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2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25화(925/1105)
< 90. 공작님과 마인들 (11) >
세르펜스는 식사를 하며 악마의 계약을 끊을 수 있는 기본 조건을 설명했다.
자신처럼 두 가지의 신성력을 보유하는 건 특이 케이스이니 접어두면, 주교급 성직자 두 명이 합심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좀 더 엄밀히 따지자면 보조역을 맡은 한 명은 일반 신관이어도 상관없지만, 주교에 준하는 정교한 신성력 컨트롤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예비 주교가 아니고서야, 그런 일반 신관이 있겠냐···?’
어딘가에는 있을지 모르나 흔치는 않겠지.
신성력 양으로 밀어붙일 수 있으면 차라리 나았다.
성기사 단장쯤 되면 주교와 거의 엇비슷한 양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잘 모르는 사람은 성기사 단장이 다방면으로 신성력을 다루는 연습을 하면, 휴마누스처럼 실력이 쑥쑥 자라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든 노력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첫 번째 문제고, 두 번째 문제는 역시 재능이다.
천재펜스에게 밀려서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휴마누스도 만만찮은 재능의 소유자다. 그렇기에 노력한 만큼 실력을 키우는 게 가능했다.
‘그 재능을 아니까 룩스메아도 휴마누스에게 성검을 넘긴 거겠지.’
만약 휴마누스의 재능이 별 볼 일 없었더라면, 황제누스가 아무리 간절히 바랐다 한들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했을 거다.
아무리 열심히 싸워나간들 그 끝에는 결국 패배와 절망만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
“교황이 있는 대신전이랑 추기경이 배치된 극소수의 신전을 제외하면, 그 조건을 맞출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봐야겠네요.”
유지스가 뵈프 부르기뇽에 들어간 양송이버섯을 포크로 푹 찍으며 낙담했다.
방금 그녀가 언급한 특이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1신전 1주교가 기본 원칙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주교가 고급 인력이며, 각 신전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까닭이다.
“죄송합니다. 바쁜 일정을 늦추면서까지 시도한 것인데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해서···.”
그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건만.
시들펜스는 풀이 죽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면서 공연히 매시드 포테이토를 숟가락으로 헤집었는데, 너무 시들시들해진 나머지 입맛까지 뚝 떨어졌나 보다.
밥상머리 앞에서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배로 안타까웠다.
나는 녀석이 실패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고사를 지냈다.
그 때문에 부정을 타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결과가 나온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식이 잘못되면 본인의 부덕함을 먼저 탓하게 되는 게 부모 마음 아니겠는가?
“성과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잖아. 당장은 못 써먹어도, 언젠가는 도움이 될 날이 올 거야. 그러니까 기운 차리고 어서 먹자, 응?”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살살 달래니 세르펜스가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이 기특하여 ‘옳지, 옳지!’를 연발하며 잘 먹는다고 칭찬하자, 녀석의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는 녀석이 본래 식사 속도를 회복할 때까지 응원하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아···.”
식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세르펜스가 돌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탄성을 흘렸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녀석에게로 모였다.
“할 말이라도 있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알아냈으니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게 뭔데?”
“우리를 찾아왔던 그 마인들은 악숭이···. 그중에서도 선우가 ‘민숭이’라 지칭하는 자들이다.”
“엥?”
마인은 마인이고 민숭이는 민숭이다. 그런데 어떻게 마인이 민숭이가 될 수 있다는 건가 순간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을 뒤집으니 이내 답이 나왔다.
마인이 민숭이가 되는 건 불가능해도 민숭이는 마인이 될 수 있다.
즉, 세르펜스의 말을 해석하자면.
마인들이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구질구질한 사정은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요.
놈들은 작정하고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기 위해, 자진하여 악마와 계약하고 나선 민숭이 연기자들이라는 뜻이다.
“헐, 아니, 와···! 대박 개소름! 연기력 어쩔?!”
놀라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
배우펜스의 연기에 익숙해진 나를 속일 정도로, 엄청난 연기자들이 악숭 세력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 대단한 자들을 고작 우리의 발목을 잠시 붙들어 놓는 데 쓰다니?
악숭이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치, 실로 무자비한 자원낭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나 놀라운 거였나···?”
세르펜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악숭 세력이 내세운 배우들의 연기 따위, 자신의 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다.
그리고 녀석은 어딘지 모르게 뚱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내가 남의 연기에 감탄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아아! 그래서였군요? 어쩐지,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했어요.”
유지스가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대체 무엇이 마음에 걸렸던 건지 그 부분까지 얘기해 줬으면 더 고마웠을 텐데.
툭하면 설명이 부족하다며 툴툴거리던 휴마눈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미안한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마인 중에 머릿속에서 울린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계약을 했다는 식으로 말한 자가 있잖은가. 하지만 선우도 알다시피, 현재 악마와 직접 계약을 맺은 자들은 온전한 의식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그자의 말은 명백한 거짓이지. 하여 계약을 끊는 데 성공한 후 따져 물으니 사실대로 실토하더군.”
요컨대 설정 오류를 잡아냈다는 뜻이었다.
세르펜스의 설명에 유지스가 ‘역시나···.’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게 바로 설정 놀이 마니아들의 저력이라는 걸까?
“그거 말고 더 알아낸 건 없어?”
“애석하게도.”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마인들의 용도는 시간을 끄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자들에게 악숭 세력이 중요한 정보를 들려줬을 리가 없다.
* * *
세르펜스가 악마의 계약을 끊는 데 성공했다는 건, 계약 당사자인 악마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더 이상 마인을 보내오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놈들은 또다시 마인을 보내왔다.
“이 앞으로 가게 두지 않겠다!”
레파토리가 달라지긴 했다.
저번처럼 계약을 끊어 달라 사정하는 민숭 마인 대신, 무기를 꼬나쥔 마인이 길을 막아서며 비장하게 소리쳤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아주 멍청한 짓이라 생각한다.
휴마누스가 말에 박차를 가하여 일행들보다 앞서 나가며 검을 빼 들었다.
황금빛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말의 추진력까지 얻어 마인을 일격에 베었다.
그리고 세르펜스가 마인의 시체 옆을 지나치며 성화를 피워 올렸다. 그걸로 정화까지 간단히 끝나버렸다.
“쯧! 길막을 하려면 좀 더 강한 마인을 데려올 것이지.”
“선우, 그 말도 일종의 클리셰? 그런 것 아닌가?”
“앗!”
세르펜스의 지적에 아차 하며 입을 막아보았지만, 이미 내뱉어진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클리셰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성검의 주인]에서 나름 네임드에 속했던 마인이 우리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페이크 간부였던 ‘흑기사’에 비하면 중요도로 보나 지닌바 무력으로 보나, 여러모로 뒤떨어졌지만.
아무튼 그럭저럭 강한 마인이었기에 우리를 멈춰 세우기에는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과거 클리셰 발언으로 내게 혼이 난 휴마누스가 눈총을 보내온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나한테 불길한 사건을 불러오는 클리셰 발언이 어쩌고 하더니···.”
“거 미안하게 됐수다.”
“사과하는 태도가 왜 그렇게 건방져?”
“앞으로 입단속 잘 할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넘어갑시다, 예?”
“뭔가 좀 아닌 것 같은데···?”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휴마누스는 내게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냥 혼났던 게 억울해서 말을 꺼냈을 뿐, 진짜로 나를 탓하려던 건 아닌 모양이다.
휴마누스는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고는 말에서 내려 검을 뽑아들었다.
행여나 마인의 무기에 말의 목이 뎅겅 잘려나갈까 봐 경계한 까닭이리라.
‘저 놈, 목을 수확하는 자라고 불렸던 걔 맞겠지?’
목을 수확하는 자.
그건 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목과 머리가 분리된 시체만 남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명이다.
커다란 대낫을 사용하는 마인은 하나뿐이었으므로 무기를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낫으로 목을 뎅겅뎅겅 자르고 다니는 마인이 있다는 소문은 접하지 못해서, 이번 회차에는 스카우트에 실패한 줄 알았건만.
그냥 쓸만한 전력이 무의미하게 퇴치당할까 봐 꼭꼭 숨겨둔 거였나 보다.
“그보다 진짜 대낫이 무기야? 쟨 대체 어쩌다 저런 걸 무기로 골랐대? 농작물을 수확하듯이 사람 목을 수확한다는 컨셉으로, 공포감 조성을 위한 법숭이의 픽인가? 아니면 본인이 고른 건가? 후자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전자라면 조금 불쌍한데?”
소설을 읽을 땐 대체 언제적 중2병 설정이냐고 생각하며 코웃음 쳤었는데.
실제 마주하게 되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은 휴마누스가 수련을 한답시고 일반 검을 뽑아들고 있으니 그나마 낫지만, [성검의 주인]에서는 끝판 왕 무기인 성검을 들고 있었는데.
본인은 제대로 된 무기조차 아닌 농기구로 맞서 싸워야 한다면, 대체 얼마나 비참하고 서러운 기분일까?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일한 유산을 모욕하다니···!”
아무래도 자기가 고른 무기였나 보다.
나는 마인을 동정했던 마음을 거두었다.
“이제보니 이거, 완전 불효자식이었네! 너희 아버지가 낫을 쥐여 주며 사람 목이나 베고 다니라고 가르치디? 땀 흘려 열심히 농사를 지으라고 남겨주신 물건으로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쓰나?”
“그래, 우리 아버지는 그냥 평범하고 성실한 농사꾼이셨어! 하지만 촌장이 아버지의 밭을 탐내서···. 다른 곳보다 수확량이 많은 건, 땅이 더 기름져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열심히 밭을 일구신 결과인데···!”
[성검의 주인]에서는 딱히 언급된 적 없던 ‘목을 수확하는 자’, 줄여서 목수의 배경 스토리가 놈의 입에서 나왔다.전부 다 들은 건 아니었으나 여기까지만 들어도 숨겨진 뒷이야기를 알 것 같다.
악숭 세력의 패턴은 뻔했으니까.
“이미 악마랑 계약까지 끝낸 것 같으니 이런 얘기 하기 좀 그런데, 그거 아마 악숭이들이 꾸민 짓일걸? 네 타고난 신체 능력이 좋아 보이니까, 일부러 촌장을 이용해서 네 아버지를 죽이게 유도하고 복수를 도와주겠다며 접근했을 게 뻔해. 아니면 지들이 죽여놓고 촌장이 그런 거라고 증거를 조작했거나.”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악숭이가 우연히 알게 되어 계약을 제안했는데, 마침 그 대상이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해?”
“······.”
“악마랑 계약한다고 죄다 강한 마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마인인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런데 그쪽은 어때, 악마의 힘을 꽤 많이 받아들였잖아?”
이건 진짜 드문 케이스다.
그렇기에 악숭이가 이자를 마인으로 써먹으려 점찍어두고, 수작을 부렸을 거라는 추측에 확신이 생겼다.
애초에 남을 죽인다고 그 밭을 빼앗아 오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냥 이 순진무구하고도 어리석은 청년이 속은 거다.
타고난 신체 능력이 좋은 대신에 머리가 매우 나쁜가 보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으아아악!!”
목수가 생각하길 그만뒀는지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솔직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놈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얘기를 입에 담은 건,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펜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신성 결계를 펼쳤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거로 보아, 목수의 처치는 온전히 휴마누스에게 맡길 생각인가 보다.
< 90. 공작님과 마인들 (1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