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3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37화(937/1105)
< 91. 공작님과 세 악마 (4) >
누군가의 기합 혹은 비명 소리와 사기를 북돋기 위한 필사의 외침,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마법에 의한 폭음 등.
온갖 소음이 끊이질 않던 전장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갑자기 적의 군단이 일시에 사라졌다.
매 순간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치열하게 싸우던 병사들이 무기를 든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개중에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거나 무기를 놓친 이들도 있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싸움에 끝이 찾아왔건만. 그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창백해진 얼굴로 절망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리라. 사라진 그림자 군단의 숫자가 우스울 정도로, 악마의 힘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극맹한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낸 악마의 위세에 겁먹은 걸 테다.
‘나야 강한 악마를 자주 봐 왔고, 세니어의 기운이 내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으며, 일행들이 나를 지켜줄 거라는 확고한 믿음 덕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지만···. 저들은 아니겠지.’
나는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고 계속 주위를 살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과 달리, 기사와 성직자와 마법사들은 긴장 가득한 얼굴로 무기를 움켜쥐었다.
그림자 군단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던 키 작은 드워프 전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똥짤막한 다리로 굳건히 대지를 디딘 모습이 퍽 듬직했다.
전장에 선 그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처럼 주변을 훑고 있었다.
본인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많은 이가 자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되새기려는 듯이.
“사, 상급···수준을 뛰, 뛰어넘은 것 같은데요? 이, 이 정도면 저번에 보았던 악마만큼···. 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양손에 단검을 쥔 테일러가 적의 수준을 가늠했다.
그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와 박혔다. 미간이 절로 찡그려지는 게 느껴졌다.
테일러가 언급한 ‘저번에 보았던 악마’라 함은 악숭 살롱의 악마를 지칭하는 것일 터.
타락펜스는 그 악마를 두고 ‘최상급에 근접한 수준’이라 말하였다.
한데 그놈보다 더 강하다는 건 레기오 놈이 최상급 악마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다리가 좀 후들거리는 것 같더라니. 경지의 벽을 넘고 안 넘고의 차이가 이렇게나 극명할 줄이야.
‘악숭 살롱 때도 그러더니, 저번부터 급수 밑장 빼기 꼼수 실화냐?’
레기오에게 원래 저런 능력이 있었다면 2회차에서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리가 없다. 독자들에게 쓰레기오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지도 않았을 테고.
놈의 경지가 한 단계 상승한 건 마왕이 강해져서일까?
아니면 계약자인 매국 마인 러스티가 사람들을 죽이며 악명을 떨쳐서일까?
기왕이면 후자이길 바란다.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
자신의 새로운 힘에 도취하기라도 한 듯 레기오가 광소를 터트렸다.
마기까지 담았는지 놈의 웃음소리가 넓은 전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자 세니어의 결계가 우웅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병사들이 휘청이며 피를 토하거나 코피를 쏟았다.
기사와 마법사, 성직자 중에서도 약한 축에 속하는 몇 명이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몇몇 사람들이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은.
갑자기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살려달라 비는 사람.
반대로 분별없이 사방팔방 무기를 휘두르며 모두 죽여버리겠다 날뛰는 사람.
몸을 웅크리며 자기만 살아남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
머리를 부여잡은 채 ‘이건 환상이야.’ 혹은 ‘나는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아···.’라며 끊임없이 뇌까리는 사람.
그런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조금 전 레기오의 웃음소리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겁을 먹어 마음에 틈이 생기자, 염소 머리 악마가 정신 간섭을 시도한 것이리라.
신관들이 무분별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우선으로 신성력을 쏟아 부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멀찍이서 신성력을 보내었기에 그 소모량이 배로 들겠지만, 신관들도 별수 없었겠지.
자칫 혼란에 빠진 아군의 공격에 다칠 위험이 있었고, 혼란에 빠진 이들이 넓은 전장에 고루 퍼져 있는지라 일일이 찾아가는 건 무리였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무기를 들어 올리십시오!!”
염소 머리 악마와 싸우던 이단 심문관 중 하나가 소리치며, 육중한 배틀 엑스를 휘둘렀다.
그를 필두로 다른 이단 심문관들과 성기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치켜들었다.
공간 도약 능력을 지닌 또 다른 중급 악마와 싸우던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소강상태가 끝나고 전투가 재개되었다.
그림자 군단이 싸우는 동안, 후방에서 편히 휴식을 취했을 검숭이들과 마인들이 전면에 나섰다.
법숭이들도 다시 흑마법을 펼쳤다.
정신 공격에 당하지 않은 아군 병력이 놈들을 상대했다.
교대를 위해 잠깐 쉬고 있던 인원들도 전부 전투에 합류했다.
그 덕분에 머릿수로 따지자면 아군의 수가 더 많았으나, 그중 태반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고 누적된 피로도의 차이가 너무 컸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듯싶다.
“나는 어느 쪽을 거들어야 하지···?”
본능적인 감이 뛰어난 푸로르조차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모든 전선에서 아군이 우위를 점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아군은 모두 지쳤고, 적은 너무 강했다.
두 마법사와 유지스, 테일러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니 그때그때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면 그만이었지만.
오직 근접전만 가능한 푸로르는 어느 한 곳을 골라야 했다.
“우선은 염소 머리 악마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
광범위로 악영향을 끼치는 데다가, 대놓고 나를 저격하고 소환한 듯한 염소 머리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표범 다리 악마가 이단 심문관과 성기사들이랑 싸우다 말고, 공간을 찢더니 그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그러더니 뜬금없는 장소에서 튀어나와 아군 병력을 공격하는데 그 피해가 심각했다.
“아니, 표범 다리를 한 악마가 공간 도약을 못 하게 묶어둬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응, 그래야겠다. 갑자기 여기로 이동해 와서 너를 공격하거나, 최상급 악마에게 힘을 보태면 큰일이니까.”
결정을 내렸는지 푸로르가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 악마 중, 어느 하나 만만한 놈이 없다.
물론 가장 큰 위협은 최상급의 경지에 도달한 악마 레기오다.
나는 놈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세르펜스와 휴마누스, 웨일리안이 대치를 끝내고 레기오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최상급 악마와 맞서 싸우는 세 사람 중, 유독 지쳐 보이는 이가 하나 있었다.
세니어의 버프를 받아 향상된 시력으로 웨일리안의 모습을 살피니, 그의 옷이 피와 땀으로 젖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전장에서 굴렀기 때문이리라.
레기오는 집요하게 웨일리안을 노렸다.
지치고 약해진 그를 재빨리 전투에서 배제한 다음에,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를 차근차근 짓밟으려는 계획이라도 짜 놓았나 보다.
최강의 이단 심문관임을 증명하는 ‘칼립스’라는 성을 이어받은 자답게, 웨일리안은 지친 몸뚱이로 악마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림자로 빚어낸 새까만 검이 일렁거릴 때마다, 웨일리안의 검에 깃든 신성력의 빛이 조금씩 약해졌다.
마치 그림자가 빛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듯한 광경이다.
웨일리안이 맞닿은 검을 떨어뜨리고자 뒤로 물러나거나 손목을 비틀거나 했지만, 레기오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웨일리안의 신성력을 소진시켰다.
황금빛 신성력을 머금은 성검이 레기오의 허리를 동강 낼 기세로 휘둘러지고 나서야, 놈은 검을 거두고 위로 솟구쳤다.
공중에 몸을 띄운 놈을 향해 세르펜스가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레기오는 그림자로 날개를 만들어 크게 펄럭이는 것으로 몸을 뒤로 물려, 세르펜스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다시 지면에 발을 붙이자마자, 레기오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세 사람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이 그린 궤적을 따라 생긴 초승달 모양의 잔영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휴마누스는 방패를 세워 그것을 막았고, 세르펜스는 몸을 띄워 피했으며, 웨일리안은 옆으로 몸을 날려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어차피 견제용으로 가볍게 던진 공격이라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할 줄 알았다는 듯.
레기오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떠오른 감정이라고는 단 하나, 의아함뿐이었다.
“왜 성검을 저 무능한 놈이 쓰고 있지? 그쪽, 프라시더스가 쓰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나?”
“성검의 선택을 받은 건 휴마누스입니다. 오직 그만이 성검을 다룰 수 있습니다.”
“내가 들은 거랑은 얘기가 다른데?”
“그쪽이 거짓말에 속은 거겠지.”
세르펜스가 레기오의 의문을 받아치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레기오는 그 검을 튕겨내며 웨일리안을 향해 손바닥이 보이도록 팔을 내뻗었다.
놈의 손바닥에서 그림자 구체라도 튀어나와 자신에게로 쏘아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웨일리안이 땅을 박차며 몸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악마 놈의 손동작은 속임수였다. 진짜 공격은 발밑에서 이루어졌다.
웨일리안뿐만이 아니라 세르펜스, 휴마누스까지.
투명한 유리처럼 모든 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이상. 사람이고 물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지닌 그림자 속에서 무수한 손이 튀어나와 세 사람의 몸을 붙들었다.
‘자기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공격을 대체 무슨 수로 피해?!’
세 사람은 전신에서 신성력을 내뿜으며 진득하게 들러붙는 그림자를 떨쳐냈다.
그러고 나서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는 곧바로 신성력 날개를 펼쳐 몸을 공중에 띄운 반면, 웨일리안은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어쩌면 웨일리안은 방금 그림자를 떼어내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신성력을 바닥까지 끌어다 쓴 걸지도 모르겠다.
“웨, 웨일리안 님은 그동안 최전방에 나서서 아, 악마와 싸우느라 신성력을 마, 많이 소모하셨을 거예요.”
테일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원거리, 그것도 암살 전문인 테일러가 교대를 해 봤자 큰 도움은 안 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지친 사람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테일러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신의 사자님의 겨, 곁을 지키라는 지시를 따로 받아서···.”
“누가 뭐래요? 그냥 쳐다봤을 뿐입니다.”
“네, 네에···.”
“근데 여긴 윈스톤이 있으니 가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저, 저는 신성 결계도 펼치고, 여차하면 치, 치료도 가능한데···.”
테일러가 특유의 소심한 어투로 자신이 윈스톤보다 고급 인력임을 주장했다.
신성력을 타고나지 못하여 오러를 쌓은 윈스톤이 서러워할 만한 얘기다.
설마하니 이단 심문관씩이나 되어서 악마와 싸우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이단 심문관도 일단은 사람이고 레기오는 최상급 악마이니만큼, 겁먹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르펜스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힘이 빠진 자신은 짐이 될 거라 여겼는지 웨일리안이 전장에서 이탈하려 했다.
하지만 레기오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를 보호하느라 휴마누스와 세르펜스의 움직임이 제한되었고, 이는 놈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제가 죽겠습니다!”
“진정해, 진정!”
원래 휴마누스는 성직자들에겐 기본적으로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웨일리안이 죽음을 불사하며 레기오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는지 반말을 써가며 그를 진정시키려 들었다.
저대로 두다간 줄초상 치르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테일러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결계를 펼치고 상처를 치료하는 건, 리에나도 할 수 있는데요?”
“그거야 그렇지만···.”
“슈테판 님이 자신의 명령보다 제 명령을 우선시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가, 갈까요?”
“가세요.”
“자, 잠깐···. 잠깐만요. 이, 이거라도···.”
느닷없이 테일러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세니어의 결계 안으로 팔을 쑥 집어넣었다.
말투는 못 미더워도 과연 이단 심문관은 이단 심문관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가 건넨 무언가를 받아들었다.
성인의 손목에 채우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짧은 팔찌였다.
“벼, 별건 아니지만, 제게 있어 부, 부적 같은 겁니다. 워, 원래라면 버리는 게 맞는데 그, 그냥 갖고 있어도 된다고 해서···.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전장으로 향하는 테일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 손바닥에 놓인 팔찌를 자세히 살폈다.
테일러라는 이름이 적힌 아기용 팔찌였다.
아무래도 그는 아기일 때 신전에 맡겨진 케이스였나 보다. 이 팔찌는 그때 그가 하고 있던 거겠지.
‘최상급 악마와 싸우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진짜 내가 걱정되어서 안 가려고 했던 거구나···?’
내가 오해했다는 걸 깨닫자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