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2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27화(927/1105)
< 90. 공작님과 마인들 (13) >
“푸로르의 말이 맞아요! 함께 싸우며 전우애를 다지는 거, 물론 좋죠. 하지만 저희가 공유하는 경험은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전투가 차지하는 영역은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그런 치열한 경험보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쌓이는 온화한 추억들이 더 소중해요. 선우는 그렇지 않나요?”
유지스가 푸로르의 말을 이어받으며 상큼한 목소리로 내게 동의를 구해왔다.
저 얘기를 어떻게 부정할 수가 있을까.
나도 악숭이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보다 이들과 추억 하나를 더 쌓는 게 훨씬 좋다.
특별한 추억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 같이 둘러앉아 간식을 집어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애초에 우리가 악숭 세력과 싸우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평범하되 귀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다. 전투 따위는 그런 일상을 침범하는 방해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나는 왜 그렇게 초조해하며 안달을 냈을까.
먹먹함이 밀려들어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푸로르가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쯤 휴마누스가 엄청나게 소외감을 느끼고 있겠네! 하하하!”
유쾌한 그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덩달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뒤늦게 미안해졌다.
세르펜스의 상태도 걱정되었고 겸사겸사 시간 단축을 위해 이동 중이긴 한데, 이렇게 한가로이 대화까지 나눠도 괜찮은 거려나?
속이 넓은 휴마누스라면 이해해 주겠지?
“선우는···, 자신이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사실에 너무 얽매여 있는 것 같다.”
뒤에서 낮은 읊조림이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축축함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설마 세르펜스가 울고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확인해 본 결과 울고 있지는 않았으나 울음을 참는 표정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마지막으로 운 게 언제였지···?’
울음을 터트릴 만한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건만, 울보펜스가 이렇게나 오랫동안 울지 않았다니.
아이들에겐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는 자유도 필요하다.
때로는 울음을 참아야 할 때도 있겠지만, 반대로 펑펑 울고 털어버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어른스러운 척 구는 것도 그렇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만간 억지로라도 울려 봐야지 안 되겠네.”
“선우 씨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어도 똑같이 이상했을 테니까,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해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세르펜스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데 에드나가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조금 전 세르펜스가 한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하자면.
‘어디서 태어났든 선우 씨가 선우 씨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의미로 한 말 같기는 한데···.
“제가 뭘 어쨌다고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시는 겁니까?”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을 보고, 뜬금없이 울려봐야겠다고 다짐해 놓고도 자각이 없는 거예요?”
“아, 그거 제가 소리 내서 말했습니까?”
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게 그만 실수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거로 내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울어야 하는 애가 안 우는 게 이상한 거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막 태어난 아기가 울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울려서 숨통을 트이게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지 않으면 죽으니까.
비록 세르펜스는 태어난 지 27년 된 아기지만.
그래도 숨을 못 쉬면 옆에서 도와주는 게 사람 된 도리다.
“하아···, 또 내 걱정부터 하지.”
“네?! 그게 걱정이었어요? 선우 씨는 걱정하면 상대를 울리는구나···.”
세르펜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고, 그 얘기를 곡해한 에드나가 깜짝 놀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울적해 하는 세르펜스를 달래야 할지, 나에 관한 오해를 풀어야 할지 갈등하는 사이.
녀석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나를 위한다면 선우 본인을 먼저 챙겨다오. 선우는 내 세계를 이루고 있는 근간이니, 그대가 흔들리면 나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해석하자면 ‘나는 아직 자기 주관이 바로 서지 않은 아기라서, 보호자인 선우에게 자아를 의탁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책임감이 더 막중해졌다.
“선우, 혹시 내 말을 확대 해석하여 이상한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아니야.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였어.”
“정말인가? 흐음···. 선우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이런 점은 불편하군.”
“그건 나도 불편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말 위에서 뒤돌아 앉아, 세르펜스랑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눌 수는 없잖아.”
“으음, 확실히···.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얼굴을 보고 대화하기는 힘들 것 같긴 하다.”
나는 문득 대화가 삼천포로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마냥 울적해 하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세르펜스와 말 하나를 같이 타면서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런 주제로 한창 고심하고 있을 무렵.
“나 왔어!”
전투를 끝마치고 날아온 휴마누스가 자신의 말에 안착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말까지 모느라, 두 개의 고삐를 쥐고 있던 윈스톤이 그것 중 하나를 휴마누스에게 넘겼다.
“고마워, 윈스톤 경.”
“아닙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참으로 간략하기 그지없다.
나는 말주변이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것 같은 윈스톤에게, 모범적인 대화의 예시를 보여주기로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휴마누스. 목수는 잘 처리하고 오셨어요?”
“응? 목수? 농사꾼 출신 마인 아니었어?”
“2회차에서 ‘목을 수확하는 자’라는 이명이 붙었던 놈이잖아요. 그러니까 줄여서 목수.”
“헷갈리니까 그렇게 줄여서 부르지 마. 직종이 바뀌어 버렸잖아?”
그다지 모범적인 대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휴마누스가 불만스레 인상을 찌푸렸고, 윈스톤은 나를 힐끗 쳐다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시선을 완전히 거두어 버렸다.
저 고갯짓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한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마누스 님도 오셨으니, 다시 속도를 올릴게요.”
리에나가 신성력을 끌어올려 말들에게 불어넣었다.
우리는 마인 따위 마주한 적 없는 것처럼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말의 속력이 워낙 빨라 잠깐만 방심해도 경로를 이탈하거나 사고가 나기에 십상이니, 고삐를 쥔 자들이야 바쁘겠지만.
내게는 무척이나 한가한 시간인지라 잡생각이 떠올랐다.
‘목수는 진짜로 속아서 마인이 된 거니까, 죽이기 전에 계약을 끊어서 영혼만이라도 자유를 찾아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꽤 고위 악마와 계약을 한 것 같긴 하지만, 세르펜스라면 어떻게든···.’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가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하면 세르펜스가 의아함을 느끼고 캐물을 테니 이게 최선이었다.
남들이 이런 식으로 녀석에게 부담을 줄까 봐 계약을 끊는 데 실패하길 바랐던 거였다.
그런데 하마터면 내가 부담을 줄 뻔했다. 속으로만 생각해서 다행이다.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
마침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할 주제도 있었다.
세르펜스는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에 얽매여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금 전에는 녀석에 대한 걱정이 앞서서 지나쳐 버리고 말았지만, 그냥 넘겨 버릴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런 건가?’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이들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며 함께 어울리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푸로르와 유지스의 말대로,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만날 수 없는 가족들과 원래 세상의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이 불러온 쓸쓸함.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을 보며 때때로 느끼는 낯섦이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과연 납득이 갔다.
나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어쩌면 외면했을 진실을 세르펜스가 짚어 주었다는 걸 깨닫자,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원인을 알아도 당장은 해결할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내가 본래 세상에서 맺었던 인연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려나?’
그런 건 싫다. 잊고 싶지 않다.
차라리 향수병으로 끙끙 앓아눕는 게 낫지. 소중한 사람들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건 결단코 사양한다.
‘시온’의 육체가 명을 다하여 돌아갔을 때도 문제가 생길 테고.
얼마나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고민이 가벼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그게 얼굴에서도 티가 났는지, 저녁때가 되어 말에서 내린 세르펜스가 나를 보자마자 걱정부터 했다.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어? 진짜 얼굴이 왜 그래?”
“말을 타고 가는 내내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더니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더라고요.”
유지스가 휴마누스의 물음에 대답하는 척, 세르펜스에게 내 표정이 어쩌다 구려졌는지 슬쩍 귀띔했다.
그러면서 내게 안타깝다는 눈길을 보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고맙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울렁거렸다.
“그냥···, 슬슬 검술 훈련을 재개해야 할 것 같긴 한데 귀찮고 하기 싫어서 그래.”
“싫으면 하지 마라.”
“싫은데? 할 건데?”
“안 해도 된다.”
“거짓말, 안 하면 안 되잖아.”
“······.”
내 말에 세르펜스가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애를 괴롭힌 것 같아서 머쓱해졌다.
더불어 곤란한 점이 하나 생겼다.
‘저녁을 먹으려면 저 녀석의 상의 안주머니에 보관된 아공간 주머니가 필요한데···.’
아무리 나라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르펜스의 옷 안에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녀석에게 꺼내달라고 부탁하는 건 더 불편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조심스럽게 세르펜스의 옷깃을 잡아당겨, 벌어진 틈새로 슬그머니 손을 넣었다.
그리고 신중한 손놀림으로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왜 그렇게 살며시 꺼내 가는 거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서?”
“······.”
세르펜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녀석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서 가만히 쓰다듬을 받아주기로 했다.
복슬복슬한 거라도 만져서 기분을 풀고 싶었던 거겠지.
나 또한 종종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기분 전환을 하곤 하니,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녀석이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에 저녁 메뉴를 정해 놓고, 쓰담 타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상을 차렸다.
“윈스톤, 식사 다 하고 나서 저 검술 좀 다시 봐 주세요.”
“···오랜만에 하는 것이니 한동안은 기본 동세를 다잡기만 할 거요.”
윈스톤이 잠시 나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미리 알고 있으라는 듯한 말투로 앞으로의 커리큘럼을 말했다.
그가 내 상태를 정확히 알고서 한 말은 아닐 테다.
단지 조급해진 내가 대련을 하겠다고 설치다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거겠지.
오해였으나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게는 다행한 일이었으니까.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속으로 남몰래 안도했다.
아니, 남몰래는 아니었다. 적어도 세르펜스는 알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