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0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08화(908/110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16) >
* * *
간식과 저녁을 먹기 위해 잠깐 멈췄던 시간을 제외하면 쉼 없이 이동한 덕분일까?
우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사막 한복판에 세워진 작은 마을인 터라 신전 같은 건 없었다.
심지어는 여관조차 없는지라 우리는 가정집에 돈을 주고 민박을 하게 되었다.
마을 근처에다 천막을 펼쳐 놓고 그곳에서 잘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런데 숙박비를 노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묵어 달라며 서로 경쟁을 벌이더라.
우리에게 좋으면 좋았지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기왕이면 제대로 된 지붕과 샤워 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묵는 게 더 나으니까.
마법으로 몸을 청결하게 할 수는 있었지만, 직접 물로 씻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상쾌함이 있는 법이다.
땀과 모래 때문에 찝찝해 하던 일행들은 만장일치로 민박을 선택했다.
정 뭣하면 내가 욕조를 빌려줄 수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다들 ‘그건 좀···.’ 하고 말하며 싫다고 하더라.
“감사합니다요! 그럼 저희 가족은 조오~기 보이는 친척 집에 가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거나 떠나시기 전에 편하게 찾아와 주십쇼!”
집 주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가족들을 이끌고 등을 돌렸다.
다른 집에서 묵기로 한 여성 멤버들 쪽을 보니, 유지스가 그쪽 집의 주인에게 열쇠를 건네받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유지스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모두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봬요~!!”
“네! 유지스랑 에드나, 아니마, 푸로르, 리에나도 안녕히 주무세요!!”
유지스와 나는 팔을 크게 흔들어대며 밤 인사를 나눴다.
다른 일행들은 짧게 잘 자라는 말만 건네거나 목인사를 하거나. 혹은 가볍게 손만 흔든 뒤 집으로 들어갔다.
“난 제일 마지막에 씻을래.”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휴마누스가 거실 소파에 떡하니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팔짱을 끼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이 무언가 단단히 벼르고 있는 듯 보였다.
저번에 세르펜스의 방에서 셋이 함께 잤을 땐, 저지할 새도 없이 재빠르게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으면서.
오늘은 정 반대의 행보를 보이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
“그런 건 아니야.”
“그럼요?”
“저번에 내가 제일 먼저 씻으러 갔을 때, 나만 빼고 너랑 세르펜스 둘이서 재밌게 놀았잖아!”
“휴마누스가 애도 아니고, 그걸 아직도 담아두고 있었어요?”
“나랑 동갑인 세르펜스는 애 취급하면서 나한테만 너무 박한 거 아니야?”
막상 내가 애 취급하면 싫어할 거면서 휴마누스가 서운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어처구니가 없긴 해도 이해는 한다. 세르펜스만큼은 아니어도 휴마누스 또한 어린 시절에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을 테니.
더욱이 황태자인 그가 나와 세르펜스 말고 누구와 마음 편히 놀 수 있겠는가?
성검 일행들과 신분을 내려놓고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긴 해도 그들은 전부 여자다.
그들이 일부러 휴마누스를 따돌리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성별에서 오는 차이를 무시할 순 없으니, 함께 지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소외감이 들었겠지.
“그럼 제가 먼저 씻고 오겠습니다.”
윈스톤이 첫 순서로 씻기를 자처했다. 친구와 놀고 싶다는 황태자의 생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가 욕실로 들어가고 나와 세르펜스도 소파에 앉자, 휴마누스가 뭐 하고 놀 거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지간하면 놀아주고 싶긴 한데 지금 당장은 그 의사에 응해줄 수가 없다.
내가 놓쳐버린 것이 뒤늦게 떠올라버려서 그것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근데요, 휴마누스. 어제 2회차의 세르펜스랑 싸우다가 성검에 꽤 많이 찔렸잖습니까? 혹시 어젯밤 꿈에 이전 시기의 기억이 나왔어요?”
“평소 방식대로 기억을 봐서 성검에 찔린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보긴 봤어.”
내가 장난을 치며 놀자고 하는 대신 진지한 얘기를 꺼내자, 휴마누스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 얘기만 마치고 나면 진짜로 놀아줘야지 안 되겠다.
“그럼 일부러 본 겁니까? 왜요? 그 기억을 볼 땐 셋이서 같이 자기로 약속했잖아요.”
“2회차의 세르펜스가 성검을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그 시기의 기억을 못 본 지 한참 됐잖아. 게다가 어제 그 세르펜스랑 싸워보니까 내가 얼마나 약한지 너무 잘 알겠더라. 그래서 살짝 초조해졌어. 약속을 안 지킨 건···. 하하! 미안해.”
사과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휴마누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를 건넸다.
그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나는 그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나 때문이리라.
“아!! 그래도 나 혼자 잔 건 아니다? 윈스톤 경이랑 같은 천막에서 잤어.”
“추궁한 거 아니니까,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군가 사과를 해야 한다면 제가 해야겠죠. 2회차의 세르펜스가 성검에 의해 다친 후 1회차의 기억을 보았으니, 휴마누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당연히 떠올렸어야 했는데···.”
어젯밤 휴마누스를 쫓아낸 건 나다.
그러니 약속을 안 지켰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휴마누스는 그저 내가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푹 쉴 수 있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보기로 한 걸 테다.
“정신이 없다 보면 깜박할 수도 있지, 뭘 그래? 그리고 이제는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보는 것도 익숙해져서, 너랑 세르펜스가 꼭 옆에 있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같이 있어 주고 싶으니까, 다음부터는 꼭 같이 자요.”
“응, 그럴게.”
휴마누스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밝게 웃었다.
그는 나와 세르펜스가 옆에 있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불안해서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앞으로 보게 될 기억들은 점점 더 참혹해질 테니까.
“자,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그럼 뭐 하고 놀까요? 세르펜스 간지럼 태우기?”
“그건 안 돼. 저번에 내가 간지럼 태워 봐도 되느냐고 물어보니까, 세르펜스가 싫다고 했거든.”
그냥 장난으로 아무 말이나 던진 거였는데 휴마누스가 몹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르펜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손조차 잡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발전했구나 싶다.
또한 세르펜스도 싫은 건 싫다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아이로 성장한 듯하여, 보호자로서 안심이 된다···고 생각한 찰나.
“괘···, 괜찮습니다. 휴마누스가 그렇게까지 절 간지럼 태우고 싶으시다면···.”
녀석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세르펜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녀석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 자세를 유지했다.
내 분명 누군가가 원치 않는 접촉을 하려 들면 단호하게 거절하라 가르쳤거늘.
교육의 성과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내가 간지럼 못 태워서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은 사람에게 억지로 그럴 생각은 없거든?!”
다행히도 내가 따끔하게 혼내기 전에, 휴마누스가 먼저 세르펜스에게 한소리를 퍼부었다.
전에는 세르펜스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쿠폰을 발행하려 했을 때 뜯어말리더니.
은근히 생각이 제대로 박혀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과거에는 세르펜스에게 막무가내로 치댔던 걸까?
정말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세르펜스도 그게 의문이었는지, 슬그머니 눈을 뜨고 천천히 팔을 내리며 휴마누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입니까?”
“당연히 정말이지. 그보다 대체 왜 갑자기 내게 간지럼을 허락한 거야?”
“낮에 아니마 씨 앞에서 그동안 제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인정해 주셨잖습니까? 그래서 감사의 의미로···.”
“아무리 고마워도 그렇지! 예전부터 느낀 건데, 세르펜스 너는 친한 사람이 뭔가 부탁하면 다 들어주려고 하더라? 그러면 안 돼.”
휴마누스가 자신이 과거에 했던 짓은 생각도 안 하고, 엄한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혼냈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뺏긴 것 같아서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펜스가 꼭 내게서만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건 아니니까.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휴마누스는 뭘 하며 놀고 싶습니까?”
“글···쎄?”
놀 줄 모르는 두 사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나란히 내 쪽을 쳐다보았다.
영락없이 어린애 둘이 놀아달라고 보채는 모양새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이 두 사람과 뭘 하고 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색종이를 꺼냈다.
최근에 타락펜스가 자신도 종이접기를 해 보고 싶대서 같이 했었는데,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꽤 재밌더라.
반듯하게 접으려고 집중해서 꼼지락거리다 보면 잡생각도 안 들고.
“설마 종이접기 하려고? 그건 완전 어린애들이나 하는 놀이 아니야?”
휴마누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것도 잠시뿐.
나와의 추억이 담긴 놀이를 무시당한 게 기분 나빴는지, 세르펜스가 순식간에 종이접기로 용 한 마리를 완성했다.
그걸 본 휴마누스가 감탄하며 세르펜스에게 어떻게 한 건지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재밌게 잘 노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욕실에서 나온 윈스톤과 바톤 터치했다.
내가 씻고 나올 때 즈음에는 휴마누스도 용을 한 마리 완성했다. 비록 꼬깃꼬깃 볼품없는 모양새긴 했지만.
승부욕이 발동했는지 세르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씻으러 갔는데도, 종이접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린애들이 하는 놀이라더니 참 재밌게 하시네요? 우리 휴마누스 어린이, 몇 짤?”
“흠, 흠!! 종이로 이런 것까지 접을 수 있을 줄은 몰랐지···! 그리고 실은 내가 어릴 때 드래곤과 관련된 얘기를 굉장히 좋아했었거든.”
놀리는 의도가 가득한 내 물음에, 휴마누스가 민망해하며 묻지도 않은 어린 시절의 취향을 이야기했다.
내가 살던 세계나 이곳이나 어린아이가 공룡을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는 킥킥 웃으며 자리에 앉아, 종이접기에 열중한 휴마누스에게 이리저리 훈수를 놓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세르펜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가끔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꽤 재밌었어, 다음에는 뭘 하며 놀지 기대할게.”
휴마누스가 싱글벙글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지금 나한테 다음에 즐길 놀거리를 준비해 두라고 한 건가?
상전 납셨다 싶어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오죽 또래와 놀아본 적이 없으면 이럴까 싶어서 내가 이해해 주기로 했다.
“저···, 세르펜스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색종이를 치우고 있는데, 윈스톤이 아뢰옵기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향해 말문을 뗐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던 세르펜스가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윈스톤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고, 그럴수록 세르펜스의 눈에 깃든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윈스톤 경, 무슨 일이십니까?”
“죄송합니다. 세르펜스 님께서 하사해 주신 검과 갑옷을 망가트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하마터면 육성으로 ‘헐!’ 하는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설마하니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제까지 눈치를 살피다가 겨우겨우 말을 꺼낸 건가?
하기야 검은 세르펜스에게 처음으로 받은 하사품이고, 갑옷은 제대로 착용하고 싸운 횟수가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니 아까울 만도 했다.
그리고 충성심 높은 기사 중에는 주군이 하사한 물건을 가문의 보배로 삼아, 대대손손 물려주는 것을 명예로 삼는 이가 많다고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윈스톤의 저런 반응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세상 사람이라서 그런가, 이 세상의 기사들은 너무 감상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어느 정도인지 상태를 봐도 되겠습니까?”
세르펜스의 말에 윈스톤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갑옷을 꺼내고, 씻으러 갈 때 잠깐 풀어 두었던 검을 가져왔다.
갑옷은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고 일부 부서진 곳도 있었다. 검은 날이 심하게 상해 있었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방패랑 검이 둘 다 반 토막 났는데, 이 정도면 무난한 수준 아닌가? 심지어 걔가 쓰는 방패는 용사의 무구잖아요.”
“어차피 그 어떤 도구든 장기적으로 보면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제가 선물한 검과 갑옷 덕분에 경이 조금이라도 덜 다치셨으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더군다나 이것을 망가트린 건 윈스톤 경이 아니라, 이전 회차의 제 자아잖습니까?”
나와 세르펜스가 윈스톤을 달래고자 앞다퉈 말을 꺼냈다.
자신이 우리에게 우쭈쭈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윈스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의 표정에서 ‘이게 아닌데?’라는 말이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