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3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33화(933/1105)
< 90. 공작님과 마인들 (19) >
“혹시 휴마누스는 뭔가 의심스러운 점을 느낀 겁니까? 그래서 폭주 마인을 곧바로 처치한 거예요?”
휴마누스는 정의롭고 심지가 굳건한 인물이며 동시에 정에 약하고 무른 구석이 있었다.
그런 그가 어린 소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폭주 마인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이제껏 보아온 그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하니 휴마눈새가 소년의 수상함을 눈치채고 그리 행동했을 리는 없겠지만.
명색에 성검의 주인이니 희미한 흑마력의 기운이라도 감지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는 휴마누스의 성격과 크게 어긋난 대답이 돌아온 건 아니었다.
“어차피 마인이 된 자를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리는 방법 따윈 없잖아. 시간을 끌어 봤자 저 소년에겐 희망 고문밖에 되지 못하고, 저 사람은 폭주하는 마기로 괴로워하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야. 내 소중한 친우인 세르펜스가 부당하게 원망받는 걸 두고 보고 싶지도 않았고. 차라리 내가 원망받고 말지.”
휴마누스가 소년과 폭주 마인의 시체, 그리고 세르펜스를 차례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휴마누스는 생각이 깊었고, 내가 아는 대로 정의롭고 선량했다.
룩스메아는 트롤짓이나 일삼는 무능한 존재지만 딱 하나. 휴마누스를 성검의 주인으로 택한 것만큼은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1회차 황제누스가 먼저 하겠다고 나서 준 덕분이니 얻어걸린 꼴이지만 말이다.
“근데 저 소년은 진짜 악숭이야?”
“정황상 그럴 확률이 높기는 한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속단하기에 이르긴 합니다.”
민숭이에 남녀노소란 없다.
저 소년이 민숭이라는 가정하에 추론해 보자면, 아버지를 따라 부자가 함께 악숭의 길에 들어섰을 수도 있고.
사실 저 소년은 연기력이 뛰어나서 발탁되었을 뿐.
악숭이가 납치하여 세뇌 시켰거나 어디서 주워다 기른 천애고아로, 지금은 목이 떨어져 나간 폭주 마인과 생판 남일 수도 있다.
반대로 무고한 민간인 소년이라면.
악숭 세력이 퍼트린 소문을 진짜로 믿었고, 원래 말을 또박또박 잘 하며, 관찰력과 상황 파악 능력이 특출난 것뿐이겠지.
소년이 민숭이인지 민간인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하기엔 우리는 너무 바빴다.
“설마 쟤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질문을 던져가며 악숭이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시간 없다는 건 저도 압니다.”
푸로르의 말에 나는 염려 붙들어 매라고 답한 뒤, 멀찍이 서 있던 기사 하나를 불렀다.
내게 지목당한 기사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서둘러 달려왔다.
성기사도 아니고 그냥 이곳 영지에 속한 기사일 터이니, 신의 사자의 명을 받들어 모시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서두른 건 아닐 테다.
그냥 성검의 주인 일행 중 하나가 부르니까 온 거겠지.
혹은 빨리 소년을 인계받아, 갈 길이 바쁜 우리를 어서 보내 주려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인 걸 수도 있고.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다.
“저 소년은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니까 교단에 신변을 넘겨 조사해 주세요. 아직 확실한 건 없는 데다가, 어리니까 너무 험하게 대하지는 말고요.”
“예, 알겠습니다.”
기사가 병사들과 함께 소년을 제압하여 신전으로 향했다.
다른 순찰대 하나가 폭주 마인의 시신을 수습했다. 휴마누스는 자리를 뜨기 전, 폭주 마인의 시신에 남은 마기를 정화한 뒤 우리와 합류했다.
에드나의 말에 따르자면, 소년에게 걸어 둔 침묵 마법은 약 10분가량 더 유지될 거라고 했다.
변명 한마디 못 하게 어린애의 입을 막아 놓고, 우리끼리 악숭이니 함정이니 하는 얘기를 주고받은 게 다소 껄끄럽긴 했지만.
동네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우리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휴마누스와 세르펜스의 악담을 퍼붓는 걸,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베리타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민가 주변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
도시를 떠나 말에 올라 한참 달리던 도중, 유지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빠르게 이동하는 와중에도 목소리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선두로 달리는 세르펜스가 앞에 쐐기 모양의 결계를 펼쳐, 맞바람을 흘려보내고 있는 덕분이다.
‘안 그랬다면 맞바람이 입에 들어가서, 말하는 것도 힘들었을 거야.’
악마가 우리 쪽으로 찾아올 수도 있으니 신성력을 아끼는 게 좋지 않느냐 말했더니, 소모하는 것보다 회복하는 양이 더 많아서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다.
공기 저항이 줄어드니 이동 속도 증가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어젯밤 소환된 악마에 관한 정보나 전황에 관하여 주기적으로 보고 받으려면, 신전이 있는 도시를 거쳐가는 게 낫지 않아?”
“그건 포기해야겠죠.”
“음···, 혹시 아까 같은 일이 또 생길까 봐 그래?”
휴마누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모처럼 눈치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유지스는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이 정답임을 인정했다.
“네. 악숭 세력의 관점에서는 시간을 끌 수 있는 데다가, 싸우기도 전에 세르펜스의 신성력과 정신력을 소모시킬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잖아요.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세르펜스가 나선다면 그렇게 될 거라는 얘기고, 방금처럼 나서지 않는다면···.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기 위한 근거를 갖추는 셈이니, 어느 쪽이든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죠.”
조곤조곤 설명하는 유지스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으나 그 내용만큼은 듣기 싫었다.
내심 그러지 않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나 타인의 말을 통해 구체화되어 귀에 들려오니 정말 최악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휴마누스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에드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진짜 조, 아니, 뭣같이 싸우네···!”
“에드나, 그런 욕은 상대에게 칭찬이 될 수 있으니까 삼가는 게 좋아요.”
“욕이 왜 칭찬이 되죠?”
게임에서 상대 플레이어에게 더럽고 치사하게 싸운다고 욕하는 것은 곧, ‘네 컨트롤은 감히 내가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섬세하며, 스킬과 여러 시스템을 활용하는 능력 또한 매우 우수하구나!’라는 뜻을 줄여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사실을 에드나가 알 리 만무했고 따라서 내 말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선우 씨는 적에게 욕을 들으면 칭찬을 들은 것처럼 기뻐요?”
“늘 그런 건 아닌데, 상황과 욕의 내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시구나···.”
너무 솔직했던 탓일까?
뭔가 오해를 산 것 같다.
* * *
가뜩이나 악마가 하나 더 소환되어 서둘러야 하는 판국에, 최단 경로상에 도시가 있으면 빙 돌아가느라 이동 거리까지 늘었다.
우리는 늘어난 이동 거리를 만회하고자 수면 시간을 줄여,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잠을 청했다.
식사도 샌드위치나 브리또, 토스트 따위로 말 위에서 대충 해결했다. 간식도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작은 쿠키나 초콜릿 등으로 때웠다.
혹사당하는 말들에겐 미안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말들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푹 쉴 수나 있지···.’
일행들은 곧바로 전투에 돌입해야 한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셋이나 되는 악마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베리타 영지까지 반나절 거리를 남겨두고 천막을 꺼내어 펼쳤다.
고작 하룻밤 푹 잔다고 해서 모든 피로를 떨쳐낼 수는 없겠지만.
심지어 악마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돌아가며 불침번까지 서야겠지만.
나를 제외하면 다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실력자였으니, 신성력의 도움이 더해지면 전력을 끌어내는 데 모자람은 없을 테다.
‘요 며칠간은 수련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으니까 이길 수 있겠···지? 휴마누스는 무려 각성을 한 데다가, 타락펜스가 왔다간 이후 세르펜스도 뭔가 엄청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고···.’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내일 있을 전투에 관해 생각했다.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고 회로를 돌리려 노력해 보았으나, 가슴에 묵직하게 얹힌 불안감은 가실 줄 몰랐다.
그도 그러할 게 악마가 무려 셋이나 되지 않은가.
쌍둥이 악마는 고작 중급에 불과했는데도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를 압도했다.
내일 싸워야 하는 악마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하나 이상은 상급 혹은 최상급일 터였다.
진짜 미칠 듯이 불안했다.
또다시 세르펜스가 성검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올까 봐.
‘심지어 이번에는 보는 눈도 많을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세르펜스가 성검을 다시 잡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녀석이 성검을 잡고 가공할 무위를 떨치면, 사람들은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휴마누스와 세르펜스 모두 온갖 비난에 시달릴 게 뻔하다.
휴마누스는 주제도 모르고 성검을 차지했다는 말을 들을 테고, 세르펜스는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 비겁자 소리를 듣게 될 터.
‘아니, 그냥 비난 정도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지.’
이제껏 대륙이 입은 피해를 몽땅 두 사람 탓으로 돌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세르펜스가 성검을 잡았으면 없었을 피해라고 억지 주장을 펼치면서 말이다.
룩스메아도 덩달아 욕을 먹을 터이나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다.
물론 사람들의 신앙심이 흔들려서 좋을 건 없으니 아예 신경을 끌 수는 없지만.
지금은 곁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저 멀리 있는 룩스메아의 걱정까지 할 여유가 없다.
“많이 불안한가 보군.”
세르펜스가 이불 위로 내 몸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안 자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녀석에게서 등 돌려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거늘. 역시나 들켜버린 모양이다.
“악마들과의 거리가 꽤 가까워졌잖아. 혹시 놈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어?”
“그렇지 않아도 내일 가면서 얘기할 생각이긴 했다.”
“파악했다는 뜻이구나. 그래서 얼마나 쎈데?”
“중급 둘에 상급 하나다.”
하나쯤은 하급이어도 되는데.
중급이 둘이라니, 자연스레 쌍둥이 악마와의 전투가 떠올랐다. 꼬리를 물듯 세르펜스가 처음으로 성검을 잡던 모습도 연이어 떠올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괜찮을 거다.”
다정한 세르펜스의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돌았다.
싸우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내가 믿어줘야 이 녀석도 힘을 내서 싸울 수 있을 텐데.
그러한 생각에 나는 애써 희망찬 말을 꺼내 보았다.
“응, 그렇겠지···. 저번이랑 다르게 마법사들과 여러 국가에서 동원된 기사들이랑, 교단 소속 성기사가 우리와 같이 싸워 줄 테니까. 아 참, 이단 심문관들도 파견됐다고 했지? 진짜 든든하네! 다 같이 힘을 합치면 악마 셋쯤이야 거뜬히 해치울 수 있을 거야, 분명히. 게다가 최상급이 아니라 그냥 상급인 게 어디야?”
“그래, 선우도 잘 알고 있군.”
내 말이 무조건 옳다는 듯, 세르펜스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동조했다.
기분이 살짝 나아진 것 같다.
“···아도르, 성검 잡으면 안 돼.”
“건드리지도 않겠다.”
“하지만 위험하면···. 아니다, 그땐 그냥 도망쳐서 후일을 기약하자. 차라리 그게 낫지. 욕은 좀 먹겠지만, 일단 살고는 봐야 할 거 아냐?”
“꼭 그리하겠다.”
“약속 지켜. 어기면 앞으로 1년 동안 간식으로 매콤한 시즈닝을 뿌린 감자 튀김만 줄 거야.”
“으음···, 반드시 지켜야겠군.”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진심으로 쫀 것 같아서 괜스레 킥킥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