 있다더니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 건가 보다.
우연히 멋모르는 사람이 이 ‘입구’에 발을 디뎌도, 모래 속에 파묻혀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빠져나가려 할 터.
이곳에 악숭 거점이 있다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이거 너무 느린데, 더 빨리 내려갈 수는 없어?”
“무게를 더하면 빨라지겠지. 아니면 마법을 쓰거나.”
법숭이들은 마법으로 빨리 내려가나 보다.
하지만 나와 타락펜스는 마법을 쓸 수 없고, 내가 지닌 스크롤 중 지금 상황에 마땅히 쓸만한 것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럼 어서 뭐라도 꺼내 봐. 아공간 주머니 안에 쇳덩이들 많잖아? 마력 구속구라든가, 악숭 살롱에서 챙겨온 족쇄라든가.”
“딱히 급한 일도 아닌데 느긋하게 대화라도 하면서 기다리는 게 어떠한가? 간식 같은 걸 먹어도 좋고.”
“대체 누가 유사에 빠지면서 팔자 좋게 간식 같은 걸 먹고 있어?”
이 대륙에 그런 팔자 좋은 사람이 있다면 나와 타락펜스뿐이겠지.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식빵 가장자리로 만든 러스크가 든 통을 꺼냈다.
악숭 거점에 들어가면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지만, 타락펜스가 대화를 원하고 있는데 무시하기는 좀 그렇다.
‘특히나 오늘은 약속했던 한 달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녀석이 계약을 이행해 주겠다고 말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반대로 계약 연장을 요구하거나 파기하겠노라 통보를 해 오더라도, 대화를 피할 수는 없다.
나는 통 안에서 기다란 막대 모양의 러스크를 하나 꺼내어 타락펜스에게 건네며 물었다.
“지난 한 달간 행복···했어?”
“전혀.”
“역시 그런가···?”
예상했던 답변을 들었는데도 씁쓸함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속에 퍼져 나갔다.
이 녀석과 함께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즐겁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내 기분이 우울한데, 이 녀석에게 애정을 주려고 노력해 봤자 얼마나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타락펜스는 타락펜스대로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불만을 품었겠지.
“그런 거 말고, 달리 궁금한 건 없나?”
“그게, 어···. 혹시 네가 그 비뚤어지게 된 원인 중에는 휴마누스의 아버지, 그러니까 황제도 포함되어 있어?”
“내가 성검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찾아내는 데, 가장 혈안이 되었던 자가 바로 황제다. 내게 결격 사유가 있어야, 황태자가 성검의 주인으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니까.”
타락펜스가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러스크를 끄트머리부터 오독오독 깨물어 먹었다.
예상은 했지만, 타락펜스의 입을 통해 확인을 받으니 기분이 매우 더럽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녀석의 태도가 더 마음에 걸렸다.
“와, 진짜 어이없네! 지가 황제면 다야?!”
아무리 제 아들이 귀하기로서니, 아들 친구를 깎아내리는 건 어른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아버지 없는 타락펜스가 얼마나 서러웠을지 생각하면, 황제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주고 싶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런 짓을 했다간 세르펜스에게 불이익이 생기겠지.
교황의 반응도 걱정되고.
“휴마누스에게 황제를 때려 달라고 부탁하···는 건 역시 좀 그렇겠지? 너무 패륜 같고···.”
“내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양친을 살해한 타락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녀석의 말이 옳다.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있으려니, 타락펜스가 내 입에 러스크 하나를 물려주었다.
“뻔히 예상하고 있는 일을 재확인하는 거 말고, 진짜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있···기는 한데···. 원래 약속에 관한 얘기는 큰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하면 안 되는 거 몰라? 일종의 플래그 같은 거라고!”
“그 플래그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진 모르겠지만, 이곳의 악마 숭배자들을 처리하는 건 내게 있어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그만 시간 끌고 어서 물어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