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1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12화(912/110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20) >
“그런 의미에서 말 나온 김에 보고 하나 할게요. 며칠 전에 악마가 하나 소환된 거 알고 계시죠? 그거 저희가 처치했습니다.”
“오오! 그럼 사막에 가셨던 이유가 혹시···?”
“사막 지하에 큰 규모의 악숭 거점이 숨겨져 있었거든요. 거기 있는 놈들이 소환한 겁니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간사한 악숭이들이 사막에서 몰래 악마를 소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악마가 사람들을 해치기 전에 처리하신 거죠?”
이 사람도 유지스과(科)였나 보다.
실제로는 나와 타락펜스가 그곳에 쳐들어가서, 악숭이들이 죽기 살기로 부랴부랴 악마를 소환한 거지만.
아무렴 어떠하리. 큰 사고가 나기 전에 막았다고 알려지는 편이 사람들의 반응도 더 좋겠···.
“응? 잠깐만요. 주교님도 악숭이를 악숭이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아, 네. 혹시 어색했나요···?”
“아뇨. 반대로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냥 넘어갈 뻔했습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알 수 없을뿐더러, 어쩌다가 오늘 처음 본 성직자가 ‘악숭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교황이 시켰다고 볼 수도 없는 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교황은 악숭이를 ‘악마 숭배자’라고 지칭했다.
이제까지 성직자 중에 ‘악숭이’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한 명은 일행인 리에나고, 다른 한 명은 악숭 살롱 잠입 때문에 우리와 오래 함께 지냈던 테일러 이단 심문관이다.
그런데 이 주교는 대체 어쩌다가 악숭이를 악숭이라 하게 된 걸까?
몹시 의문스럽긴 했지만, 일단 본론부터 마무리 짓기로 했다.
“악숭 거점의 입구는 여기에 표시해 두었습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어 하인델 주교에게 건넸다.
참고로 지도에 표시를 한 사람은 당연히 내가 아니다.
타락펜스에게 들려 다닌 데다가, 사방이 모래뿐인 사막에서 그 위치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세르펜스에게 표시해 달라고 해 놓고, 일행들에게는 타락펜스가 남긴 편지에 좌표가 적혀 있었다고 둘러댔다.
“표시된 위치에 가만히 서 있으면 늪처럼 서서히 밑으로 빨려 들어갈 겁니다. 내려가는데 시간이 꽤 걸리니까, 모래에 질식사하지 않으려면 결계를 펼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저희가 지나간 길의 함정은 해제해 두긴 했는데···.”
지도를 확인하는 하인델 주교에게 나는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고작 함정 때문에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되니까.
악숭이들이 전부 죽고 없더라도 절대 방심하지 말라는 얘기를 몇 번이고 강조했다.
“제가 할 얘기는 이게 끝입니다. 주교님은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긴히 해야 할 말은 저도 다 하긴 했는데···.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하인델 주교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저렇게까지 긴장한 걸까?
심각해 보이는 주교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긴장하며 일단 들어 보겠노라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사인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하인델 주교가 내민 종이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꼼꼼히 살폈다.
혹시 종이가 이중이라서 한 겹을 떼어내면 이상한 계약서 같은 것이 적혀있지 않을까, 미심쩍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냥 평범한 백지에 불과했다.
“그냥 사인만 하면 돼요?”
“기왕이면 ‘하인델 F. 아마토르 님께’라고 제 이름까지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정말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아무래도 이 주교는 내 팬이었던 모양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일까?
교황처럼 호들갑을 떨었다면 종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수고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떨떠름히 웃으며, 하인델 주교가 바라는 대로 종이에 그의 이름을 쓰고 커다랗게 사인했다.
덤으로 ‘늘 행복하세요!’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웃는 이모티콘까지 그릴까 하다가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뺐다.
“감사합니다, 평생의 자랑으로 삼겠습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린 하인델 주교를 마주하고 있노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그래서 사막을 건너오느라 피곤하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인델 주교는 기어코 우리를 방까지 안내해 준 뒤에야 물러갔다.
“살다 살다 별 해괴한 경험을 다 해보네···.”
“음? 먼저 안 씻는 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를 빼고 앉아 테이블에 엎어진 나를 보며, 세르펜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피곤하다고 했으니 곧장 씻고 침대에 드러누울 줄 알았나 보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려고.”
타락펜스와 함께할 땐 녀석이 볼까 봐 시간이 나더라도 일부러 쓰지 않았고, 최근에는 내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자각한 터라 쓰지 못했다.
어차피 가족들은 보지도 못할 편지였으니 그냥 적어도 문제 될 건 없겠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 닿지 못할 투정을 부리다 보면,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치다 못해 폭발할 것 같아서 차마 펜을 들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도 무슨 내용을 적어야 할지 막막했다.
뭔가 쓰고 싶기는 한데, 외롭다느니 무섭다느니. 그런 부정적인 얘기는 적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타락펜스에 관한 얘기는 아직 쓸 엄두가 안 났다.
– 드르륵.
새하얀 편지지를 펼쳐 놓고 고민에 잠겨있는데, 옆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은 세르펜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 또한 나처럼 아공간 주머니에서 편지지를 꺼내어 앞에 펼쳐 놓았다.
“에일리히 님께 편지 쓰려고요?”
“그럴 생각이다. 한동안 백부님께 편지를 쓰지 못하였잖은가. 선우가 그분께 쓴 편지에 추신을 덧붙이긴 했지만, 기왕이면 편지를 한 통 새로 적는 게 백부님도 좋아하시겠지.”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고는 변명처럼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것은 변명이 맞았다. 녀석이 편지를 꼭 지금 쓸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씻으러 들어갔을 때 쓰면 그만이건만. 세르펜스가 구태여 지금 편지를 쓰겠다고 나선 건 내 곁에 있어주기 위함일 테다.
너무 갑자기 부쩍 자라버린 녀석의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더 굳건한 어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떠오른 생각을 내뱉을 수는 없다. 사과도 할 수 없다.
세르펜스는 다정하고 착한 아이니까, 나보다 더 미안해하며 가슴 아파할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고마워, 아도르.”
“정 고맙다면 내게도 사인을 한 장 써 줬으면 한다. 기왕이면 ‘시온 리벨론’이 아니라 ‘유선우’로서.”
“······.”
아무래도 내 첫 사인을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뺏긴 게 분했나 보다.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나는 이내 실소를 터트리며 빈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리고 고향의 언어로 ”라고 적은 후, 내 이름 석 자를 휘갈겨 썼다.
마무리로 ‘<♥ 공작님, 행복해 주세요! ^▽^ ♥>’라는 코멘트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작님, 해, 행포···>, 아니. <행복···해주···세요···>?”
“자, 잠깐만! 세르펜스, 지금 이걸 읽은 거야?”
“그렇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연히 있지!”
나는 세르펜스에게 한글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녀석은 어눌한 발음으로나마, 내가 적은 글귀를 제대로 읽어 냈다.
“이제까지 선우가 두 가지 언어로 동일하게 적은 편지를 내게 보여주었잖은가. 뜻이 아닌 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문자라 알려 주기도 했고. 그래서 이름 같은 고유 단어를 기준점 삼아 나름대로 연구해 보았다.”
보여주긴 했지만, 연구하라고 보여준 건 아니었다.
두 장의 편지지를 나란히 놓고 대조하듯 읽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저러다 혼자 한글을 깨우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정말로 그게 현실이 되어버리자 감탄보다 경악이 앞섰다.
“으음, 나는 선우가 칭찬할 줄 알았는데···. 혹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나?”
소심펜스가 내 눈치를 살피며 울적하게 말했다.
아무 말 없이 굳어버린 내 반응을 보고 오해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떠올린 걸 테다.
그제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아니, 아니! 그럴 리가! 그냥 너무 놀랍고 대단해서 순간 말을 잃었을 뿐이야!”
“그런 건가···?”
“그런 거야. 와, 진짜 어떻게 한 거야? 발음하는 건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자음의 형태가 발음할 때의 입 모양과 혀의 위치 등을 형상화한 모습이잖은가. 그 사실을 눈치챈 이후에는 이름에 쓰이지 않은 발음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모음이었는데, 이것도 풀어보면 모음과 모음끼리의 조합인지라 기본 형태에 해당하는 모음을···.”
내가 대단하다며 띄워 주자, 세르펜스가 으쓱거리며 어떻게 자신이 한글을 읽을 수 있었는지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편지에 언급된 여러 이름을 보며, 그 형태와 발음을 연결하여 읽는 방법을 알아서 깨우쳤다는 뜻이다.
“혹시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도 알아?”
“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뜻, 맞는가?”
“용케 알았네?”
“선우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 중, ‘나는 이 녀석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이 있었으니까.”
그런 내용도 썼던가?
이제까지 쓴 편지가 열 통을 가볍게 넘기는지라 좀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충분히 쓸 법한 내용이다. 세르펜스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늘 하는 생각이니, 어쩌면 의식의 흐름대로 편지를 쓰다가 여러 번 언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납득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세르펜스가 빈 종이에 사인을 남겼다.
내가 사인에 남긴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 나의 선하고 어진 벗 <선우>’, ‘<♥ 선우도 행복해 주세요! ^▽^ ♥>’라는 글귀와 함께.
나는 세르펜스가 미처 한글로 적지 못한 부분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고, 녀석의 말투에는 ‘<행복해다오.>’ 쪽이 어울린다고 정정해 줬다.
그 결과 나는 세르펜스의 사인을 두 장 얻게 되었다.
세르펜스는 내 사인에다 에드나가 만든 종이 보존 시약을 칙칙 뿌리더니, 뚜껑을 닫고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돌연 행동을 멈췄다.
녀석이 닫았던 뚜껑을 다시 열고 자신이 쓴 두 장의 사인에도 시약을 뿌리며 말했다.
“아껴 쓰고 있는 거지만, 특별히 뿌려주겠다.”
“푸하하핫!!”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녀석의 말과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세르펜스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가 웃으니 저도 좋다는 듯 방긋방긋 웃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멎어갔던 웃음이 다시 터졌다.
“아유~, 요 재롱둥이 같으니!”
장난스레 세르펜스의 뺨을 가볍게 꼬집자, 녀석이 헤실헤실 미소를 흘렸다.
오늘 가족들에게 쓸 편지의 내용이 정해졌다. 즐거운 추억도 하나 생겼다.
그리고 나도 행복해져야 세르펜스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도르, 함께 행복해지자.”
“나는 선우와 함께라면 늘 행복하다. 그러니 선우만 행복해지면 된다.”
“응, 노력할게.”
“아니, 노력은 내가 해야지. 선우는 그냥 편하게 있어라.”
세르펜스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행동이 너무 기특한 나머지 푸스스 웃음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