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0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05화(905/110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13) >
“서, 선우···. 묶인 상태로 무슨 짓을 당했···,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모두가 경악하여 할 말을 잃어버린 가운데, 유지스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앞서 타락펜스가 일부러 나를 겁줬다고 말한 뒤 매일 묶였다는 얘기를 꺼낸 까닭일까?
아니면 악숭 살롱 잠입을 위한 사전 조사가 문제였던 걸까?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오해를 산 듯하다.
“그냥 본인이 씻는 동안 제가 도망을 치거나, 메모 따위를 남겨 여러분께 연락을 취할까 봐 묶어둔 것뿐입니다. 묶여있는 동안에 뭔가 당한 적은 없어요.”
“쟤 저러다가 구속당하는 거에 길들여져서, 나중에는 스스로 묶인 걸 풀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냥 묶인 채로 지냈대!”
내 얘기에 일행들의 얼굴에 언뜻 안도의 빛이 스친 것도 잠시.
휴마누스가 고자질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에 반박하고자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닫았다.
옆에 앉은 세르펜스가 내 손을 붙잡아 나를 저지했기 때문이다.
‘인정할 건 그냥 인정하라는 거겠지.’
거추장스러운 가죽 스트랩을 풀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은 건, 타락펜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사실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녀석이 불안에 빠지면 느슨하게 풀어 주었던 구속을 다시 강화할까 봐.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온몸을 꽉 죄어 와, 고통 속에서 옴짝달싹도 못한 채로 방치될까 봐.
타락펜스가 그렇게 나를 꽁꽁 묶어 두고 씻으러 가면, 나는 녀석이 빨리 방으로 돌아와 주길 애타게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서 녀석이 어서 이 갑갑한 밧줄을 풀어, 나를 고통 속에서 해방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욕실 문이 열리고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게 너무 반가웠다.
녀석이 밧줄을 느슨하게 묶어줬을 땐 기꺼웠고, 가죽 스트랩을 차고 손발에 어느 정도 자유가 생기자 무척이나 기뻤다.
그래서 진심으로 타락펜스에게 감사했다.
드디어 나를 믿어 줬구나,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감격했더랬다.
‘이런 건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과 그때 느낀 감정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 그러네요? 저 그 녀석한테 길들여지고 있었나 봐요.”
휴마눈새도 단번에 눈치챘던 걸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긴 했나 보다.
그동안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만약 타락펜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다면,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분명 녀석을 동정하고 때로는 고마워하며 의지하게 되었을 테다.
그게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타락펜스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반응했겠지.
‘이 와중에도···. 녀석을 향한 두려움보다 약속을 지켜주어 고맙다는 감정이 더 선명한 건. 과연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모르겠다. 답이 안 나온다.
아니, 답을 도출해 내기 위한 고민 따위 하고 싶지 않다.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서.
“선우, 괴롭다면 더는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정신 차려라.”
파뜩 상념에서 벗어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가 더 새하얗게 질려,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창백해진 세르펜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녀석뿐 아니라 다른 일행들의 낯빛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어···. 죄송합니다, 밥 먹다 말고 이런 얘기 꺼내서.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마음먹었을 때 바로 말하지 않으면 또 숨기고 싶어질까 봐, 빨리 말하려고 하다 보니···. 오랜만에 다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분위기를 다 망쳐버렸네요.”
“아니야. 아닌 게 뻔히 보이는데도 본인은 괜찮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납치한 사람을 감싸던 어제보단 훨씬 나아.”
내가 멋쩍게 웃으며 송구스러움을 전하자 휴마누스가 단호하게 말하며 정색했다.
미안해 하지 말라고 꺼낸 다정한 빈말인지, 아니면 진짜로 어제 내 상태가 더욱 심각했던 건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휴마누스.”
“그런데 선우야, 왜 갑자기 솔직해지기로 마음을 바꾼 거야?”
“사실 어제 휴마누스가 가고 나서 세르펜스에게 설교를 들었거든요. 피해자가 가해자를 감싸주는 건 이상하다고. 그러니 나아지기 위해서라도 제 상태를 인정해야 한다고···.”
나는 휴마누스의 물음에 대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저께 나를 걱정해주는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어째서 믿어주지 않는 거냐며, 짜증을 냈던 게 떠오른 까닭이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미안하고 또 민망했다.
“아무튼, 제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다시 떠올리는 것도 괴롭기도 하고 남에게 말하기 좀 뭣한 내용이라···.”
누군가 호들갑이라도 떨어주면 좋으련만.
내가 말을 마치자 싸늘한 적막이 가라앉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일행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괜히 터무니없는 상상하지 마시고 그냥 혼자서 외롭고 힘들었겠구나, 이 정도로만 생각해 주세요.”
“그냥 외롭고 힘든 정도가 아니라는 티를 팍팍 내면서, 그렇게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럼 어제처럼 괜찮다고 끝까지 우겨볼까요?”
“아니! 그건 절대 안 돼!!”
푸로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난감해하길래 가볍게 농담을 던졌더니, 휴마누스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내가 괜찮다고 우겨대는 꼴이 어지간히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양배추 말이를 하나 입에 넣고 씹으며 딴청을 피우고, 그것을 삼킨 뒤에는 딴소리를 했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떻게 지내긴? 납치된 너를 찾으려고 수상한 이들에 관한 정보를 열심히 모았지. 시트릴 후작령에 들렀을 때까지만 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잠깐. 거길 찾아갔어요?”
“마인에게 ‘철도 파괴자 매국 마인’처럼 괴상한 이명을 붙일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얘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아무리 적이었어도 그런 이명은 인간적으로 너무했다고 생각해.”
휴마누스가 진지한 얼굴을 하며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 이명 때문에 일행들이 시트릴 후작령까지 찾아왔을 줄이야. 정말 타락펜스의 말대로 되었다.
그보다 ‘철도 파괴자 매국 마인’은 대체 뭔가 싶다.
나도 그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대체 누가 ‘철로 파괴자’와 ‘매국노 러스티’를 저따위로 조합해 놓은 건지 모르겠다.
그런 이명을 붙인 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려다가,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깨닫고 이명에 관한 건 넘어가기로 했다.
“거기까지 갔으면, 한정판 까눌레는 당연히 구매하셨겠죠?”
“안 샀어. 바로 너희 뒤를 쫓아야 하는데, 다음날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줄 서서 그거 살 시간이 어딨겠어?”
“네?! 어떻게 거기까지 가서 한정판 까눌레를 안 살 수가 있어요?”
“나는 납치당한 와중에도 세르펜스에게 간식을 사 먹이겠다고, 새벽녘부터 줄 서서 간식을 산 네가 더 놀라운데···. 대체 그 세르펜스는 어떻게 설득한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휴마누스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육류와 치즈를 못 먹게 된 진짜 이유를 밝힌 이후다. 그것 말고는 거리낄 건 없다.
“고기랑 치즈를 못 먹는데 한정 까눌레마저 못 먹으면, 서러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땡깡 부렸어요.”
“잠깐만요! 그럼 선우는 그때부터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은 건가요?”
“채식주의자 식단도 엄연히 제대로 된 음식입니다! 단지 제 입맛에 맞지 않았을 뿐.”
“입맛에 안 맞으면 음식을 별로 드시지 못하셨을 테니 그게 그거잖아요.”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유지스가 예리한 지적을 해 왔다.
그 말대로다. 가뜩이나 타락펜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 같아서 심란한 와중에, 먹을 수 있는 게 순 풀떼기들뿐이니.
자연히 먹는 양도 줄어들게 되더라.
“우리 이제 얘기는 그만하고 식사에 집중하도록 하죠. 특히 선우 님, 많이 많이 드세요.”
리에나가 차분하면서도 자못 엄격한 말투로 얘기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성검 일행이 자신의 접시에 시선을 고정하고 묵묵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왠지 나도 닥치고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부지런히 포크를 놀렸다.
“다 드셨네요? 혹시 양이 부족하진 않으셨어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오늘의 메인 주방장인 에드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양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았다.
지난 한 달간 소식해서 위가 줄어들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양배추 말이 하나하나에 들어간 속 재료 양이 생각보다 많았던 건지.
8개째 먹을 때부터 포만감이 밀려들더니, 지금은 헐렁해졌던 바지가 딱 맞을 정도로 뱃속이 꽉 찬 느낌이다.
“전혀요.”
“만약 부족했으면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남은 양배추는 없지만, 어제처럼 고기를 구워서 먹여 드릴 수 있으니까요.”
“진짜 하나도 안 부족했어요. 도리어 살짝 과식한 감이 없잖아 있어서, 다음 식사 때는 양을 줄여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더 드셔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먹으면 오히려 탈이 날 수 있으니···.”
에드나가 딜레마에 빠진 사람처럼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선 아니마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 둘레를 가늠해 보더니, 배를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을 모르는 척하면 아니마가 다이어트에 돌입하여, 에드나가 큰 시름을 얻을 것 같다.
“아 참. 오늘은 고기가 안 보여서 그냥 제가 먹었지만, 다음부터는 세르펜스가 먹여주기로 했으니까 식단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그런가요? 그래도 기왕이면 직접 드시는 게 거부감을 빨리 낮추실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다양하게 시도해 볼게요.”
에드나는 아이들이 싫어하는 음식을 몰래 먹일 수 있는 테크닉을 꽤 많이 알고 있는지,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다.
실로 믿음직한 모습이다.
“그보다 오늘 음식 맛은 어땠어요?”
“아주 맛있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사실 선우 씨가 드신 양배추 말이 중 하나에,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모차렐라 치즈 조각을 숨겨 뒀었는데.”
내가 푸로르도 아니고, 그렇게나 적은 양의 치즈 냄새를 판별해내는 재주 같은 건 없다.
에드나도 그걸 알고 있으니 그만한 치즈를 숨겨 놓은 걸 테지만.
그래도 너무 소소한 양에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음번에도 이런 식으로 치즈를 조금씩 섞어볼까 하는데 선우 씨 생각은 어때요?”
“나쁘지 않네요. 조금씩 양을 늘려가다 보면 익숙해지겠죠.”
“요거트나 크림 같은 유제품은 괜찮아요?”
“글쎄요···? 혹시 몰라서 안 먹어 봤는데···.”
“그럼 이따 간식 시간에는 아이스크림을 준비해 볼게요.”
더운 사막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이라니.
금방 녹아버릴까 봐 걱정되긴 하지만,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에드나가 먼저 얘기를 꺼낸 걸 테다.
나는 마음 편히 간식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