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2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29화(929/1105)
< 90. 공작님과 마인들 (15) >
잠시 나갔다 돌아온 윈스톤의 손에는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고 내친김에 따뜻한 세계수 잎 차도 꺼냈다.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는 됐소.”
“그럼 저 혼자 마시죠, 뭐.”
차를 마시기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다.
나는 막 꺼내 놓은 두 개의 찻잔 중 하나를 도로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남은 찻잔 하나에 세계수 잎 차를 채웠다.
온기를 머금은 찻물이 목구멍을 통과하여 위를 덥히자, 비로소 놀랐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도 같다.
“진정이 되었으면 이제 얘기해 보시오.”
“너무 보채지 마시죠?”
“차 한 잔을 다 비울 때까지 기다린 거면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하오.”
“어···?”
윈스톤의 말에 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연녹빛의 맑은 찻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텅 빈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고작 몇 분 사이에 증발한 건 아닐 테니 내가 마신 게 틀림없다.
이걸 언제 다 마셨나 싶어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윈스톤이 채근하지 않았다면, 물배가 찰 때까지 찻물만 들이켰을지도 모르겠다.
“음,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한담···?”
“세르펜스 님께 설명했던 대로 설명하면 되는 것 아니오?”
“아···, 네···. 그쵸···.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예···.”
세르펜스에게 먼저 설명을 끝마쳤다는 설정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그게 설정임을 모르는 윈스톤이 오른쪽 눈썹을 찡그리며 의문스럽다고 해야 할까, 미심쩍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한 의심을 사기 전에 어서 얘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그게, 2회차의 세르펜스랑 성직자 놀이를 했던 날 있었던 일인데요···.”
“두 분이 그 설정을 연기하며 사람들을 구했다는 얘기는 들었소.”
“네, 네. 바로 그날입니다. 사람들을 내보내고 난 다음에···.”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니, 끊겼다.
케케묵은 냄새가 났던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까닭이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서 무의식적으로 빈 찻잔을 기울였다.
해소되지 않은 목마름은 다시 찻잔을 채운 뒤에야 수습할 수 있었다.
“제압해 둔 악숭이들에게서 정보를 얻으려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그놈들이 순순히 답을 안 하잖아요! 진짜 치사하게···. 그러니까 2회차의 세르펜스가 놈들을 고문하겠다고 나서길래, 말리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그 배은망덕한 녀석이···.”
다시 비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으며, 과거의 일을 입에 담고 있자니 불현듯 서러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악숭이들이 정보 제공만 잘 해줬더라면, 내가 그 자리에서 타락펜스와 언쟁하는 일 따윈 없었을 테다.
그리고 타락펜스는···. 그냥 너무했다. 진짜로.
억울한 마음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씩씩거리며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고 있자니, 뒤늦게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이 떠올랐다.
‘이미 눈물을 다 닦은 마당에 뒤늦게 손수건을 꺼내는 것도 이상하겠지···?’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즈음.
쪼르륵, 난데없이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옮기니 빈 잔에 찻물이 다시 차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찻잔을 다시 채운 이는 윈스톤이었다.
위로의 말을 건넨 것도 아니고, 눈물도 닦아주지 않았으며, 내 하소연에 맞장구쳐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곁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끝까지 얘기를 들어줄 테니 진정하라는 듯이 찻잔을 채워준 그 행동이 기꺼웠다.
어차피 이런 기분으로는 그 어떠한 말을 들어도 위로를 받지 못할 것 같고, 눈물은 내가 흘러넘치기 전에 닦아 버렸으며···.
윈스톤이 그럴 리는 절대로 없을 터이나, 내 하소연에 맞장구치겠답시고 타락펜스를 비난했다면 도리어 화가 났겠지.
윈스톤이 이 사실을 알고 찻잔을 채워 준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한 행동은 지금의 내게 있어 최고의 위로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잔을 채워 줄 거면 가득 채울 것이지, 꼴랑 반의반이 뭡니까?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이번에도 한 번에 다 마실 거잖소?”
내가 불만스레 툴툴거리자 윈스톤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고 보니 만복감이 지나쳐 살짝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입맛도 없고 오랜만의 검술 수련이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과식은 피했지만, 그럭저럭 배가 부른 상태로 차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신 까닭이리라.
아무리 몸에 좋은 차라도 과하게 마셔서 좋을 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차를 딱 한 모금만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아무튼, 그 녀석이···. 그 다음에···.”
몇 마디 꺼내지도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내 손은 무의식중에 찻잔으로 향했고, 결국 잔에 남은 차를 단번에 들이켜게 되었다.
이러다가 진짜로 물배만 채우게 생겼다.
차가 아니라 술을 준비할 걸 그랬나 싶다가도.
그랬다면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인사불성으로 취하지 않았을까 싶어, 차를 꺼낸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나는 차를 더 마시려다가 목구멍까지 액체가 넘실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만뒀다.
“그 녀석이 제게 악숭이를···. 주, 죽여 보라고···. 그러면 죽음에 익숙해지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어디선가 달그락 달그락 하고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원지를 찾아 시선을 돌리니 찻잔을 쥔 내 손이 보였다.
손이 떨리니 찻잔도 함께 떨리고, 그 결과 잔 받침에 계속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낸 것이었다.
이러다가 멀쩡한 찻잔을 깨 먹게 생겼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찻잔에서 손을 떼고 양손을 깍지 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다고 떨림이 멎는 건 아니었으나 달리 손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냥 말로만 권한 건 아닌 모양이구려.”
“네, 네에···. 강제로 손에 검을 쥐여 주고···, 제 뒤에 붙어 서서 손을 겹쳐 잡고···. 그대로, 으으···. 기절한 악숭이를 향해, 휘두르려고···.”
고작 과거의 일을 입에 담기만 했을 뿐인데. 심지어 미수로 끝났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신이 아찔해져서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깍지 낀 손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떨림이 멎지 않고 도리어 심해졌다.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팔을 타고 올라오기라도 한 것인지, 온몸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으슬으슬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추워서 몸이 떨린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몸이 떨려서 춥다는 말은 못 들어봤거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심호흡을 해도 떨림과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차를 더 마시면 나아질까 싶었으나, 찻잔이든 찻주전자든 뭐든 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관뒀다.
“선우 선배, 괜찮···. 아니, 후우···.”
윈스톤이 괜찮으냐고 물어보려다가, 척 봐도 괜찮지 않은 내 모습에 한숨만 내뱉었다.
슬쩍 고개를 올려 그의 표정을 살피니 심각하기가 이를 데 없다.
바위보다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엄청나게 큰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새다.
혹시 내가 이미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걸까 봐, 나는 얼른 부정의 말을 꺼냈다.
“저, 저 사람 안 죽였어요. 아직, 안 죽였는데···. 도중에, 멈춰 줘서···. 그런데, 그런데도···. 왜, 왜 이러죠? 어쩌면, 그 녀석의 말대로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다들 죽이고, 막 그러는 걸 텐데···. 제가 경험해보지 못해서, 지레 겁먹어서 이러는 걸까요?”
“타인의 목숨을 거두는 일이 별것 아닐 리가 없지 않소?”
“그래도, 미수로 그쳤는데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전혀 이상하지 않소.”
윈스톤이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 속에 배려가 담겨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더없이 단호한 그 목소리가 묘하게 다정하게 들려왔다.
“소, 손···. 잡아 줄래요?”
“괜찮겠소?”
어째서 괜찮겠느냐는 말이 돌아온 것인지 모르겠다.
몇 번 눈을 깜박이며 굳은 머리를 억지로 굴린 결과.
타락펜스가 내 손을 겹쳐 잡고, 살생을 저지르려 했던 일 때문이란 사실을 겨우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해 보았다.
세르펜스와 손을 잡는 것도 별문제 없었으니 괜찮을 것 같다.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었으나, 누가 손을 잡아서 이 떨림을 멈춰 줬으면 하는 간절함이 더 강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앞으로 내밀자 윈스톤의 크고 거친. 그러나 온기가 느껴지는 손이 내 손을 덮었다.
“아무리 기사라 하여도 그런 식으로 첫 살인을 겪지는 않소.”
“아직, 아직입니다. 저는 아직···.”
“알고 있소. 그냥 그렇게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갑작스레 살인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오.”
그럼 어떤 식이냐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차마 내뱉지 못한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윈스톤의 얘기가 이어졌다.
“보통은 정식 기사가 되기 전. 종자 시절에 사람들에게 위해를 끼치는 산짐승을 처리하며 살생에 적응하오. 생명을 해쳤다는 죄의식보다, 사람들을 지켰다는 명예와 자부심을 먼저 느낄 수 있도록 말이오.”
“···윈스톤도 그랬어요?”
“그렇소.”
사정없이 떨리는 내 목소리와 다르게 윈스톤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그 모습이 매우 단단해 보였다. 무척이나 의지가 되었다.
“갑자기 전쟁터에 동원된 병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요. 그들은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게 되겠지만, 조국에 있는 가족들을 지킨다는 사명이 있으니 말이오. 무엇보다 전쟁은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는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함께하며, 분위기에 휩쓸려서. 혹은 살아남기 위해 적을 무찌르게 되지 않소? 그 처절함이 살인의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도와주는 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선우 선배의 처지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잖소?”
악숭이를 죽인다고 명예와 자부심을 얻는 것도 아니고.
소중한 이를 지키겠다는 결의를 품은 것도 아니되, 동병상련을 느끼며 위안을 얻을 대상도 없으며, 살아남기 위한 발악조차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살인을 강요하는 이와 함께 무방비로 기절한 적을 앞에 두었을 뿐.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겁을 먹는 게, 이 세상 기준으로도 이상하지 않다는 건가···?’
떨림이 멎은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그날 있었던 일이 마냥 무섭기만 하다.
머릿속은 여전히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다소 편안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유난스러워서 일행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 같다고, 나도 모르는 새에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나 보다.
혹시 그러한 자책감이 내가 느낀 두려움이란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여, 이 문제로부터 계속 도망치게 만들었던 걸까?
그것을 인정하고 마주 본들 당장 해결되는 건 없겠지만.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니 억지로 적응하려 하지 않아도 되오. 선우 선배가 검을 들게 된 동기는 적들을 베어 죽이는 것이 아니잖소?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의 몸을 지키며 시간을 끄는 것, 그게 전부요. 그 누구도 선배가 직접 적들을 해치우는 것을 기대하지 않소.”
마지막 문장이 자못 매정하게 들렸다.
하지만 해괴하게도 듣는 순간 안도감이 찾아왔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에, 다시는 그날 있었던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겁쟁이인가 보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