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3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34화(934/1105)
< 91. 공작님과 세 악마 (1) >
마탑은 베리타 영지가 가까워졌다는 걸 알려주는 이정표나 다름이 없었다.
하나 마탑은 이미 무너져 버렸다고 했다.
분명 와 봤던 길이건만. 멀리서도 보이던 첨예한 탑의 지붕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거리를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하고 무너진 성벽을 마주해야만 했다.
“미리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성벽의 잔해를 보는 것만으로도 치열하게 혹은 처절하게 저항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버리고 물러나야 했을 이들의 좌절이 느껴졌다.
베리타 영지를 감싼 성벽이 무너진 건 마탑이 무너진 시기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마탑이 세워진 도시이니만큼 그들의 도움을 받기 쉬운지라, 성벽에는 이런저런 마법이 잔뜩 걸려 있었으리라.
하지만 세상 모든 만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결국 성벽은 무너졌고, 영주는 영지 내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자신의 성보다 훨씬 더 안전한 곳.
즉, 마탑으로 영지민들을 피난케 했다고 한다.
교단과 이웃 왕국에서 지원 온 병력들도 그 피난을 도왔다고 들었다.
‘비록 마탑 측과 사전에 약속한 사항은 아니었다지만···.’
에드나는 그 얘기를 듣고 영주가 몹시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마법사들에게 마탑은 지식의 보고(寶庫)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몇몇 오만한 마법사들은 마탑 내부도 아닌, 마탑 부지조차 일반인의 발길이 닿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다닌다나?
하지만 갑작스레 밀려드는 피난 행렬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그것도 무려 교단 측 성직자들과 여러 국가에서 온 지원군 앞에서.
마탑이 아무리 강한 무력 단체라고 한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없다.
심지어 성직자 중에서는 이단 심문관들도 여럿 있었고, 악마를 막아내는 실질적 주역은 바로 그들이었다.
마법사들끼리 회의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 의견을 피력할 시간도, 다른 대피처를 궁리하고 제안할 시간도 없다.
그 덕에 마탑주는 자의적 판단으로 부속 건물 몇 채를 대피소로 내어 주었다는데, 어쩌면 마탑주 개인이랑은 사전에 얘기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임시 대피소가 결정되었다.
마법사 중에 불만을 품은 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거기까진 보고받은 바가 없다.
그러나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어떤 자들이던가?
지금도 젊고 어린 편이지만, 예전에는 훨씬 더 어렸을 여자애 둘을 따돌린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무지하게 불평했을 게 너무나도 뻔하다.
‘그나저나 살아남은 게 고작 건물 몇 채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뿐이라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거지?’
세르펜스에게 물어보면 바로 대략적인 수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성벽이 무너지고 난 뒤로는 마탑 부지를 중심으로 제2의 수성전을 벌였다던데.
마탑이 무너진 지 며칠이나 지난 현재 남아있는 인원은 얼마나 될까.
“여, 여러분. 이, 이이···쪽입니다···.”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망연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수룩한 그 말투에 혹시나 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테일러 이단 심문관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꾀죄죄하고 수척해진 모습이다.
타락펜스가 나를 납치하는 바람에 제대로 작별 인사조차 못 하고 헤어졌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보통 반가운 게 아니다.
“와! 오랜만입니다, 테일러 님!”
“쉬, 쉬잇···. 들키면 아, 악마들이 몰려올 수도 있, 있어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성검이 여기 있으니 악마들은 진작에 저희 위치를 눈치챘을 테니까요.”
“어, 엄청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내가 휴마누스의 허리춤에 걸린 성검을 눈짓하며 말하자, 테일러의 낯빛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본의 아니게 그를 겁주고 말았다.
“어차피 우리는 악마를 잡으러 왔는데, 악마가 이쪽으로 오나 우리가 악마 쪽으로 가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 그렇네요. 음, 음. 제가 모, 몰래 비밀 통로를 오가며, 내부 사정을 전달하거나. 바, 바깥의 상황을 전달받는 역을 마, 맡아서요···. 그게, 음, 그러니까···.”
“몰래 다니는 게 익숙해졌다는 뜻이죠?”
“네, 네에···!”
테일러가 자신도 그 말을 하고 싶었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곳에 와 있는 적은 악마들뿐만이 아니다. 악숭이들도 나서서 마탑 주변을 에워싸며 생존자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고립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소식들을 들을 수 있었던 건, 모두 테일러 덕분이다.
그는 단검을 주 무기로 쓰는 이단 심문관으로 잠입과 정보 수집에 특화되어 있었다.
악마와 악숭이들 몰래 영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이단 심문관 중에서도 테일러와 칼립스, 사지타 정도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여기서 언급한 사지타 이단 심문관은 유지스의 변장 모습이 아니라, 진짜 사지타 이단 심문관을 말하는 거다.
실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테일러와 함께 오막살이 생활을 하며 그에게서 언뜻 들은 바가 있다.
쓰는 무기는 다르지만, 사지타 이단 심문관과 자신은 주요 업무 및 특기가 비슷하다고 말이다.
칼립스야 원래 이단 심문관 가운데 최강이자 만능 포지션이니 당연히 잘하겠지.
“일단 이동할까요? 현재 상황에 관한 건 가면서 듣겠습니다.”
“잠깐만. 비밀 통로를 통해 가는 겁니까?”
휴마누스가 어서 가자고 말하는 내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한 뒤, 테일러를 향해 물었다.
테일러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고 묻는 듯이 눈을 끔벅거렸다.
“네, 네···. 영주성 후문과 이어진 통로인데 거, 거기서 조금만 가면 마탑 부속 건물 중 하나랑 연, 연결된 통로가 또 나와요. 음, 음. 뭐라더라? 토, 통로를 알려 준 마법사가 그러는데, 옛날 자기 동기가 연구비 일부를 빼돌려 뭔가 마, 만들고. 그곳을 통해 빠져나가서 몰래 내다 팔았다고···. 아! 근데 그 횡령한 마법사는 그, 쫓겨났다고 했었어요. 네. 근데 그 통로는 남았다고···.”
영주성에는 비밀 통로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아니, 이젠 그냥 성에 비밀 통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지경이다.
하지만 마탑 쪽은 어찌 된 영문인가 했더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과연 횡령한 게 쫓겨난 마법사뿐일까? 그 이후로 새로운 횡령 마법사가 생겨난 건 아닐까?
자신이 횡령하기 위해 만들어 놓고 동기에게 뒤집어씌웠을 수도 있지 않나?
처음부터 그 동기란 사람이 가상의 존재일 가능성은?
그런 게 아니라면 통로를 왜 메꾸지 않고 냅둔 거지?
의심이 이어지긴 했지만,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애초에 내 돈이 빠져나가는 게 아니기도 하고.
연구비로 뒷돈을 챙긴 마법사가 있든 없든 마탑은 이제 빈털터리 신세다.
탑이 무너지며 중요한 연구 자료는 물론이거니와, 값비싼 실험 기구 및 각종 재료와 완성품 등이 모두 망가졌을 테니까.
그전에 마법사 중 누군가의 주머니가 두둑해졌다면 오히려 다행이 아닐까?
“나는 그냥 날아서 바로 악마들과 싸우러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내가 같이 가면 악마가 우리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게 되잖아. 어쩌면 통로를 무너뜨려 그대로 매장시키려 들지도 몰라.”
“그래도 휴마누스 혼자서는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괜찮을 거야. 이단 심문관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악마를 상대로 맞서 싸우고 있다니까.”
악마와의 전투를 앞두고, 다시 용사의 무구 세트를 착용한 휴마누스가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제법 다부져서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걱정을 완전히 불식시키기에는 악마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향했다.
휴마누스와 같이 가 줄 수 있는 건. 그리고 그와 함께 싸울 수 있는 건 녀석 뿐이었으니까.
세르펜스를 딸려 보내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같이 가라고 말하려고 하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녀석이 내 시선 밖에서 성검을 든 휴마누스와 함께 악마 셋과 싸운다?
벌써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런 내 심정을 읽었는지 세르펜스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까지는 문제없이 비밀 통로를 사용했다고는 하나, 오늘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이 정도 인원이 함께 이동하다 보면 들킬 위험도 커지겠지. 그리고···, 음. 아니다. 좌우간 이단 심문관님이 한 분 동행한다고는 하나 근접전 위주로 싸우는 분은 아니시고, 통로 안에서는 마법사들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터이니. 악마를 마주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거다. 그러니 내가 함께 가는 것이 안전하다.”
단순히 나와 함께 가려고 즉석에서 명분을 떠올린 건 아닌 것 같다.
테일러를 봐서 차마 말하지 못한 듯하나, 녀석은 이미 비밀 통로가 들통 났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악마가 테일러의 행동을 예의주시해서 알아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악숭이들이 그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무슨 방법으로든 간에 비밀 통로를 내버려 뒀다가, 우리가 그곳에 발을 들였을 때 휴마누스의 말대로 통로를 무너뜨릴 작정인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면 아예 통로 안을 전장으로 삼으려 할지도 모른다.
주요 전력인 마법사 둘을 반쯤 묶어놓고 시작하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데다가, 다른 일행들도 통로가 무너질까 봐 전력을 다하지 못할 테니까.
‘이 당연한 걸 왜 세르펜스가 말할 때까지 떠올리지 못했지?’
녀석을 떼어놔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앞서, 미처 다른 데까지 생각의 가지를 뻗지 못했나 보다.
대놓고 불안하다 티를 낸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자리 잡으며 마음이 편해졌다.
“세르펜스, 모두를 잘 부탁해. 그럼 난 먼저 전장에 합류할 테니까 이따 봐.”
휴마누스가 오랜만에 성검을 뽑아들고 황금빛 날개를 펼쳐 하늘로 솟구쳤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고는 하나, 이곳의 병력은 어찌어찌 악마들과 악숭이들을 상대로 버티고 있었다.
거기에 성검의 주인이라는 막강한 패가 등장한 셈이니 위험한 일은 없겠···지. 아마도.
하지만 기왕이면 빨리 합류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건 말해 봐야 입만 아픈 이야기다.
우리는 테일러의 안내를 받아 서둘러 비밀 통로에 진입했다.
꽤 오래 방치됐는지 통로 내부는 더럽고 이끼까지 끼어있었다.
최근에는 테일러가 자주 오간 모양이기는 하나, 이단 심문관인 그가 영주성 비밀 통로를 청소하는 건 영 이상하다.
애초에 한가롭게 청소 따위를 하고 있을 때도 아니고.
무의식중에 벽을 짚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는 테일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지금 전황은 좀 어때요?”
“아, 그게, 음, 음···.”
테일러가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그 낯빛만 봐도 알겠다. 엄청 안 좋은가 보다.
좋다 안 좋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
나는 질문을 바꿔서 다시 물었고 테일러가 제대로 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일단 이단 심문관들이 앞장서서, 악마들을 붙들어 놓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 있는데···. 그게 잘 안 돼요. 하나는 막 공간을 가르면서 이동해서, 갑자기 기사들이나 마법사들 사이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또 하나는 그, 정신에 간섭해서 공포심을 자극한다거나 허, 허상 같은 걸 보여 주는데···. 신성력을 보유한 성직자나 어, 어느 정도 강한 마법사랑 기사한테는 아주 야, 약간 영향을 미치고. 그보다 약하면···.”
테일러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정녕 내가 따라가도 괜찮은 건지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냥 혼자 여기에 자리 깔고 앉아 있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