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9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91화(891/1105)
< 88. 공작님과 약속의 날 (9) >
“고작 이런 실력으로 마왕에게 대항하려 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 형편없는 건 그쪽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마법사는 조금 쓸만한 마법을 고안해 낸 듯하지만, 위력에만 집중하느라 많은 것을 놓쳐버렸고···. 나머지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런 주제에 제게서 성검을 회수하겠다니, 정녕 이 대륙을 마왕에게 바치기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타락펜스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일행들을 쭉 돌아보면서 비웃음을 머금었다.
모두의 얼굴에 분함이 떠올랐으나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누구도 녀석의 옷자락 한 번 스치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심지어 타락펜스는 일행들을 봐주고 있었다.
그 증거로 녀석은 압도적인 실력 차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성검에 베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리에나와 에드나, 아니마가 데미지를 받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영향일 뿐.
직접 그들을 상처 입힌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모두를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뜨렸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주제를 아셨다면 다시는 나와 선우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그, 그럴 수는 없어···!”
줄곧 침묵하던 휴마누스가 어딘지 모르게 간절한 표정으로 다급히 외쳤다.
타락펜스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휴마누스를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아집은 그만 부리고 포기하십시오.”
“나도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어. 내가 여기서 포기해 버린다면, 또다시 세르펜스 너 혼자 무거운 책임을 떠안게 된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그런 네게 끌려다니며 옆에서 지켜볼 선우도···, 분명 괴로워질 테고.”
아주 잠시지만 휴마누스의 시선이 내 쪽에 머물렀다.
그 시선은 다시 타락펜스를 향했지만, 눈이 마주쳤을 때 보았던 그의 표정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입으로는 내가 괴로워질까 염려하면서, 본인이 세상 모든 근심을 짊어진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책임감에 짓눌려가는 타락펜스를 보며, 내가 괴로워할까 봐 염려한 거라면 순수하게 고마운 마음을 품었을 텐데.
내가 타락펜스에게 모진 꼴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일 수도 있어서 찝찝했다.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하다.
이런 내 심정도 모르고 타락펜스는 악당 같은 표정으로 일소했다.
“하! 설마하니 내가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줄 아십니까? 대륙의 사람들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며, 그치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럼 너는 어째서 성검의 주인이 되어 마왕과 싸우려는 거야?”
“신의 사자인 선우에게 평온한 대륙을 선물하기 위함입니다.”
“···뭐?”
“그쪽이 승산 없는 전투에 목숨을 내던진 끝에 대륙이 마왕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 평화를 되찾은 대륙에서 나와 함께하는 게 선우에게도 더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너···! 그런 말로 선우를 회유했던 거야?!”
험악하게 일그러진 휴마누스의 표정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오해가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깊어졌다는 것을.
저건 분명 내가 일행들과 대륙 모두를 위해, 타락펜스의 곁에서 희생하길 선택했노라 착각하여 나온 표정일 테다.
‘타락펜스 쟤가 집착이 심하고 힘 조절도 못 하긴 해도, 바라는 건 오직 애정뿐인데···.’
정말로 내가 타락펜스에게 회유되어 현재펜스를 돌려받길 포기했다면, ‘희생’이라 말할 정도로 심한 짓을 당할 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행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를 터.
그래서인지 휴마누스뿐 아니라 다른 일행들의 표정도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아직 완벽히 회유한 건 아니지만, 곧 선우도 깨닫게 될 겁니다.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나른한 미소를 띠며 말하는 타락펜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슬슬 이 녀석이 뭘 하고 싶은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납치범 역할에 너무 심취하여 일행들을 단련시킨다는 목적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내 추측은 틀렸고 진짜 목적이 따로 있는 걸까?
“자, 잠깐만요! 마왕을 해치우고 나면 성검은 신께서 거두어 가시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평화로운 대륙에서 선우와 함께 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요?”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불현듯 떠올랐다는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에 타락펜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은 곧 신이 될 예정이며, 그렇게 된다면 성검 없이도 지금의 인격을 유지할 수 있노라 말하였다.
허황스러울 정도로 터무니없는 녀석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외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신이 되어 마왕을 처치하고 나면, 10년간 선우를 본래 살던 세상에 보내 줄 생각입니다. 그리워하던 가족들의 품속에서 나를 그리워하다 보면, 내 소중함을 깨닫고 더 큰 애정을 베풀어 줄 테니.”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타락펜스가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을 꺼내며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고 처음 보는 표정도 아니다.
일종의 재방송을 보는 느낌이었고 이번에는 연기라는 걸 아는데도, 여전히 미친놈 같아 보였다.
다른 일행들의 감상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그보다 가족 얘기를 꺼내다니···.’
반사적으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입에 재갈을 물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도 모르게 이를 갈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내색하지 않고 숨겨왔는데, 그런 걸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렇게 터트리다니.
‘내가 가족들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불의의 일격을 맞아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녀석이 자신에게로 돌아온 내가 오직 본인만을 위한 천사가 되어, 영원히 저를 보좌하게 될 거라는 얘기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거다.
녀석이 그렇게 떠들어대는 통에, 일행들의 머리에서 ‘가족’이란 키워드는 지워진 듯 보였다.
그래봤자 나중에 타락펜스가 돌아가고 나면 대화 내용을 되짚어 보다가 깨닫고 말겠지.
“세르펜스, 그 얘기를 듣고 확신했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에서 너를 쓰러뜨려야만 한다는 것을.”
전직 최종 보스답게 악당스런 면모를 유감없이 뽐낸 타락펜스의 언행에, 휴마누스가 전의를 불태우며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과연 주인공다운 모습이다.
그럼 나는 최종 보스에게 붙잡혀 주인공에게 구출되는 역할인가?
이 역할을 최종 보스의 보좌관인 내가 맡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타락펜스가 아닌 현재펜스의 보좌관이라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어이 명을 재촉하는군.”
타락펜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왼손을 들어 올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평상시라면 유지스가 귀를 파닥거리는 거로도 모자라, 몸을 비비 꼬며 좋아하고도 남았을 행동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유지스는 진중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푸로르와 윈스톤도 굳은 얼굴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타락펜스에게 먼저 덤벼드는 이는 없었다.
앞서 녀석의 강함을 몸소 확인하기도 했고 마법사라는 중요 전력도 빠졌으니, 더 신중히 행동하려는 걸 테다.
일행들은 보이지 않고 있을 리 없는 빈틈을 찾아 타락펜스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긴장의 끈이 팽팽히 당겨진 그 순간.
– 휘오오···.
황량한 사막의 바람이 불었다.
가는 모래가 바람을 타고 떠올라 안개가 일듯 시야를 가렸다.
타락펜스의 모습이 살짝 흐려지는가 싶더니, 휴마누스의 바로 앞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휴마누스는 사풍을 뚫고 튀어나온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은빛 신성력을 두른 성검이 황금빛 신성력을 머금은 방패와 부딪혔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혔으나, ‘쨍-!’ 하고 날카롭고 맑은소리가 나는 대신 ‘쾅-!’ 하고 둔중하며 탁한 소리가 났다.
급하게 방어한 까닭일까?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휴마누스의 자세가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타락펜스의 주먹이 방패 너머, 그 주인을 노렸다.
“커헉!”
제대로 직격당했는지 휴마누스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반쯤 날아가다시피 뒤로 밀려났다.
타락펜스가 휴마누스에게 따라붙어 추가타를 날리려던 그때.
거대한 검이 녀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에 공격 기회를 놓쳤는데도, 타락펜스는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저 목표를 바꿨을 뿐이다.
성검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은빛 호선을 그리며 윈스톤의 목을 베어낼 듯 휘둘러졌다.
가만히 누워서 관람만 하는 나도 머리털이 쭈뼛할 정도로 아찔하건만.
윈스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푸른 오러가 일렁거리는 검으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고는 ‘흡!’ 하고 짧은 기합 소리를 내며 팔에 힘을 주고 성검을 밀쳐내려 들었다.
검을 맞댄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동이다.
하지만 타락펜스는 밀려나기 전에 성검을 회수해 버렸다.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거로 보아, 처음부터 공격이 막힐 줄 알고 힘을 뺀 상태로 성검을 휘둘렀었나 보다.
‘아, 아니다. 진짜로 윈스톤의 머리를 날려버릴 수는 없으니, 일부러 막힐 생각으로 살살 휘두른 거려나?’
타락펜스는 성검을 재차 휘두르는 대신 거의 주저앉다시피 자세를 낮췄다.
푸로르의 발차기가 공기를 찢을 듯 빠른 속도로 청은빛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을 실패한 것에 아쉬워한다기보다, 낭패감에 가까운 감정이 푸로르의 얼굴에 떠올랐다.
바닥을 훑다시피 휘둘러진 타락펜스의 긴 다리가 푸로르의 발목을 걷어찼다.
타락펜스가 자세를 낮췄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예상했는지, 푸로르는 몸이 땅에 닿기 전에 재빨리 팔을 뻗었다.
그렇게 양손으로 땅을 짚음과 동시에, 푸로르는 몸을 뒤집어 발뒤꿈치로 타락펜스의 머리를 내리찍으려 들었다.
훌륭한 임기응변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상대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타락펜스는 푸로르의 발목을 낚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윈스톤을 향해 집어 던졌다.
윈스톤이 얼른 검 손잡이에서 한 손을 떼고 날아오는 푸로르를 받아냈다.
그 사이 타락펜스는 휴마누스와 검을 맞댔다.
‘저 세 사람이 다 타락펜스 근처에 모여 있으면 후위는 누가 지키지?’
고개를 돌리자 리에나와 에드나, 그리고 언제 깨어났는지 모를 아니마가 백색 결계 안에서 보호받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두 마법사는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고, 리에나의 격투술은 타락펜스와 맞붙을 실력이 되지 않으니.
타락펜스에게 노려져 짐이 되지 않도록 방어에만 전념하기로 했나 보다.
‘그런데 한 명이 부족하지 않아?’
유지스의 모습이 어디에도 안 보였다.
의문을 느끼는 그때, 모래 언덕 너머에서 화살이 한 발 쏘아졌다.
주변의 공기를 밀어내어 유지스가 모습을 숨겼던 모래언덕을 흩어지게 할 정도로, 강한 바람의 힘이 담긴 화살이었다.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온다는 사실을 타락펜스가 모를 리가 없다.
한데도 녀석은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윈스톤의 복부를 걷어찬 후, 푸로르의 공격을 피하며, 휴마누스가 휘두른 검을 성검으로 흘렸다.
그리고 화살이 근접한 후에야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결계를 펼쳐 핀 포인트로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