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9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93화(893/110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1) >
눈부신 황금빛이 사그라지고,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모랫바닥에 쓰러진 세르펜스의 모습이다.
다행히도 겉보기로는 크게 다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기야 타락펜스는 휴마누스에게 능력으로 밀린 게 아니라, 물러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일부러 성검을 놓은 걸 테니까.
내가 아끼는 ‘현재펜스’의 몸을 보호할 여력은 충분했을 거다.
‘설령 다쳤다 하더라도 신성력에는 자가 치유 기능이 있다니까···, 괜찮겠지.’
사실 안 괜찮아도 달리 방법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휴마누스에게 신성력을 쥐어짜 보라고 하고 싶지만, 전투 직후라 지쳤을 테고.
무엇보다도 리에나가 유지스까지만 치료하고 기절해버린 까닭에, 윈스톤과 푸로르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 방금 쟤 일부러 검 놓지 않았어···?”
넋을 놓았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휴마누스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세르펜스 전문가인 나를 향해 물었다.
그걸 눈치채다니 휴마눈새 주제에 제법이다. 각성하면서 눈치 레벨도 덩달아 올랐나?
뭐, 싸우느라 상대방의 움직임에 집중해서 알아본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그보다 지금은 상대방의 상태를 잘 살펴보고 질문을 던져줬으면 좋겠다.
“휴마누스 님, 질문을 하더라도 일단 선우 씨를 먼저 풀어주고 나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에드나가 옳은 말을 했다.
입이 막혀 있는 사람에게 질문해서 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으니 고개를 움직여 답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만.
내가 범법자도 아니고 이렇게 묶인 채 고갯짓으로 대화를 나눠야 하나?
“아!”
휴마누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아까는 정신을 반만 차렸고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지금 풀어주러 갈게!”
그렇게 외친 휴마누스는 바닥을 나뒹구는 성검을 집어든 후, 나를 향해 뛰어오다 말고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우뚝 멈춰 섰다.
기껏 되찾은 성검을 모래에 쿡 박아서 세워 놓는 그의 행동에 의문이 떠오르려는 찰나.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혼잣말과 함께 검집을 풀어 세르펜스의 가슴 위에 고이 올려놓는 모습을 보고, 휴마누스의 의도를 깨달았다.
성검펜스가 왔다 간 이후 세르펜스는 이전 회차의 기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
휴마누스는 저 검집. 그러니까 용사의 무구 덕분에 다른 회차의 기억을 봐도 의식이 뒤섞이지 않으니, 세르펜스에게도 효과가 있길 바라며 그것을 건네준 걸 테다.
나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휴마누스를 칭찬해 주었다.
뒷짐진 자세로 묶여있던 터라 휴마누스는 볼 수 없겠지만, 칭찬해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다시 성검을 집어 든 휴마누스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기왕이면 세르펜스뿐 아니라, 기절한 일행들의 상태도 확인하고 나서 와 달라는 뜻을 전했다.
“읍! 으브븝! 읍읍!”
“그래,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안심해도 돼.”
“으으으! 으븝!”
“······?”
내가 하소연이나 하자고 소리를 낸 게 아니라는 뜻을 전하고자 마구 고개를 흔드니, 휴마누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휴마눈새가 내 생각을 눈치채 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저 포기하지 않으면 가능성이 남는다던 휴마누스의 말을 본받아, 시도만 해 봤을 뿐이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을 놓을 순 없지, 암.
그래도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 시도해 보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휴마눈새 쪽은 실패했으니 다른 사람과 소통을 시도해 보자.
나는 다시 읍읍거리며 에드나의 시선을 끈 후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푸로르와 윈스톤이 있는 방향을 눈짓하니, 에드나는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고 기절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니마도 그 뒤를 졸졸졸 쫓아갔다.
“이거 어떻게 없애는지 아느냐고 물어봐도 대답은 못 하겠지···?”
휴마누스가 아직도 남아있는 오색 빛 결계를 성검으로 톡톡 건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 에드나가 나를 풀어 줘야 한다고 말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타락펜스 이 자식이 결계를 거두지 않고 가버렸다.
녀석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결계를 이룬 힘은 룩스메아의 것이니 계속 유지되나 보다.
하긴 성검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다고 신의 힘으로 만든 결계가 사라진다면, 볼타 산맥의 결계는 진작 사라지고도 남았다.
타락펜스가 이렇게 될 줄 몰라서 결계를 내버려두고 간 건 아닐 테고.
‘휴마누스에게 주는 일종의 숙제···려나?’
볼타 산맥에서 결계를 펼칠 때에도, 세계수를 치료할 때에도.
휴마누스는 그저 신이 내어준 힘을 제시된 목표를 향해 인도했을 뿐이다. 심지어 그조차도 세르펜스가 도왔다.
온전히 본인의 의지로 이 오색 빛 기운을 다루는 건 휴마누스도 처음이란 뜻이다.
멋대로 룩스메아의 힘을 빼돌리는 건, 그 힘을 다루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니.
이는 휴마누스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을 귀한 기회라 할 수 있다.
잘하면 한 단계 더 실력을 끌어올릴 만한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고.
못해도 나중에 룩스메아가 힘을 빌려주는 일이 생겼을 때, 이 오색 빛 기운을 다루지 못하여 헤매는 일은 없을 테지.
그러니 잘 된 일이다.
내가 결계 속에 갇혀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하다못해 묶여있지만 않았어도, 아공간 주머니 속 식량을 먹으며 느긋하게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만약 휴마누스가 결계를 해제하지 못해도, 세르펜스가 도와주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기왕이면 세르펜스가 깨어나기 전에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
일어나면 혼란스러울 텐데. 옆에 있어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슬슬 밧줄과 닿은 부분이 배기기도 했고.
“끄응···.”
휴마누스가 황금빛으로 물든 성검을 결계에 가져다 대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제까지 오색 빛 기운을 다룰 때 본인의 신성력을 이용해 움직였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방식으로 시도해 보는 걸 테다.
완전히 틀린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정답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러할 게 타락펜스는 이 힘을 제 것처럼 다뤘으니까.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고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에드나와 아니마가 윈스톤을 옮기려고 낑낑대는 모습이 보였다.
바쁜 휴마누스를 방해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씨가 참 곱다.
하지만 2미터가 넘는 장신에 전신 갑옷까지 착용한 근육질 남성을 옮기기에, 마력이 없는 마법사는 너무나도 연약했다.
‘그래도 둘이 힘을 합쳐 1센티도 못 옮기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아니, 것보다 왜 제일 무거운 윈스톤을 옮기려고 하는 건데? 나머지 일행을 윈스톤 곁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마법사는 푸로르에게 가서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는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토론 주제는 ‘이들을 꼭 한 자리에 모아 둬야 하는가?’라는 원론적인 의문이었다.
유지스와 리에나 정도는 윈스톤이 쓰러진 위치까지 옮길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서야 푸로르와 세르펜스만 따로 떨어져 있게 된다.
결국 그들은 기절한 이들을 옮기길 포기하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직이야?”
“잠깐, 잠깐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기도···.”
휴마누스가 집중하느라 감은 눈을 뜨지도 않고 아니마의 물음에 대답했다.
성검에서 흘러나온 황금빛 신성력이 오색 빛 결계를 덮고 있기는 한데, 결계를 치울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글쎄올시다? 적어도 아직은 결계가 결계로써의 역할을 너무나도 잘하고 있는지라.
‘것보다 에드나가 아니마를 데리고 딴 데로 가 주면 좋겠는데···. 딱히 갈 만한 곳이 없겠지만서도···.’
묶인 채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세 사람이 둘러싸고, 나는 그들을 올려다봐야 하는 이 구도가 몹시 기분 나쁘다.
타락펜스가 내게 굴욕감을 줬어.
선물을 주겠다더니 이게 뭐야?
누나 몰래 내게만 맛있는 걸 사 주겠다는 엄마의 말에 쭐레쭐레 따라갔는데, 목적지가 치과였을 때.
어린시절의 내가 느꼈던 것과 맞먹는 배신감이 나를 덮쳤다.
“그게 그렇게 어려워?”
“어렵지, 당연히.”
“세르펜스 저 사람은 그냥 자기 힘처럼 다루던데?”
“그야, 2회차의 세르펜스는 엄청 강했으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하는 일이 잘 안 되어 집중하는 와중에 연달아 질문을 받으면 짜증을 낼 만도 하건만.
휴마누스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아니마의 질문에 답했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씁쓸함이 묻어난 건 내 착각이 아니리라.
저렇게 자신 없는 모습이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포기하지 않겠노라 말했던 사람과 동일인이 맞나 싶다.
“네가 손으로 잡으면 쉽게 잡을 수 있는 물건을 굳이 도구를 사용해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 아니고?”
“···어?”
“네 신성력 쓰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는지는 확인해 봤느냐고.”
“아, 아니···?”
“해 봐.”
아까 에드나가 아니마를 데리고 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전적으로 철회하는 바다.
아니마는 있는 편이 도움 됐다.
“잘 될까 모르겠지만···.”
휴마누스가 아니마의 조언을 받아 황금빛 신성력을 거두어들였다.
어떠한 색으로도 물들지 않고 본연의 색을 유지한 성검의 검신이 결계에 닿았다.
그제야 오색 빛 결계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와, 저게 되네?’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빠르다.
조금 전 각성을 해서 그런가? 혹은 성검의 주인이라서?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요인이 작용한 걸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고로, 휴마누스가 얼른 결계를 치워주길 바라며 열심히 응원이나 해야겠다.
“그럼 저희는 식사 준비라도 하고 있을게요.”
에드나가 집중 모드에 들어간 휴마누스와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그러고보니 하늘이 어둑어둑한 게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나야 전투 돌입 직전에 간식으로 케이크를 챙겨 먹었으니,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내가 없는 동안 이들이 간식을 잘 챙겨 먹었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들은 치열한 전투를 막 끝마친 직후이지 않은가?
엄청 배고프겠지.
나는 에드나가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에도 엄지를 척 올렸다.
“척 봐도 얼굴이 야위신 거로 봐서 그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선우 씨 성격에 아예 굶었을 리는 없으니, 영양가 높고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로 식단을 짜 볼게요.”
“······!”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들어 올렸던 엄지를 슬그머니 접었다.
쫄쫄 굶었다고 착각하며 야채 수프 같은 거나 만들어 주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육류를 거들떠도 안 본 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이젠 좀 괜찮으려나?’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 자체가 패착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육류를 못 먹는 원인이 된, 법숭이 연구실에서 보았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으니까.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선언한들 믿어주지 않겠지.
어차피 입이 막혀서 말도 못 하지만.
이렇게 된 거, 그냥 휴마누스가 오늘 내로 결계를 없애지 못했으면 좋겠다.
“휴마누스 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서두르셔야 할 것 같아요. 선우 씨 상태가 좀···.”
“···응, 그래야겠네.”
내 바람과 반대되는 대화가 오갔다.
에드나의 말에 휴마누스가 살짝 눈을 떴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녁을 먹지 않고 넘어갈 만한 핑곗거리를 생각해 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