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0화(90/1105)
90. 공작님의 생일 (3)
돌아온 다음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아침 일찍부터 공작저를 나섰다.
구매해 두었던 마법 스크롤을 거의 다 소모해버렸기에, 그것을 새로 채워 넣기 위해서다.
‘···라고 세르펜스에게 말해 놓았지.’
물론 스크롤을 구매하긴 할 거다. 하지만 솔레르티아에게 롤링 페이퍼를 받아내는 것이 이번 방문의 진짜 목적.
케이크는 생일 당일 유지스가 사 오기로 했으니, 가장 중요한 건 생일 선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르펜스에게 줄 만한 게 없는데?!’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이미 세르펜스가 다 갖고 있을 테다.
마음 같아서는 성검따위 갖다 버리고, 그에게 잘 맞는 세검이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세르펜스 실력을 생각한다면, 드워프들의 나라인 테라룸 왕국에서 주문 제작한 검 정도는 써줘야 하지 않을까?’
걸리는 시간은 둘째치고서라도, 제대로 된 장인이 제작한 검을 사려면 최소 ‘억’ 소리 나는 금액이 필요했다.
‘역시 선물은 금액보다, 정성이 최고지!’
나는 빠르게 현실과 타협했다.
그래, 분명 세르펜스도 비싼 물건보다는 정성이 담긴 소박한 것을 좋아할 것이다. 비싼 건 자기 돈으로도 얼마든지 알아서 사겠지, 뭐.
하지만 문제는 그 정성 담긴 선물이 뭐냐는 거다.
그의 생일은 바로 내일모레.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내일모레다. 뭔가를 만들어낼 재주도 없고, 있더라도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당장 들일 수 있는 시간이 없다면, 미래의 나에게 떠넘기면 되는 거잖아?’
반드시 돈만 할부하란 법은 없었다.
정성과 시간도 할부로 나눠 지급하면 되는 거다. 거기에 기념이나 추억도 담기면 더더욱 좋고!
선물도 정해졌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솔레르티아의 가게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어떤 스크롤을 찾으시나요?”
문을 열자마자 작은 종소리와 함께 낭랑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솔레르티아의 스크롤 상점. <현상의 왜곡>의 직원인 엘라였다.
“앗, 사장 언니 친구분! 맞으시죠?”
“네, 오랜만입니다. 솔레르티아씨는 바쁘십니까?”
“불러드릴까요?”
“그래 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밝은 웃음과 함께 그녀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카운터 뒤쪽에 자리한 계단을 올랐다.
한 이삼 분쯤 지났을까?
“사장 언니가 올라오셔도 좋다고···, 아차차! 오늘도 스크롤을 구매하실 건가요? 필요하시다면 대화하시는 동안 준비해드릴게요!”
“저번에 구매했던 것 중, 여기서 빠진 것만 사고 싶은데···. 혹시 지난 구매 목록도 남아있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그녀에게 내 스크롤 가방을 건네준 후, 계단을 올랐다.
마침 솔레르티아가 연구실로 추정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시온씨! 장기 출장 나가셨다더니 돌아오셨나 봐요?”
“네, 어제 돌아왔습니다. 솔레르티아씨도 별일 없으셨죠?”
“물론이죠!”
그녀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며, 2층의 문들 중 하나를 열었다.
바닥에는 화려한 무늬의 카펫이 깔려있고,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장식장은 아직 채우는 중인지 듬성듬성했다.
공작가에 비견할 바 아니지만, 응접실로 나쁘지 않은 구색이 갖춰졌다.
“스크롤의 주문제작을 원하시는 분 중, 어떤 스크롤을 사 가는지 비밀로 하길 바라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빈방 중 하나를 응접실로 꾸며봤는데, 어때요?”
“좋네요! 소파도 푹신하니, 편하고!”
“그쵸? 여기서 가장 비싼 게 바로 이거에요!”
솔레르티아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응접실을 꾸밀 때 가장 신경 썼던 것이 소파였는지,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일인가요?”
“네?”
“출장 다녀왔다는 보고를 하러 왔을 리는 없으실 테고···.”
“아하하···. 쉬는 날 자주 놀러 올게요.”
역시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오는 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야박하긴 했다.
“내일모레가 공작님 생신이신 거 아십니까?”
“네, 알···죠. 아주 잘 알죠. 그거 홍보하러 오신 건가요?”
어딘가 짜게 식은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가 공작저에서 머물렀을 때 공작저 사람들에게 들었던 모양이다.
“홍보 같은 게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롤링 페이퍼에 대해 설명했고, 그녀의 표정은 소금보다도 더 짜게 변했다.
“시온씨는 그 정도까진 아니리라 믿었는데···. 아무튼 뭐, 좋아요! 저도 투자자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으니.”
그녀는 흔쾌히 종이를 채워나갔다.
“선물로 드릴만 한 건 없고···. 오늘도 스크롤 사 가시는 거죠? 생일 축하 기념 5% 할인 넣어드릴게요.”
마탑에서는 마케팅 강연회 같은 거라도 하는 걸까?
* * *
생일 당일.
어차피 기척으로 내가 오는 것을 눈치챘을 테니, 오늘 하루 노크 따윈 생략한다.
나는 다짜고짜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 재끼며 외쳤다.
“공작님, 메리 탄신!!”
“···네?”
그건 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르펜스와 눈이 마주쳤다.
저런 표정임에도 창문 너머의 역광을 마치 후광처럼 두르고 있는 게, 오늘도 쓸데없이 성스러워 보인다.
문을 닫고 들어와, 다시 한번 제대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세르펜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이 아니라 생신···, 아니. 됐습니다.”
그가 더 말해 무엇하겠냐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포옥 내쉰다.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건 예상했지만···.”
그것을 방치한 것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작저 한 바퀴 순회할까요?”
“···! 싫습니다.”
내 말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단박에 거절했다.
‘그럴 만도 하지.’
평소 그의 일정을 생각하면, 새벽 일찍 일어나 개인 연무장에서 홀로 수련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씻고, 식사실에서 아침을 먹고. 그 후, 집무실로 출근했을 거다.
당연히 많은 사람과 마주쳤겠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생일 축하 인사를 받는 게 처음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건 정도가 과하잖습니까.”
감사와 존경 등등. 여러 인사말로 그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을 것이다.
“다른 건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 강림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건 대체···. 이들에게 뭘 시키신 겁니까?”
저거 분명 잭이 말한 걸 테다. 틀림없다.
오늘 유지스가 사 올 예정인 초콜릿 케이크 안에 들어간 초콜릿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시키다뇨? 그냥 제가 책임질 테니, 눈치 볼 것 없이 평소 전하고 싶었던 말을 하거나, 진심이 담긴 축하 인사를 해도 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
“표정이 왜 그래요?”
마치 낯선 손님이 와,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 같다.
자기 집에서 원래 살던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를 좀···. 그래, 매우 격하게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뭘 그렇게 경계합니까?”
“···으음.”
“물어볼 것도 없나? 보나 마나 그들이 아는 모습은 진짜 자신이 아니니 뭐니 하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뻔했다.
애초에 그가 ‘남들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어린 시절, 세르펜스는 부모에게 일말의 애정도 받지 못했다.』
‘본인이 깨닫지 못했을 뿐. 결국은 다른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고 싶어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노력했던 거잖아?’
그러면서도 연기로 받아낸 호의는 진짜 자신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진짜 자신은 연기 없이는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 깎아내리면서.
기껏 받아낸 그 호의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여, 튕겨내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요? 가식이면 좀 어때요?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니고. 겉으로만 잘해주는 척하고, 뒤통수친 것도 아닌데.”
“그렇다 해도···.”
“그렇다 해도! 그들에게 세르펜스가 베푼 도움과 배려와 존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가식이든 순수한 호의든 감사할 일은 감사할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마음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나중에 유지스가 오면, 그녀와 휴마누스의 것을 합쳐 한꺼번에 넘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롤링 페이퍼만이라도 미리 건네줘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저런 생각을 품고 있는 상태로는 그들이 건넨 축하 인사는 절대 그에게 닿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르펜스는···. 알고 있잖습니까. 위선이나 가식이라 하더라도 좋으니, 누구라도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을. 그러니까 제가 수상하더라도 믿고 의지해온 것 아닙니까?”
“······.”
“이 세상에 가식이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호의에 계산이 좀 깔려 있으면 어때요.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가 희망을 얻고, 행복을 느꼈다면.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겁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미리 재킷 안쪽에 넣고 오길 잘했다.
세르펜스에게 다가가, 그가 보고 있던 서류 위에 그것들을 올려놓았다.
“···이건 뭐지?”
“그들의 진심이요.”
그의 전신이 빳빳하게 굳었다.
긴장하느라 마른침이라도 삼켰는지, 옷깃 사이로 슬쩍 보이는 그의 울대뼈가 작게 오르내렸다.
“나, 나중에···.”
“나중에 읽고 느낀 점을 1천 자 이상 써서 제출해 오실래요, 아니면 그냥 지금 제 눈앞에서 읽으시겠습니까?”
“······.”
“정 그들에게 가식으로 대했던 게 미안하다면.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이제부터라도 그들을 진심으로 대해주면 되는 거잖아요.”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의 하얀 손이 검은색 잉크로 빽빽이 쓰인, 한때는 하얬던 종이들을 집어 들었다.
“······.”
집무실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간혹 그것을 가르고 지나갈 뿐.
비로소 그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고 난 후, 다시 덮어 그것을 조심히 추슬렀다.
“어때요? 뭔가 느껴지는 거라던가, 떠오르는 생각 같은 거 있습니까?”
“···잘 모르겠군.”
그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과 달리, 물기가 어리고 메이는 듯한 목소리다. 그 소리가, 그의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대신 전해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는 말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급하게 답을 낼 필요는 없고, 천천히 생각해보셔도 됩니다.”
몇 번의 호흡을 내뱉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눈이 뜨여졌다.
눈을 뜬 그는 가장 먼저 나에게 손을 내뻗었다.
‘짜식···.’
괜히 내가 다 감동이 밀려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누가 손 달라 했습니까?”
“···네?”
“당신 것은 여기 없던데. 정작 본인이 쓰는 걸 잊어버렸다고 하지는 않겠지?”
“···쓰, 쓰긴 썼는데. 눈앞에서 읽는 건 좀 민망할 것 같아서.”
“됐으니까, 내놓으십시오.”
“···이따 퇴근 전에 드리면 안 됩니까?”
인상을 와락 찌푸린 세르펜스가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기더니, 기어코 내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고이 접어놓았던 종이를 찾아냈다.
“아, 진짜 민망해질 것 같은데···!”
세르펜스가 내 말에 코웃음 치며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굳히며, 그것을 롤링 페이퍼 뭉치 아래에 끼워 넣었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펼쳤으면 끝까지 읽어야지!”
“···아, 아니 이게···. 이건···.”
“말했잖습니까, 민망할 거라고. 세르펜스가.”
그가 아래에 끼워 넣었던 종이를 꺼내, 다시 제일 위에 올렸다.
‘그러게 경고해줬을 때 얌전히 들었어야지.’
막상 롤링 페이퍼를 쓰려고 펜을 들었더니, 뭘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짧게 생일 축하 글만 쓰기에는 뭔가 허전하고, 다른 이들의 분량에 밀리면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그냥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썼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의 성장 및 육아 일지 비슷한 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누가 보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길고양이를 마주쳤다는 내용으로 글의 시작을 열었다.
“당신···. 일부러 주어를 말하지 않은 거지?”
“자, 자! 어서 읽으시죠! 읽기 힘드시면 제가 소리 내 읽어드릴까요?”
“······.”
“흐름상 뭐가 무엇 혹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파악할 수 있으시죠? 알아서 치환해서 읽으시면 됩니다.”
질색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힐끔거리다, 포기했는지 이마를 짚은 채 시선을 종이 위에 두었다.
중간중간 인상을 팍 찡그리기도 하고, 가끔은 어이없다는 듯 나와 종이를 번갈아 본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가, 퍼뜩 정색하기도 했다.
‘열심히 잘 읽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