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8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86화(886/1105)
< 88. 공작님과 약속의 날 (4) >
“세르펜스, 이곳의 악숭이들은 방금 마주쳤던 놈들이랑 악마 소환을 준비 중인 놈들이 전부야?”
법숭이들이 정신없이 뛰어갔던 길을 느긋하게 걷고 있자니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타락펜스의 말에 따르면 이 악숭 거점은 규모가 꽤 큰 편이며 도주로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룩스메아의 힘까지 빌려 거대한 결계까지 펼친 후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 적들을 마주한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대로 악마를 처치하고 나면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나는 건가?’
아무리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무려 ‘거점’씩이나 되는 장소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다.
더욱이 마주친 적이 겁을 먹자마자 결계를 펼쳐 도망칠 길을 막아버리니, 들어오기 전에 펼친 결계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흐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타락펜스가 조금 늦게 대답을 내놓았다.
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이 악숭 거점 내부의 기척을 샅샅이 살피느라 늦어진 걸 테다.
“몰래 이곳을 빠져나가거나 구석에 숨어 있는 놈이 하나도 없다고? 그럴 수가 있나?”
“이 주변 일대에 신성 결계가 펼쳐져 있으니, 도망치거나 숨어도 살아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한다.”
“그런···가?”
“그게 아니면 기회라 여긴 걸 테지. 현 악마 숭배 세력의 1순위 제거 대상은 ‘현재의 나’라고 선우가 말했잖은가?”
내가 어째서 의문을 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타락펜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듣고 보니 녀석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처음 마주쳤던 법숭이만 해도 바깥에 펼쳐진 결계를 인지하고 있었을뿐더러, ‘기회’라는 단어까지 운운했으니까.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겠다며, 악마 소환 장소로 부리나케 달려간 놈들도 있고.
“제물로 바쳐질 때 고통을 느껴야 하는 건 법숭이들도 마찬가지겠지? 영혼이 느끼는 괴로움과 절망이 커지는 만큼, 제물로서의 가치도 높아지니까···.”
“어디 ‘마찬가지’ 정도로 끝나겠는가? 제물의 가치는 개인의 능력도 반영되지. 그리고 좋은 제물일수록 최대한 가치를 끌어올려 효율을 높이고자 하는 게 당연하잖은가.”
능력 없는 일반인들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될 거라는 소리다.
소환을 주도하는 게 법숭이들이니, 같은 법숭이를 제물로 바칠 땐 깔끔하게 목숨을 끊어주지 않을까 했건만.
역시나 얄짤없다. 피도 눈물도 없고, 동료애마저 없다.
그리고 추가 제물을 자처한 법숭이들은 운까지 없었다.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적어도 평안한 죽음을 맞이했을 텐데.
제 발로 고통의 구렁텅이로 기어들어간, 제물 법숭이들의 어리석음에 쯧쯧 혀를 차는 그때.
“–끄아아악···!”
먼 곳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으나 처절함이 가득 담긴 까닭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지리적 특성상 규모에 비해 물자가 항상 부족하다. 그렇기에 ‘산제물’로 쓸 인간들을 따로 가둬 놓지 못하고, 혈옥으로 만들어 보관하지. 저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전부 악마 숭배자들뿐이니 선우가 신경 쓸 것 없다.”
타락펜스가 미소를 지으며 묻지도 않은 것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냉정하다 못해 무정한 얘기였지만, 나름대로 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노력하여 꺼낸 얘기가 분명했다.
그런 녀석의 마음을 알기에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알려줘서 고마워.”
내 입에서 감사 인사가 나오자마자 타락펜스가 자연스럽게 머리를 낮췄다.
고마우면 말로만 때우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달라는 뜻이겠지.
나는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비명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고, 타락펜스와 맞잡은 내 손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악마가 소환될 때까지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릴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무렵 타이밍 좋게 비명이 끊겼다.
나는 느려졌던 발걸음을 재촉하여 비명이 들려왔던 장소로 향했다.
타락펜스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아까 악숭이들과 싸웠···다기보다, 처리했던 곳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바닥에는 주인 없는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육체와 영혼이 제물로 바쳐지며 남긴 허물이다.
제대로 세어 본 건 아니지만, 대충 봐도 최소 수십 벌은 되어 보였다.
반면에 살아있는 악숭이는 고작 일곱뿐이다.
소환을 주관했을 법숭이가 넷.
악마의 전투 보조 역할을 맡은 건지 아니면 아까워서 남겨둔 건지 모를 마인이 둘.
그리고 악숭 사제가 하나.
정말 최소한의 숫자만 남겨 놓았구나 싶다.
그렇게 악숭이들을 있는 대로 갈아 넣어 소환된 악마는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남은 악숭이들을 향해 화를 냈다.
“저자가 성검을 들고 있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
“예, 예?! 성검?! 저, 저희는 여기에서 소환 준비를 하느라, 프라시더스 공작이 들고 있는 무기를 지금 처음 봐서···.”
열심히 제 할 일을 다 한 법숭이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자진해서 제물이 되겠다며 싸우다 말고 뛰쳐나간 법숭이들이 있었는데, 여기 안 왔어요? 아닌데? 왔을 텐데?”
“저, 저흰 아무 말도 못 들었습니다!”
“맞아요! 프라시더스 공작이 예상보다 강하니, 더 강한 악마님을 소환해야 한다는 말 밖에는···.”
악숭이들이 악마의 눈치를 보며 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래도 운 없는 제물 법숭이들은 눈썰미 또한 없어서 성검을 알아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눈치껏 알아챘어야죠. 성검을 통해 룩스메아의 힘을 끌어오지 않았으면, 이 악숭 거점 일대를 감싸는 커다란 결계를 어떻게 유지한 채로 싸우겠습니까? 하다못해 밖에 나가서 결계 색만 봤어도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만한 정성도 없을 줄이야!”
“한 번 나가면 돌아올 땐 다시 입구로 들어와야 해서···.”
“하지만 세르펜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강하다는 얘기는 들었다면서요? 그럼 그 이유가 뭔지 고민해 봤어야죠!”
“그, 그건···. 아니, 잠깐. 그쪽이 뭔데 우리를 혼내고 있는 거냐?!”
내 논리에 밀려 맥을 못 추던 법숭이가 돌연 고개를 치켜들더니, 나를 향해 길길이 화를 냈다.
차라리 계속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악마가 대체 뭘 잘했다고 큰 소리를 내느냐고 타박하는 표정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시끄러워.”
“죄, 죄송합니다.”
다시 머리를 조아리는 법숭이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악마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 악마는 악마 치고 성격이 좋은 편인가 보다.
어차피 법숭이는 악마를 소환하느라 흑마력을 거의 다 소진하여 지친 상태였으니.
성격 더러운 악마였다면 도움도 안 되고, 멍청하기까지 한 놈이 짜증 나게 한다며 죽여버렸을 텐데.
‘손 안 대고 적의 수를 줄일 수 있었는데 아쉽···. 어라? 지금은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지, 참?’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타락펜스가 악마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를 가만히 관찰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앞에서 악숭이와 입씨름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녀석이 나를 너무 신기하게 쳐다보면, 현재펜스가 아니라는 걸 들킬 수도 있으니 화제를 돌려야겠다.
“악숭 살롱에서 본 악마와 비교하면 저놈의 수준은 어느 정도야?”
“어차피 한낱 악마에 불과할진대 굳이 비교씩이나 해야 하나?”
“그래도 궁금한걸?”
“저번에 처리했던 악마는 거의 최상급에 근접한 상급이었다. 그리고 지금 소환된 저 악마는 간신히 상급에 걸쳐진 수준으로 보이는군.”
제물 법숭이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전에 보았던 두족류 악마처럼 거대한 중상급 악마가 소환될 뻔했다는 뜻이다.
나는 악마 소환진이 그려진 방 안을 슥 둘러보았다.
중상급 악마의 덩치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는 건 모래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놈을 소환할 예정이었으려나?’
하마터면 일이 번거로워질 뻔했다.
그런 놈이 튀어나왔으면 타락펜스가 ‘심장 쿡’을 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나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마음속으로 제물 법숭이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했다.
“고작 인간 주제에 성검을 들었다고 너무 자만하는군.”
“혹시 악마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는가? 나의 벗이 원한다면 제압해 줄 수도 있다.”
타락펜스가 악마가 떠드는 소리를 무시하고 내게 말을 걸었다.
제압 당한 악마와의 대화 찬스라니, 흔치 않은 기회다.
어쩌면 앞으로 소환될 악마에 관한 정보, 혹은 마왕의 계획에 관해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악마가 그런 고급 정보를 알고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알고 있다 하더라도 순순히 말하는 일은 없겠지.
“아냐, 됐어. 세르펜스에게 고문 같은 거 시키고 싶지 않고, 지금은 악마 따위보다 너랑 더 얘기하고 싶어.”
“사실 나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얼른 처리하고 올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라.”
타락펜스가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그리 말하며 나를 보호하는 결계를 펼쳤다.
우리의 대화에 기분이 상했는지 악마가 ‘감히’로 시작되는 문장을 떠들어대긴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영양가 없는 뻔한 레퍼토리일 테니까, 들으나 마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놈이 곧 입을 닥치기도 했고.
“······!”
갑자기 조용해진 악마가 긴장한 표정으로 타락펜스를 바라보았고, 악숭이들의 안색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내 앞에 선 타락펜스가 뭔가를 한 모양이다.
나야 녀석의 등만 보이니 뭔가가 뭔지 알 수 없지만.
견제하며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는 시간조차 무의미하다는 듯, 타락펜스는 망설임 없이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악마가 새까만 마기를 방패처럼 펼쳤다.
꽤나 두께가 있어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은빛 신성력을 머금은 성검 앞에서는 얇은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타락펜스는 찢어진 마기의 방패 사이로 왼손을 쑥 내밀었다.
순간 악마가 히죽 웃으며 전신에서 마기를 내뿜었다.
놈이 밟은 바닥이 녹아버리는 모습으로 보아 일반적인 마기가 아니다.
‘산성인가?’
보통 사람이라면 반사적으로라도 멈칫했을 테다.
하나 타락펜스는 단 일 분 일 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은빛 신성력을 씌운 녀석의 손이 산성을 띤 마기를 뚫고 악마의 목을 틀어쥐었다.
타락펜스의 피부는 물론이거니와, 소매 끝자락조차 녹아내리지 않고 멀쩡하게 제 모습을 유지했다.
그제야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악마가 다급하게 타락펜스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악마의 저항 따윈 벌레의 꿈틀거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타락펜스는 여유롭게 성검을 들어 올려 놈의 심장에 푹 찔러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경지’라는 것에 의문이 생겼다.
‘이 녀석이 악숭 살롱에서 피를 다루는 악마를 가볍게 처리한 건, 신의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라 쳐도···.’
지금 타락펜스는 오로지 은빛 신성력만을 사용하여 악마를 죽였다.
다른 회차의 인격이 나온다고 하여, 본디 세르펜스가 지니고 있었던 신성력의 양이 변하는 건 아닐 텐데.
어째서 인격 간에 실력 차가 이리도 극명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