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9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92화(892/1105)
< 88. 공작님과 약속의 날 (10) >
마치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때마다 난도가 상승하는 게임처럼, 타락펜스는 서서히 제 실력을 끌어올렸다.
일행들은 그런 녀석을 꺾고자 이를 악물고 싸웠으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력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그럴수록 일행들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났다.
애초에 일행들을 단련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타락펜스는 힐러인 리에나와 마력이 바닥난 마법사들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일행들의 부상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위험을 무릅쓴 것인지.
리에나는 결계를 거두고 신성력으로 그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타락펜스는 그런 리에나를 노리는 대신 마음 놓고 일행들을 더 모질게 몰아갔다.
용사의 무구인 갑옷이 찌그러질 정도로 강하게 휴마누스의 가슴팍을 후려친다거나.
윈스톤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좁은 갑옷 틈새로 성검을 밀어 넣어 깊숙이 찌른다거나.
뼈가 드러날 정도로 푸로르의 양팔에 심한 상처를 입힌다거나.
신성력을 쏘아 보내 유지스의 복부에 깊은 자상을 남긴다거나.
마치 치료를 하든 말든 더 심한 부상을 입히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당장은 리에나가 치료해 주고 있긴 해도 그녀의 신성력은 무한한 게 아니다.
타락펜스와 전투를 벌이는 일행들이 다루는 능력과 체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점점 지쳐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락펜스가 신에 근접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까닭에, 위압감에 짓눌려 움직임마저 눈에 띄게 굼떠졌다.
‘나한테는 영향이 미치지 못하도록 조절한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도 가슴 위에 바위라도 올려진 듯 숨 쉬는 게 힘들다.
내가 이 정도이니 타락펜스를 정면으로 마주한 일행들은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테다.
하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워나가고자 했다.
“정녕 누구 하나 목숨을 잃고 나야 포기할 텐가?”
타락펜스가 신성력을 두른 손으로 휴마누스의 검을 잡아채며 입을 열었다.
검날에는 황금빛 신성력이 둘러져 있었으나 은빛 신성력 앞에서는 영 맥을 못 추었다.
손을 베기는커녕 떨쳐내지도 못하고, 바람 앞의 촛불처럼 금방이라도 빛을 꺼트릴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함에도 휴마누스의 자색 눈동자는 올곧게 빛났다.
“아무리 내가 눈치 없어도, 이쯤 되면 네가 우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어.”
“그러고 보니 그쪽은 내 의식이 이 몸에서 막 깨어났을 당시, 본인에게 가르침을 줄 거라는 착각을 했었지···. 설마하니 아직까지도 그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버리지 못 한 겁니까?”
타락펜스는 그렇게 말하며 대화하는 틈을 노리고 달려든 푸로르에게 반격을 가했다.
휘둘러지는 성검을 무시하고 공격을 감행해봤자,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건 고사하고 일방적으로 내주기만 할 뿐이다.
푸로르가 공격하려고 내뻗었던 양팔을 당겨 가슴 앞에서 교차시켰다.
그녀의 대응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린 인간의 살갗 대신 두껍고 질긴 곰의 가죽을 두르고, 드루이드의 기운을 덧씌워 한층 더 강화시킨들.
은빛 신성력을 완전히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터다.
그렇기에 푸로르는 무게 중심을 옮기어 발뒤꿈치로 땅을 박차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할 수 있는 대처는 모두 다 했다.
성검이 아슬아슬하게 푸로르의 팔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한데도 녹색 기운을 가르고 곰의 가죽을 찢어 생채기를 남겼다.
“내가 그쪽 일행의 목숨을 거두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선우와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뭐든지 다 하겠노라고.”
“선우가, 그런 약속을 했단 말이야···?”
“어디 약속만 했겠습니까? 실제로도 아주 잘 지켜주셨습니다. 한데···.”
타락펜스가 말끝을 흐리며 왼손에 힘을 주자, 잡고 있던 검날이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뚝 부러져버렸다.
부러진 검날은 황금빛이 아닌 은빛 신성력을 머금고 유지스를 향해 날아갔다.
막 시위를 놓으려던 유지스의 가슴에 검날이 틀어박혔고,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미친?!’
냉정하게 판단하면 타락펜스가 유지스를 죽일 리 없다. 분명 급소를 피해서 던졌을 거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친한 사람이 가슴팍에 검날이 꽂힌 채로 쓰러졌는데,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유지스!!”
휴마누스가 쓰러지는 유지스를 쳐다보며 비명처럼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반사적인 행동이겠지만, 전투 중 한눈을 판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복부에 틀어박힌 발길질에 울컥 피를 토하며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크아아아!”
분노한 푸로르가 인간보다 짐승의 것에 가까운 모습으로 타락펜스에게 달려들었다.
타락펜스는 자신을 찢어발기려 드는 손톱을 피해 푸로르의 손목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팔과 연결된 몸뚱이가 딸려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녀석은 푸로르의 명치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을 축 늘어뜨린 푸로르가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타락펜스가 봐준 덕분이라는 걸 증명하듯, 너무나도 쉽게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도, 윈스톤은 시퍼런 오러가 넘실대는 검을 제 주군의 육신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어차피 제 실력으로는 타락펜스를 해칠 수 없으니 그냥 최선을 다해 싸우는 거려나?
아니면 진짜 주군인 현재펜스를 구하고자 발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무슨 심정으로 임하고 있든 타락펜스는 망설임 없이 성검을 휘둘렀다.
은빛 궤적이 푸른 오러가 깃든 검을 통과하듯 지나쳤다.
그 부분을 기준으로 위쪽 검날이 분리되듯 잘려나가, 풀썩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파묻혔다.
다음 순간 타락펜스는 윈스톤의 두꺼운 목을 움켜잡았다.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던 나조차, 녀석이 언제 푸로르의 손목을 놓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고.
윈스톤이 채 반응하지도 못할 정도로 재빠르게.
“한데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 거지? 요행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만큼 이리도 실력 차이가 극명하거늘,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선우가 열심히 약속을 지켜 온 의미가 없잖습니까. 그의 노력을 헛것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타락펜스가 헛소리를 떠들어대며 한 손으로 윈스톤의 거구를 들어 올렸다.
이런 경우 응당 목을 조르는 손을 떼어놓고자 몸부림치기 마련이건만.
윈스톤은 침착하게 타락펜스의 팔을 단단하게 붙들고, 정강이를 덮은 그리브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비틀어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차고자 했다.
“허튼짓을 하는군.”
타락펜스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지도 않고 결계를 펼쳐 공격을 막아내며, 팔을 털어내듯 윈스톤을 휙 집어던지고는.
그의 거구가 땅에 닿기도 전에 성검을 휘둘러 신성력을 쏘아 보냈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윈스톤의 몸이 본래 떨어지려던 위치보다 더 멀리 날아갔다.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는지 윈스톤의 팔이 움찔거리며 땅을 짚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타락펜스가 다가가서 등을 꾹 밟자, 기절해 버렸는지 윈스톤은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휴마누스가 달려드니 녀석이 윈스톤의 등에서 발을 뗐다는 점일까?
“으브븝! 으브브브 븝!”
더는 못 봐주겠어서 적당히 좀 하라고 외쳐 보았으나, 재갈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내게 선물이 될 거라더니.
‘과정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울 거라는 말은 안 했잖아!’
타락펜스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제 그만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녀석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 자신을 상대로도 이렇게나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불안하겠지.’
우리가 마왕과 싸워서 이기든 지든 타락펜스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애써 내게 환심을 산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무자비하게 일행들을 공격했다.
그 이유는 아마 나 때문일 거다.
일행들이 패배하면 나 또한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무력을 갖추지 못한 신의 사자라니···. 사로잡아 이곳저곳 끌고 다니면 사람들의 희망을 꺾고 절망에 빠뜨리기 딱 좋잖아?’
악숭이 놈들이 나를 얌전히 끌고 다니기만 할 리가 없다. 죽게 놔두지도 않을 테고.
룩스메아에게는 더 이상 세상을 다시 시작할 힘이 남아있지 않으니, 이번 회차는 성검 일행의 패배 이후에도 끝나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터.
그렇다면 나는···.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애써 지워내며,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휴마누스가 부러진 검을 들고 방패를 앞세워 타락펜스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이렇게까지 나를 막아서는 이유가 있나?”
“네가 가려는 그 길의 끝에 있는 건 후회뿐이라는 게 뻔히 보이니까!”
방패를 휘두르며 휴마누스가 박력 있게 외쳤으나, 이내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성검이 방패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쳐 공격을 흘려보낸 후.
멈추지 않고 갑옷으로 보호받는 몸통을 후려친 까닭이다.
“후회를 해도 내가 합니다.”
“네 후회가 곧 내 후회야.”
“···그렇다면 더 제대로 덤벼보십시오. 후회가 생기지 않도록.”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리에나는 유지스를 치료하며 마지막 힘을 끌어다 쓰고는 의식을 잃었다.
유지스를 비롯하여 휴마누스와 함께 싸우던 이들은 기절한 채 깨어나지 못했다.
전의가 꺾이고도 남을 상황이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러진 검에 황금빛 신성력을 밀어 넣으며 계속해서 싸워나가길 택했다.
은빛을 머금은 성검이 방패를 잘라버려도 부러진 검을 휘두르길 멈추지 않았다.
‘저거 용사의 무구인데 망가지진 않았겠지···?’
복구 기능이 있다는 건 알지만, [성검의 주인]에서도 방패가 반 토막 난 적은 없기에 괜히 불안해졌다.
정작 방패 주인은 신경도 안 쓰고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당신은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 겁니까?”
“포기하면 그대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은 남으니까!”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이미 반 토막 난 방패에 신경을 끈 건 이해한다.
하지만 바뀐 호칭 정도는 신경 써 줬으면 좋겠다.
“당신이 나를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나는 절대로 희망을 놓지 않아! 내 소중한 이들을 지켜야 하니까!”
부러진 검이 황금빛 신성력을 토해내며 은빛을 머금은 성검과 계속해서 맞부딪혔다.
때때로 성검이 부러진 검을 피해 휴마누스를 상처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짧아진 검의 길이를 보완하느라 신성력을 길게 뽑아낸 까닭에, 그 소모량이 급격하게 늘어난 까닭일까?
다친 상처를 치료하고 체력을 회복할 신성력도 아깝다는 듯, 휴마누스는 피를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에도 부러진 검이 뿜어내는 황금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기엔 본인이 너무 약하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도 알아! 그러니까 안주하지 않고 발버둥 치는 거잖아!”
“그냥 포기하고 내게 맡기더라도, 이 세상과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이들은 구원받을 텐데?”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는! 거야! 너도 내 소중한 사람이라고!!”
빠르게 검이 교차할 때마다, 휴마누스가 한 발짝 한 발짝 뒤로 밀려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을 내뱉으며 기어코 문장을 완성했다.
부러진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이 마치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이번에는 절대로! 그 누구도 잃지 않고! 모두와 함께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거니까!!”
어느새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밝힐 정도로, 눈부시게 밝은 빛이 휴마누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때 모래가 움직여 타락펜스의 양 발목을 붙들었다.
에드나와 아니마가 극소량이나마 회복된 마력을 쥐어짜서 발현한 마법이리라.
그 마법이 타락펜스를 붙잡은 건 찰나에 가까운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목표한 바를 이룬 녀석에겐 더없이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황금빛 신성력과 은빛 신성력이 충돌했고, 타락펜스는 슬그머니 성검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