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3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35화(935/1105)
< 91. 공작님과 세 악마 (2) >
타의에 의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다.
더욱이 나는 타락펜스의 신성력 장난질 때문에 특히나 그러했다.
늘 내 안전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세르펜스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뻔했다.
“그게 가장 최근에 소환된 악마의 능력입니까?”
그렇게 질문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자못 스산함이 묻어났다.
만약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의 악마가 이전에 소환된 존재라면, 미리 보고하지 않은 테일러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기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테일러가 보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교단 측에서 정보를 누락한 거라 해도, 눈앞의 테일러에게 연대 책임을 씌울 것 같다.
서스펜스하다 못해 살기등등한 녀석의 모습에도 테일러는 겁먹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원래 주눅 든 표정에 말까지 더듬는 사람이라, 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구별이 안 되었다.
“노, 놈이 그러한 능력을 쓰기 시작한 건 어, 얼마 전입니다. 음, 음. 아마도 시온 님이 미리 경계하고 이곳에 오시지, 아, 않으실까 봐···. 그래서 의, 의도적으로 최근까지 힘을 숨긴 것 같, 같아요.”
역시나. 무능메아와 달리 일 잘하는 교단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지.
모든 문제는 악마에게 있었다. 악마가 죽일 놈이고 나쁜 새끼다.
교단과 테일러에 대한 신뢰는 되찾았지만, 걱정은 오히려 더 커졌다.
테일러의 얘기대로라면···.
“그거, 악마가 시온을 노릴 거라는 뜻이잖아요?!”
유지스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좁은 통로 벽에 부딪힌 그녀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테일러가 검지를 제 입 앞에 가져다 대며 유지스를 향해 ‘쉬, 쉬잇···.’ 하고 말했고, 유지스가 뒤늦게 제 입을 틀어막고는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 그래도 다행인 게···. 신성 결계 안에 있으면 아, 악마의 마기가 닿지 않아서 괜, 괜찮아요. 고위 성직자의 추, 축복을 바드, 받으면. 결계 밖에서도 그럭저럭 버, 버틸 수 있고···. 그, 부여된 신성력이 바닥날 때까지···.”
테일러의 설명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게다가 아공간 주머니에는 세르펜스가 만들어둔 성수도···.
“아, 맞다.”
나는 세르펜스의 품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혹시 전투 중 필요한 물건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이미 옷 안 곳곳에 꺼내기 쉽게 챙겨 뒀다는 답을 들었다.
성수가 한가득 들어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겉옷 안주머니 깊숙이 넣어두자, 든든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차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신성 결계를 펼치고 축복도 걸어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이 비밀 통로가 발각당할 것 같으니 일단은 참겠다.”
“옳지, 옳지. 참는 것도 잘하고 아주 기특해.”
“그래도 혹여 이상한 기분이 들면 숨기지 말고 바로 말해라. 곧바로 신성력을 써 줄 터이니.”
평소라면 내 우쭈쭈를 즐기며 헤실헤실 웃었을 테지만, 지금은 내 안전이 위협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한 까닭에 세르펜스는 좀처럼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나는 장난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진지하게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안 숨겨, 걱정하지 마.”
“그렇다면 됐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인다는 듯 세르펜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녀석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 나는 다시 시선을 테일러에게로 옮겼다.
아직 그에게서 들어야 할 설명이 남았다.
“가장 최근에 소환된 악마의 능력은 뭡니까?”
며칠 전 악마가 소환되었던 날 이후로 우리는 도시는커녕 작은 마을조차 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악마에 관한 정보가 전무했다.
게다가 현재 전황에 관해서도 듣다 말았으니 그것도 마저 들어야 한다.
“그림자, 그림자로 된 군단을 불러요.”
“엥? 그림자 군단이면 쓰레기오잖아? 걔가 소환됐어요?”
“쓰, 레기요···? 아시는 악마입니까?”
“아는 사이는 아니고, 그냥 능력에 관한 정보만 들었습니다. 고향 친구···라고 해야 하나, 아는 사람? 아무튼 그런 자가 얘기해 줘서···.”
레기오에 관한 정보를 준 건 [성검의 주인]이란 소설이고, 그걸 쓴 솔레르티아는 이 세상 사람임과 동시에 내가 살던 세상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 나는 그녀를 친구라 생각했었으니, ‘고향 사람+친구’라는 의미로 고향 친구라고 줄여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
나는 밀려드는 씁쓸함을 지워내고자, 사고를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레기오는 그림자 군단을 마구 찍어내어, 독자들에게 ‘무한 쫄 생성기’라는 악명을 얻었던 악마다.
하지만 무한 쫄 생성으로 독자들에게 막막함과 긴장감을 안겨주었던 초반 전투와 달리.
정작 본체 쪽은 상급 악마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하다는 게 밝혀진 후, 레기오를 부르는 독자들의 호칭은 ‘쓰레기오’로 변모했다.
고작 이름 앞에 ‘쓰’를 붙였을 뿐이건만.
무려 베댓의 성취감을 안겨주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조금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테일러의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얘기가 나오자 유쾌함은 당혹에 잡아먹혔다.
“아아···, 동료 처, 천사님에게 들으셨구나···.”
“그 얘기는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저번에 만났을 땐 모르는 것 같았는데···?”
“어, 얼마 전에 합류하신 레, 레베카 님께서···. 아마도 그런 것 같다고 하, 하시니까 웨일리안 님께서 마, 맞다고 하셔서···. 음, 음. 그치만 이곳에 모인 이단 심문관들끼리만, 나, 나눈 대화니까···. 거,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성, 성직자들에겐 마, 말 안 했어요. 웨일리안 님이 아, 앞으로는 함부로 그런 얘기 하, 하지 말라고 입단속도 하셨고···.”
레베카는 기차에서 보았던 무임승차 이단 심문관의 이름이다.
우리보다 늦게 오거나 아예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먼저 도착했나 보다.
하기야 그녀는 악숭 세력의 주시를 받지 않으니, 악숭 세력에게 발목 잡히는 일 없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을 터였다.
더군다나 필요한 말도 한 필뿐이고 민가도 마음대로 들를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의 컨디션을 고려하지 않고 밤낮없이 달린 뒤, 마을에 방문할 때마다 말을 교체하기도 쉬웠겠지.
“그런데 웨일리안 님은 누군데 그걸 알고 확인시켜 준 겁니까?”
“모르세요? 그럴 리가 없, 없는데? 바스툴 왕국에서 마, 만나셨다고···.”
“아! 칼립스 이단 심문관님의 이름이었구나.”
성직자 설정 놀이의 영향으로 그냥 ‘칼립스’라고만 기억하고 있어서 까먹었다.
웨일리안이라는 이름을 들은 건 딱 한 번, 그가 자기소개했을 때뿐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웨일리안 님께서 자, 자신만 이름으로 안 불러 주셨다고, 엄, 엄청 서운해하셨어요.”
이단 심문관들 여럿이 한자리에 모일 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 오랜만에 얼굴을 본 김에 수다라도 떨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별별 얘기를 다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그들을 부르는 호칭은 어쩌다 주제에 오른 건지 모르겠다.
황당하긴 했으나 일단 변명은 해야 하겠지.
“어, 그게···. 저기, 뭣이냐. ‘칼립스’라는 성을 받은 자는 이단 심문관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잖습니까? 슈테판 님도 그분께만 제가 천사라는 설정, 아니, 설명해 주신 것도 그래서일 테고요. 그러니까 성을 불리는 게 더 명예롭다고 여기실 줄 알았습니다. 한데 서운해하셨다니 만나면 꼭 이름으로 불러드려야겠네요.”
설마 이단 심문관 중 대빵이란 사람이 고작 이름 하나 안 불러줬다고 토라졌을 줄이야.
그 사람 나이도 꽤 먹지 않았나?
겉보기로 30대 중반 같았으니, 신성력 덕분에 노화가 늦게 진행된다는 걸 고려해도 최소 마흔 줄은 넘겼을 텐데.
하지만 50대 후반인 교황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집착했던 걸 떠올려 보면, 그리 이상한 건 아닌 듯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도리어 유치해지는 사람도 있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다.
이 주제에 관한 얘기는 그만하고 싶으니 말을 돌려야겠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소환된 상급 악마가 쓰레기오라니 다행입니다. 걔가 근접전에는 엄청 취약하다고 들었거든요.”
“아하···! 어, 어쩐지. 그 악마만 전면에 나, 나서지 않고 물러나 있는 게 이, 이상하다 싶었어요.”
테일러가 이해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보아, 상급 악마는 레기오가 맞는 모양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떠올랐다.
레기오는 대량 학살에 적합할지 몰라도, 소수의 강자를 상대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은 놈일 텐데.
‘악숭이들이 뭣도 모르고 소환한 거려나? 아니, 그놈들은 몰라도 마왕은 알고 있을 텐데. 심지어 약점이 노출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어째서 놈이 선발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괜한 불안감이 떠올랐다.
이미 소환된 중급 악마가 둘이나 있으니, 레기오만 추가되어도 우리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려나?
그래서 우리를 처치한 후 레기오의 그림자 군단으로 대륙을 쓸어버릴 생각인가?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은 우리부터 확실하게 처치하는 게 더 중요할 텐데?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테일러에게 전황 보고나 마저 듣기로 했다.
“아, 악마를 상대하는 것이니만큼, 타 국가에서 지원 온 벼, 병력은 전부 기사단 단위에요. 워, 원래 베리타 영지의 병사들이 이, 있기는 한데 많이 주, 죽었어요. 거의 안 남았어요. 반면에 그림자 군단은 계속, 계속 만들어지고···.”
상대가 머릿수로 밀어붙인다면 이쪽도 머릿수로 상대해야 한다.
아무리 병사보다 기사가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하다지만, 사람 한 명이 열 곳에서 새는 물을 동시에 막을 수는 없으니까.
소환된 악마가 레기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다행이라 여겼으나, 이곳에서 싸우는 이들에겐 악몽이었겠구나 싶다.
“그나마 여긴 마법사들이 마, 많아서 버틸 수 있, 있었는데···. 공간을 너, 넘나드는 악마가···. 그래서 수가 눈에 띄게 주, 줄었어요. 음, 음···. 여러분이 며칠만 더 늦으셨어도 아마···.”
테일러가 말끝을 흐리며 걸음 속도를 높였다.
우리는 말없이 그의 뒤를 쫓으며, 그에게서 남은 아군의 수와 악마와 함께 온 악숭이들에 관한 정보 따위를 들었다.
“여, 여기서부터는 더 조, 조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바, 바깥이라···. 다음 비밀 통로에 지, 진입할 때까지···.”
어느덧 통로의 끝에 도달했는지, 테일러가 우리에게 경고하며 출구를 열었다.
그 경고가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으리라.
무너진 성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처참한 풍경이 비밀 통로를 빠져나온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사방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가 널려 있었고 뼈만 남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저 뼈들은 아마 레기오가 소환되기 전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법숭이가 죽은 사람들로 해골 병사를 만든 흔적일 터였다.
평범한 시체는 남아있지 않은 거로 보아 나머지는 전부 제물로 바쳐진 거겠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농락당한 이들과 뼈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제물로 바쳐진 이들.
둘 중에 어느 쪽의 처치가 더 낫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평안을 기원할 수조차 없는 죽음의 흔적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