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2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28화(928/1105)
< 90. 공작님과 마인들 (14) >
식사를 마치고, 나는 일행들이 미리 쳐 놓은 천막에서 적당히 떨어진 위치에 자리를 잡고 섰다.
다시 검술 훈련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후, 천천히 밥을 먹으며 충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세니어의 손잡이에 손을 얹으니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손잡이를 감싼 고급 가죽은 손바닥에 난 땀에도 미끄러지지 않고 착 감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가 주었다가 하길 반복하며, 좀처럼 검집에서 세니어를 뽑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오늘은 대련이 아닌지라 윈스톤은 내 정면이 아닌, 살짝 비스듬한 각도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잡아줘야 하기에 거리도 꽤 가까웠다.
즉 내가 망설이는 꼴을 윈스톤이 전부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의문을 표하는 것도 당연했다.
“오랜만에 검술 훈련을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돼서요. 대체 얼마나 빡세게 구를까 걱정되기도 하고···.”
“어차피 이동 중에는 세르펜스 님께 기대어 편하게 앉아있기만 할 뿐이니, 근육통이 생겨도 상관없지 않소?”
“그쵸, 상관없죠. 세르벨트가 안전하게 잡아주기까지 하니까 여차하면 잠도 잘 수 있고···.”
나는 윈스톤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치며, 잠시 세니어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손목을 탈탈 털면서 발목을 돌렸다.
빡센 훈련 전에 관절을 풀어주어 부상을 방지할 겸. 긴장감으로 몸에 과도하게 들어간 힘을 빼기 위함이다.
사실은 후자의 이유가 더 컸지만.
윈스톤은 내가 몸을 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아예 본격적으로 준비 운동을 하기로 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 둘, 셋, 넷···.”
혼자 구령까지 붙여가며 매우 열성적으로 준비 운동을 한 덕택에, 몸에 적당한 열기가 올라왔다.
그래서 그런가 아까보다는 덜 긴장되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을 끌면 열이 식고 다시 머뭇거리게 될 테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는 옛 격언을 되새기며. 왼손으로는 검집을, 오른손으로는 세니어의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후욱-.’ 하고 길게 내뱉은 뒤.
나는 단숨에 세니어를 뽑아버리겠다는 각오를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 스릉─.
날카로운 예기가 담긴 날붙이 소리 앞에서, 내 각오 따윈 바람 앞의 촛불에 지나지 않았다.
섬뜩한 그 소리에 기겁하며 나도 모르게 ‘히익-!’ 하고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거의 다 뽑힌 검을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다음이었다.
힘이 너무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뽑았더라면, 검은 반의반도 뽑히지 못하여 놓치더라도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을 텐데.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댕그랑 소리가 들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1초가 2초로 변하고, 3초로 늘어나도 쇠붙이 소리 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위험하잖소.”
한숨 섞인 저음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윈스톤이 검, 그러니까 세니어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놓친 검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가 잡아챈 모양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뿐.
나는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역시나 세르펜스였다.
녀석은 검술 훈련에 들어간 내가 걱정되었는지, 흙바닥에 피크닉 매트를 한 장 깔고 오도카니 앉아서 이쪽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사색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 놀랐나 보네···.’
마주 보고 있노라니 심경이 복잡해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세르펜스의 옆에서 결계 통과 연습을 하던 휴마누스의 얼굴을 스쳐보았다.
자세히 본 것도 아니었는데 표정에 떠오른 경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그 감정이 선명하게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푸로르와 두 명의 마법사들이었다.
푸로르는 나와 마찬가지로 남에게 말을 얻어타느라,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두 사람에게 가벼운 체력 단련을 시키는 중이었다.
인상을 찡그린 푸로르와 얼떨떨해하는 에드나, 아니마의 얼굴이 보였다.
밤공기가 좋다며 굳이 밖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기도를 올리던 리에나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지스는 천막에서 명상하겠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눈치 못 챘을 줄 알았건만.
엘프답게 귀가 밝아서 내 비명을 들었는지, 천막 입구의 천을 걷어 어리둥절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아니, 다들 왜···. 자기 할 일이나 할 것이지···!’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공연히 억울함이 솟구치고, 입안에서 ‘젠장할’이란 말이 맴돌았다.
나는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는 짓을 그만두고 시선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다른 일행들에 비하여 윈스톤은 꽤나 덤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린 상태였다.
“어, 어이쿠야···. 손이 미끄러졌네에···?”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요?”
“믿어달라고 하는 소리죠.”
“입은 잘 살아있구려.”
“네, 네. 그러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방금 그 말은 덧붙이지 말 걸 그랬다.
윈스톤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확실하게 찌푸려졌다.
덩치가 산만 한 사람이 화가 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절로 고개가 푹 숙어지고 양손이 공손하게 모였다. 내 자세가 이러하니 괜히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검을 손질하는 모습을 통 보지 못한 것 같소.”
“아니, 그게···. 딱히 검집에서 뽑지 않았으니까, 손질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내버려 뒀던 건데요···.”
“먼지가 묻어있소만?”
아무래도 타락펜스가 내게 살인을 강요했던 날, 지하실에서 검을 떨어뜨렸을 때 묻었나 보다.
청소 좀 잘하고 살 것이지.
더러운 악숭이들 때문에 망했다.
“게다가 선우 선배는 반짝거리는 게 예쁘다면서 툭하면 검을 뽑아 보며 감상하곤 했잖소.”
“제가 그러긴 했죠, 네···.”
이번만큼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세니어를 계속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도, 검집에서 꺼내 볼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니.
이건 아마도 그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쓴 까닭이겠지.
“대체 이유가 뭐요?”
“그게, 음···.”
“시기상 이전 회차의 세르펜스 님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맞소?”
내가 대답은 않고 발끝으로 땅을 파면서 딴짓만 하고 있자, 윈스톤이 썩 신중한 어투로 자신의 추측을 입에 담았다.
나는 방금 파냈던 땅을 발로 다시 메꾸며 반사적으로 세르펜스를 곁눈질했다.
자리에 도로 앉지도.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덩그러니 서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세르펜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해도 자신은 상관없다는 뜻이다.
녀석이야 그러하겠지, 자신보다 나를 우선시 하니까.
그래서 일행들에게 모두 털어놓고 의지하라 말했던 거고.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데···.’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윈스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세르펜스를 쳐다보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얘기가 나오자마자 부정하지 못하고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핀 마당에, 이제 와서 그런 거 아니라고 얘기한들 과연 믿어줄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딴 말은 휴마눈새도 안 믿을 거다.
그렇다고 타락펜스를 변호할 수도 없다.
세르펜스가 더욱 자책하며 괴로워할 게 뻔하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나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세르펜스 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세르펜스 님을 안 좋게 생각할 사람은 이곳에 없소.”
“그···쵸! 세르펜스는 인간관계에 다소 서툴 뿐, 순진하고 마음도 여리고 배려심도 많은 아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녀석을 미워하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얘기해도 되는 것 아니오?”
윈스톤의 얘기를 듣고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세르펜스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선 까닭이 아니다. 그냥 내가 문제였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힘든데, 그걸 문장으로 만들어 입 밖에 꺼내 놓아야 한다니.
생각한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일단 검집부터 이리 주시오.”
“···검집은 왜요?”
“이걸 계속 이대로 들고 있을 수는 없잖소.”
내게 손바닥을 내민 윈스톤이 제 오른손에 들린 세니어를 흘깃 눈짓하며 말했다.
나는 검대를 풀어서 그에게 넘기며 은근한 어투로 질문했다.
“그런데···, 자세한 얘기를 꼭 들으셔야겠습니까?”
“구체적인 이유를 알아야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있지 않겠소?”
“······.”
질문에 질문이 돌아왔다.
육류와 치즈를 다시 먹을 수 있게 된 것처럼, 꾸준히 접촉 빈도수를 늘리며 익숙해지는 방법 말고는 없을 것 같은데.
이유를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의구심이 들면서도.
그래도 한편으로는 검술 선생님인 윈스톤에게는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P.T를 받을 때도 지병이 있으면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꼭 얘기해야 한다던데.
하물며 내가 윈스톤에게 배우고 있는 건 그냥 운동도 아니고, 무려 진검을 사용하는 검술 훈련이다.
정신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상담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당장 말을 꺼내기는 좀 그렇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다.
다들 내가 걱정되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걸 테지만.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든 지금은 압박으로 느껴졌다.
“저···, 윈스톤. 어디 가서 둘이서만 얘기하면 안 될까요? 여기서 얘기하는 건 너무 부담스러운데···.”
“세르펜스 님께는 말씀드린 거요?”
“네.”
지금도 말을 안 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데, 세르펜스에게는 얘기를 했다는 게 미심쩍었던 걸까?
윈스톤이 세르펜스와 눈빛을 교환하며 내 대답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휴마누스가 불만스레 툴툴거렸다.
“너희끼리는 다 얘기하고, 맨날 우리에게만 비밀이지?”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타락펜스와 있었던 일을 세르펜스에게 숨길 수 있었다면 나는 분명 그렇게 했을 거다.
하지만 저 녀석의 의식이 깨어 있었던 걸 나더러 어쩌라고!
물론 그 덕택에···, 지금 문제가 된 일의 원인이 미수로 끝나긴 했지만.
“그럼 들어가서 얘기하겠소?”
윈스톤이 휴마누스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체하며, 유지스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천막이 아닌. 아무도 없는 천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윈스톤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해놓고 세르펜스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한 대여섯 발자국 걸었을까?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급선회하여 천막 쪽으로 향하니 윈스톤이 의문을 던졌다.
“왜 그냥 오시오?”
“사실 방음 스크롤을 받으러 가려던 건데···,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
윈스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천막 입구의 천을 걷었다.
먼저 들어가길 기다리며 멀뚱히 서 있자, 윈스톤이 안 들어가고 뭐 하느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기사라서 그런가 약자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나 보다.
천막 안에는 천막을 펼칠 때 겸사겸사 꺼내놓았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문제는 그것밖에 없었다.
오늘은 검술 훈련이 끝나자마자 엎어져서 쉴 생각이었기에, 테이블 같은 건 아예 꺼내놓지도 않은 까닭이다.
“윈스톤, 세르펜스한테 가서 아공간 주머니 좀 받아와 주세요. 테이블이랑 의자 꺼내게.”
“······.”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윈스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천막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