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8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84화(884/1105)
< 88. 공작님과 약속의 날 (2) >
“아, 참. 일행들이랑은 어떻게 만나지?”
“···곧 그쪽에서 찾아올 거다.”
불현듯 떠오른 질문을 입에 담자, 타락펜스가 성검을 휘둘러 초승달 모양의 신성력 칼날을 어딘가로 쏘아 보내며 답했다.
또 함정을 파훼한 걸 테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는 타락펜스와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이었다.
“그것도 그렇겠네, 일행들이 우리를 쫓고 있으니까. 그래도 이런 사막 한복판까지는 찾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 근처 도시에 가서 소문이라도 내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 타락펜스의 목소리에는 묘한 확신이 담겨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려는 찰나.
“지금부터는 말을 가려서 해라. 적과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으니, 슬슬 우리의 목소리가 들릴 거다.”
타락펜스가 내게 주의를 주었다.
바깥에 신의 힘으로 결계를 펼쳐 놓고 들어왔으니, 여기서 도망칠 수 있는 악숭이는 없겠지만.
이곳은 악숭 거점이다.
악마와 소통 가능한 법숭이 혹은 마인이 곳곳에 퍼져 있을 테다.
마인 쪽은 계약한 악마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소통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법숭이 쪽은 다르다.
놈들이 사람들에게 악마와의 계약을 주선할 수 있는 건, 흑마법을 이용해 마계에 있는 악마와 연락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법숭이들에게 시간만 주어진다면, 악마들에게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러니 최대한 말을 아끼다가, 놈들과 마주치면 곧바로 제압하거나 처치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알았어. 그런데 호칭은···, 어떻게 할까?”
타락펜스가 신이 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면 악숭이가 듣거나 말거나, 현재펜스가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자신을 세례명으로 부르라고 했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하자, 타락펜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런 답을 내놓았다.
“흐음···. 내 세례명이 악마 숭배자들에게 알려진다고 한들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지만, 당신의 본명을 입에 담는 건 조심하는 게 좋겠지.”
“엥? 내 이름보다는 네 세례명 쪽이 더 문제가 크지 않아? 넌 마왕에게···, 음, 어, 암튼 그랬잖아.”
“아, 그 일 말인가?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나의 벗이 신경 쓰인다면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 ···그것도 내키지 않는다면 방금처럼 ‘너’라고 부르든가.”
타락펜스가 마왕에게 가짜 세례명으로 사기 쳤던 일을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취급했다.
순간 그래도 되는 걸까 싶었으나 어차피 억울해도 마왕이 억울해 할 일이니 신경 끄자.
그딴 것보다 녀석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더 마음에 걸린다.
‘전에는 자신을 아도르라고 부르는 건 고사하고, 세르펜스라고도 불러주지 않는 거냐며 불만을 토로했으면서···. 그러면서 내 발목을 움켜쥐고 위협까지 했잖아?’
그 정도로 호칭에 심하게 연연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갑자기 초연해졌을 리가 없다.
자신이 ‘아도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처럼.
내게 ‘세르펜스’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단념한 걸 테다.
하지만 그때 당시 내가 타락펜스를 ‘세르펜스’라 부르지 못했던 건, 이 녀석이 현재펜스의 자리를 노렸기 때문이다.
현재펜스에게 몸을 돌려주겠노라 약속한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이 녀석을 ‘세르펜스’로 불러줄 수 있다.
나는 비어있는 녀석의 왼손을 꼭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 이 악숭 거점을 정리하고 나면 같이 파티 할래?”
“······.”
덜컥,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타락펜스가 부자연스럽게 멈춰섰다.
놀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다.
내 말이 그렇게나 의외였던 거려나? 아니면 호칭 때문에 기뻐서?
짚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왜 그래?”
“으음···,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 파티···를 할 수 있는 건가? 지금은 생일도 아니고, 고깔모자도 두고 와 버렸는데···.”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표정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내심 파티를 해 보고 싶었나 보다.
그럼 그냥 하자고 얘기하지,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다.
정말 고깔모자를 악숭 살롱에 두고 와서 포기한 건 아닐 테고.
‘축하할 일도 없는데 파티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공작저에서 에일리히 님까지 포함해서 셋이 파티를 하자고 제안하려다가, 분위기가 안 좋아서 그만둔 거려나···?’
만약 후자라면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는 것도 꽤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에일리히를 통해 교단과 연락해서, 일행들에게 공작저로 와 달라는 말을 전할 수 있으니까.
덤으로 에일리히에게 타락펜스의 회개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릴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럼 내가 지금의 타락펜스를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듯이 에일리히 또한 그러하겠지.
‘타락펜스도 진정한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게 될 테고.’
아니면 아예 우리를 찾아올 일행들까지 포함하여 다 함께 파티를 열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손가락으로 타락펜스의 손바닥에 ‘송별회’라는 세 글자를 적었다.
송별회는 떠나는 사람과 이별하며, 섭섭함을 달래고 떠나는 이의 앞날에 행운이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는 모임이다.
하지만 타락펜스에게 ‘앞날’이란 게 없다는 건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송별회를 연다는 건, 오직 내가 이 녀석을 떠나보내기 섭섭하여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라는 뜻이 된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시시 웃었다.
나도 같이 마주 웃어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머리 쓰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타락펜스가 내 손을 잡아내려 손바닥에 제 뺨을 비볐다.
곧 떠나야 하니까 그전까지 실컷 애정을 받아야겠다고 작정한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마냥 슬퍼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아깝다.
“아유, 요 어리광쟁이~!”
안쓰러운 마음을 애써 삼키고, 나는 양손으로 녀석의 볼을 꾸욱 누르며 어리광을 받아줬다.
즐겁다는 듯 타락펜스가 미소를 지었지만, 녀석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나 보다.
– 뚜벅, 뚜벅···.
타락펜스의 얼굴을 붙들고 말랑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조물조물하고 있는데, 복도 저 끝에서 악숭이들로 추정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흑마법 함정이라면 모를까, 기계식 함정에는 피아 구분 기능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함정 지대를 돌파할 때까지 악숭이를 마주할 일은 없을 거라 예상했건만.
‘기껏 설치해 둔 함정을 자기들 손으로 해체하면서까지 먼저 이쪽으로 다가오다니···? 침입자가 너무 강해서 함정으로 제압할 수 없을 것 같아도, 그렇기에 침입자의 힘을 빼는 데 큰 의의가 있을 텐데?’
어쩌면 나와 타락펜스가 대화를 나누느라 중간중간 멈춰서는 동안, 악숭이들이 만반의 준비를 끝낸 걸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지하라 하늘의 변화를 알 수 없어서 내가 놓쳤을 뿐, 이미 악마 소환까지 마쳤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래 봤자 타락펜스의 상대는 되지 않겠지.
타락펜스의 표정을 살펴봐도 긴장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기에, 나는 속 편하게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점차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뚝 끊기더니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인가 함정은 하나도 발동되지 않고. 침입자는 파티 같은 소리를 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졌길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해서 와 봤는데···”
“우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
다가온 악숭이들은 총 셋이었는데, 한 명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다른 한 명은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현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놈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괜히 머쓱해져서 타락펜스의 얼굴에서 슬그머니 손을 뗐다.
내 손이 떨어져 나가자 언제 웃고 있었느냐는 듯 타락펜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감히 방해를 하다니···.”
“남의 아지트에 쳐들어와서 파티 계획을 세워 놓고 방해라니?!”
세 악숭이들 중에서 법숭이 복장을 한 놈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겁도 없이 타락펜스에게 대들었다.
아까 전에도 ‘파티’를 운운하더니, 그 단어에 단단히 꽂혀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반면에 불과 1분도 채 되기 전에 분노를 증발시킨 놈도 있었다.
“자, 잠깐···.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무시당했다며 화를 냈던 악숭이는 갑자기 얌전해져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놈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역안이다.
주제 파악을 잘 하는 걸 보아하니 저 마인은 같이 온 법숭이보다 강자일 것 같다.
그래 봤자 타락펜스에 비하면 하룻강아지 수준이겠지만.
“위대하신 악마님과 계약했으면서 겁을 먹는 거냐?!”
“하지만 ‘그’ 프라시더스 공작···이잖소?”
“그러니까 기회인 거지! 바깥에 펼쳐진 거대한 결계의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나? 그런 걸 만들고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소모될 거라고 생각해?”
어쩐지 겁도 없이 기어오르더라니, 타락펜스가 결계를 펼치느라 지쳤을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법숭이가 법숭이라는 혜택으로 자신보다 강한 마인을 갈궜다.
그리고 똘마니에 지나지 않는 검숭이는 말없이 두 놈의 눈치를 살폈다.
“저놈들 아무리 봐도 그냥 잔챙이지?”
“내가 보기에도 그러하다.”
내가 악숭이들을 가리키며 묻자, 타락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우리의 얘기를 들은 법숭이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뭐, 뭣?! 잔챙이?!”
법숭이가 스태프를 꽉 움켜쥐며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검숭이는 후방의 법숭이를 지키는 역할인지 놈을 몸으로 가리며 검을 세웠다.
한편 마인은 슬금슬금 벽 쪽으로 다가가 붙더니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그림자 속에 숨어서 우리를 노릴 생각인 건지, 그대로 도망간 건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타락펜스가 왜 가만히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놈들이 잔챙이라는 걸 아는데 왜 가만히 있어? 중요한 정보 같은 걸 흘리려 해도 아는 게 없어서 못 흘릴 것 같은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지만···. 나의 벗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되겠지.”
“응, 그건 좀···.”
“나의 마음 여린 벗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타락펜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법숭이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마법진은 검은 연기가 되어 나와 타락펜스를 향해 밀려들었다.
저 연기의 정체는 굳이 확인해 볼 것도 없다.
분명 나처럼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매우 치명적인 독성 물질일 테다.
하지만 그 연기가 내 기관지에 들어오기는커녕 닿는 일도 없었다.
타락펜스가 신성력이 피어오르는 왼손을 가볍게 내젓자, 검은 연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법숭이의 눈빛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놈은 타락펜스가 바깥의 거대 결계를 유지하며, 나를 보호하는 결계까지 펼치다가 빈틈을 보이길 기대했나 보다.
“어쩔 수 없군.”
적이 당혹스러워하든 말든 타락펜스는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성검으로 내 그림자를 콕 찔렀다.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은 그 행동에 그림자가 ‘컥!’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마인의 시체를 뱉어냈다.
“무슨···?!”
“어···?”
그 의문문이 법숭이와 검숭이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놈들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앞서 죽은 마인을 포함하여 세 구의 악숭이 시체는 나란히 심장이 꿰뚫려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피도 거의 흐르지 않아서 대충 봤으면 그냥 기절한 줄 알 뻔했다.
“어떠한가? 이 정도면 칭찬받을 수 있겠지?”
타락펜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 비위를 걱정해 준 건 고마운데, 살인 방식을 두고 칭찬해도 되는 건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상대는 악숭이들이니 칭찬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이 녀석이 나를 배려해 줬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배려를 배우지 못한 아이가 누군가를 배려해 주려면,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몇 배로 마음을 써야 한다.
아이가 고민 끝에 나름의 방법을 짜내어 이전보다 나은 결과를 내놓은 거다.
그 결과물을 두고 더 잘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다그쳐서는 안 되겠지.
“고마워, 신경 써 줘서.”
나는 타락펜스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다가 녀석에게 또 손이 잡히기 전에 팔을 내렸다.
불만스럽다는 듯 타락펜스가 입술을 삐죽이긴 했으나 쓰다듬을 더 요구하지는 않았다.
빨리 악숭 거점을 정리하고 느긋이 쓰다듬을 받는 게, 방해받을 일도 없어 더 좋다고 판단한 걸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