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2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30화(930/1105)
< 90. 공작님과 마인들 (16) >
* * *
목수 마인과 마주친 이후 일주일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마인을 여럿 맞닥뜨렸다.
한 명으로는 우리의 발을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마인 두셋이 같이 올 때도 있었고 법숭이나 검숭이 등과 함께 나타나기도 했다.
놈들을 전부 휴마누스에게 맡겨둘 수는 없으니, 우리는 종종 가던 길을 멈추고 전투에 돌입해야 했다.
반면에 적습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바로 지금처럼 이동을 멈췄을 때였다.
밥을 먹거나 잠에 들 땐 경계가 느슨해지기 마련이고, 잠들기 전 수련을 할 땐 제각기 흩어져 있으니.
보통은 이럴 때야말로 가장 노려지기 쉬웠으나, 악숭 세력의 목적은 우리의 이동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그러니 놈들로서는 우리가 멈춰 있을 때 마인을 보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걸 테지.
‘그나저나 악숭이 놈들도 참 징하단 말이야? 고작 우리의 발을 잠시 묶어두는 용도로 마인들을 계속 희생시키다니···.’
마인들은 사실상 죽을 자리를 찾아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놈들도 자신의 쓰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앞을 막아선 마인들은 악숭 세력에 속아, 은혜를 입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혹은 진심으로 악숭을 하는 자들뿐이었다.
“팔을 더 높이 들어 올리시오.”
윈스톤의 지적에 나는 제대로 자세를 취하고, 채 검집에서 뽑지 못한 세니어를 허공에 휘둘렀다.
낫을 든 목수와 마주친 후 일주일이 지났다는 것인즉.
내가 윈스톤에게 타락펜스와 있었던 일 중 하나를 털어놓은 이후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세니어를 뽑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일부러 방음 마법이 깃든 스크롤을 사용하지 않았다. 분명 다들 나와 윈스톤이 나눈 대화를 들었을 테다.
게다가 검을 뽑지도 않고 검집째 휘두르고 있으니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나를 대해 줄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평상시만큼은 타락펜스와 있었던 일을 되새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일행들 중에서도 나를 가장 많이 배려해 주고 있는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윈스톤이다.
본래 훈련 도중 딴생각을 하면 바로 혼이 났었는데, 요즘에는 방금처럼 과하게 자세가 무너지는 게 아닌 이상 어느 정도의 잡생각은 내버려두었다.
일종의 재활 같은 느낌으로, 내가 검을 잡고 휘두르는 감각 자체에 적응하는 걸 최우선 목표로 둔 까닭이다.
세니어를 검집에 넣어 둔 상태라 다칠 위험이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이런 훈련 같지도 않은 훈련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일 텐데···.’
딴생각을 하면서 검을 휘적거리고 있자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땐 에드나가 그러했고, 이제는 윈스톤이 자신의 시간을 쪼개가며 나를 도와주었다.
자기개발을 하기에도 바쁜 사람들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버렸다.
“지금 제가 하는 건 설렁설렁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잖아요. 이 정도면 그냥 세르펜스에게 감독을 맡기고, 윈스톤은 본인 할 일 하러 가는 게 낫지 않아요?”
나는 검을 휘두르던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닌 말로 나 다음으로 한가해 보이는 사람은 세르펜스였다.
녀석은 평범한 수련으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경지를 진작에 넘어선 까닭이다.
간혹 명상에 잠기는 등 나름대로 틈틈이 뭔가를 하고는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내가 검술 훈련을 받고 있을 때면,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멀뚱멀뚱 앉아 있기만 했다.
노는 인력이 있는데 괜히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그런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건만, 윈스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소.”
“왜요?”
“선우 선배의 상태가 나빠진 건, 이전 회차의 세르펜스 님께서 선배에게 억지로 검을 들게 했기 때문이잖소.”
세르펜스는 타락펜스와 똑같이 생기다 못해 사실상 동일 인물이다.
그런 녀석이 내게 검술 훈련을 시켰다간, 자칫 내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으니 안 된다는 소리였다.
일리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 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현재의 세르펜스랑 이전 회차의 세르펜스는 달라요. 저는 현재의 세르펜스가 제게 해를 끼치거나, 싫다는 걸 강요할 리 없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괜찮아요.”
“그럼 묻겠소. 지금 이 자리에는 죽여야 할 대상도 없는데, 선배는 어째서 검을 뽑는 것조차 못하는 거요?”
“어, 어어···.”
말문이 턱 막혔다.
윈스톤의 말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다르다는 이유로 트라우마를 피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 지금 트라우마 때문에 검을 뽑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지금 내 상태는 어떠한가?
오기를 부려 검을 뽑아볼까 싶었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긴장되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손에 들린 세니어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세니어를 놓치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렇게 말을 잘하면서, 평소에 떠들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대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소.”
윈스톤이 내 말을 무시하며 훈련 종료를 선언했다.
나는 불만스럽게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억지로 집어넣으며 세니어를 검대에 매었다.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천막에 들어가 쉬기 전에 윈스톤을 향해 꾸벅 목인사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가 그런 말을 꺼낸 건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였고, 본인의 귀한 시간을 내어주기까지 했으니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나는 알고 있다.
내 훈련을 봐 준 시간만큼 혼자서 수련을 하느라, 윈스톤이 남들보다 늦게 취침한다는 사실을.
“으음···.”
천막에 들어가 침대 위에 엎어져 있자니 슬그머니 세르펜스가 들어왔다.
아니, 상반신만 천막 안에 들여놓고 인기척을 냈다.
들어올 거면 얼른 들어올 것이지 왜 저러나 싶다.
“거기서 뭐 해?”
“혹시 나와 자는 게 불편하다면, 윈스톤이나 휴마누스에게 잠자리를 바꿔달라고 하겠다.”
세르펜스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자신의 존재가 내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저러는 모양이다.
순간 윈스톤이 조금 원망스러워질 뻔했다.
하지만 윈스톤은 그저 직언했을 뿐. 그도 나 못지않게 세르펜스를 위하는 사람이었으니 떠오른 원망을 곧바로 털어냈다.
“이상한 소리 말고 얼른 들어오기나 해.”
“그래도 되겠는가?”
“난 세르펜스 네가 보이지 않는 게 더 불안해.”
“그렇다면야···.”
세르펜스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천막 안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곧장 내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녀석은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본인의 소심함을 내게 재확인시켜주었다.
“어휴! 그런 짓 안 해도 너 소심펜스인 거 다 알거든?”
내 한숨 소리에 놀랐는지, 세르펜스가 흠칫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종종걸음으로 쪼르르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모습을 보고 대체 누가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윈스톤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거야.”
“선우가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윈스톤 경의 말에 틀린 건 없다.”
“세르펜스. 너까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
“나라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녀석의 말에 인상이 찡그려졌다. 또 자책하는 건가 싶어서.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걸까?
세르펜스가 침대에 걸터앉고는 비밀 얘기라도 꺼내듯,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백부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인지 잘 알지만···. 나는 이따금 그분을 보며 전대 공작의 모습을 떠올려 버리곤 한다. 백부님의 특정 행동이 그런 기억을 불러오는 게 아니다. 그냥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올라 버리고 마는 거다.”
침대에 널브러진 자세로 대충 흘려 들어도 좋을 얘기가 아니다.
나는 녀석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자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따금이라는 건, 예전에만 그런 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도 그랬다는 거지?”
“그러하다.”
“이제까지 그런 말은 없었잖아.”
“말한다고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은가. 선우가 그 두려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적의 말을 알려주기도 했고.”
어째서 말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자, 세르펜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기적의 말?”
“나를 묶어둘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의 의지뿐이니. 더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던 그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용기를 가져다주었는지, 선우는 아마 모를 거다.”
세르펜스의 얘기에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한 말이 녀석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게 뿌듯하고, 그걸 기적이라 칭하는 녀석의 말에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그것을 눌러 가라앉힐 수 있게 된 녀석의 성장이 무척이나 기뻤다.
“아무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선우가 나를 보며 2회차의 나와 있었던 일을 떠올려 버린다 해도, 그게 선우의 잘못은 아니라는 거다.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만, 서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들떴던 기분이 한순간에 고꾸라지고 울적함이 찾아왔다.
이런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세르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하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윈스톤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선우에게 검을 휘두르라고 지시하는 건 괴로운 기억만 되새기게 할 뿐이다. 그러니 계속 검을 배울 생각이라면 앞으로도 윈스톤 경에게 도움을 받도록 해라. 나는 선우의 시선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겠다.”
“난 예전에 세르펜스 네게 검술을 배우는 것도 재밌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장은 여러모로 어려울 듯하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선우가 두려운 기억을 완전히 이겨낸 후. 그리고 생존이 아닌 취미로 검술을 익힐 수 있는 시기가 찾아오면, 그때 다시 함께해 보는 게 어떨까 한다.”
세르펜스가 먼 훗날 평화가 도래했을 때를 기약했다.
이 녀석과 다시 추억의 놀이를 함께하기 위해서라도,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내가 세니어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때.
“아, 참.”
세르펜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건가 싶어 쳐다보니 녀석이 손날을 세워 제 입가로 가져다 댔다.
아주 중요하고도 비밀스러운 얘기를 할 생각인가 보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녀석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내가 백부님을 보며 그 사람을 떠올렸다는 건, 그분께는 비밀이다.”
중요한 얘기도 맞고 비밀 얘기도 맞는데, 너무 당연한 거라서 김이 샜다.
일순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지 마라. 지금 나는 매우 진지하다.”
“기특해서 그래, 기특해서. 세르펜스가 그걸 비밀로 하자고 말한 건 에일리히 님을 배려해서 그런 거잖아?”
“그렇다, 나는 매우 기특하다. 그러니 머리를 쓰다듬어도 좋다.”
효도펜스가 오늘도 재롱을 부리며 내 기분을 풀어주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기특하여, 마음 같아서는 녀석을 번쩍 들어 올리고 한 바퀴 빙 돌고 싶다.
애들이 그거 진짜 좋아하는데.
내 근력이 부족하다는 게 오늘만큼 한스러울 수가 없다.
“···윈스톤이나 휴마누스에게 부탁해 볼까?”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몰라도, 남의 손을 빌릴 것 없이 그냥 머리만 쓰다듬어 줘도 충분하다.”
내 중얼거림 속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세르펜스가 정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