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4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41화(941/1105)
< 91. 공작님과 세 악마 (8) >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들이밀어진 듯한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넋을 놓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세니어를 꼭 붙들었다.
‘진정하자. 아직 테일러가 죽은 건 아니니까. 심장이 있는 가슴도 아니고 복부잖아? 신성력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저 정도로 죽을 리는 없어.’
시선을 계속 하늘에 둔 채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테일러의 신성력 날개가 빛을 잃고 흩어지는 게 보였다.
세르펜스가 그런 테일러의 등을 한쪽 팔로 받치며 복부를 꿰뚫은 그림자 줄기를 없앴다.
휴마누스도 테일러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세르펜스가 무어라 말하자 방향을 돌렸다.
내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테일러의 치료는 자신에게 맡기고 악마를 처치하라고 말한 게 아닐까 한다.
놈이 그림자 갑주를 벗은 지금이 기회다.
이걸 놓치면 다시 한참 동안 드잡이질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는 동안 중급 악마와 싸우는 이들이 죽거나 다칠 위험이 올라간다.
그 사실을 휴마누스가 모를 리 없었다.
곧장 등을 돌려, [성검의 주인] 때와는 다른 이유로 쓰레기 같은 쓰레기오 놈에게로 향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할 수 있었던 건 세르펜스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리라.
녀석이 치료할 수 없는 상처라면, 룩스메아가 직접 나서서 기적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살릴 수 없을 테다.
세르펜스가 발산한 은빛 신성력이 테일러의 복부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최상급 악마와 맞서는 휴마누스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내가 아는 ‘휴마누스’는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하면서도, 제 한 몸은 능히 건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혼자서 최상급 악마를 상대하는 게 아니었다.
유지스와 에드나, 아니마가 그를 든든하게 지원해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휴마누스가 세르펜스를 믿고 악마와의 싸움에 집중한 것처럼.
나 또한 휴마누스를 믿고 테일러가 치료받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새하얀 이단 심문관의 옷을 붉게 물들이는 거로도 모자라, 뚝뚝 흘러내리던 피가 멎었다.
테일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피를 많이 쏟은 탓에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세르펜스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 날개를 펼치는 거로 보아 잘 회복된 모양이다.
나는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한껏 불안에 떨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다가, 급격히 안도감이 찾아오는 이 감각이 묘하게 익숙했다.
그 기시감을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쓰레기오는 그림자로 다시 무장을 갖추긴 했지만, 이전처럼 전신을 모두 가리는 형태의 갑주는 아니었다.
급소라 할만한 부위는 보호했으나 보호받지 못하는 부위가 훨씬 넓었다.
또한 급소가 아니라 하더라도, 전투 중 다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부위는 얼마든지 있다.
아니, 어느 부위든 심각한 부상을 당하면 싸우는 데 안 좋은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앉아서 손만 까딱거리는 게 아닌 이상, 모든 움직임은 여러 신체 부위의 연계로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그래도 지금은 비행 중이니까 다리는 다쳐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아닌가? 일단 다치면 고통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테니까 상관있나?’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휴마누스의 검술은 더 자유로워졌다.
원거리 담당 일행들의 지원을 받으며 어깨, 팔꿈치, 복부, 손목 등.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부위가 보이면 지체 없이 성검을 내질렀다. 때로는 방패를 휘두르기도 했다.
연거푸 쏟아내는 공격이 매끄럽게 연결되었다.
쓰레기오는 크게 다친 데다가 체력과 마기를 상당량 소모했다.
그런데도 최상급은 최상급이란 건지, 누적된 상처로 인해 비틀거리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휴마누스를 몰아세우는 건 아니었다.
휴마누스의 공격을 방어하며 간간이 반격을 시도했다.
누구도 우세하지 않은 비등비등한 싸움이다.
여기에 테일러의 치료를 마친 세르펜스가 재합류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쓰레기오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동료 악마들에게 소리쳤다.
“이 머저리들 같으니! 성검 일행에도 끼지 못한 하찮은 인간들을 상대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당장 떼어놓고 나를 도와라!”
“저희가 그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죽기라도 하면 계획이···!”
표범 다리 악마가 묘한 말을 내뱉었다.
쓰레기오와 함께 싸울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한 발언이다.
최근 세르펜스, 정확히는 타락펜스지만.
아무튼 그 녀석이 상급 악마를 가볍게 처치한 전적도 있으니, 중급 악마에 불과한 자신은 근처만 가도 곧바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렇다면 중급 악마들은 쓰레기오와 힘을 합쳐 우리 일행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소환되었다는 건가···? 놈들은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쓰레기오가 염소 머리 악마를 보호하는 듯 느껴졌던 건, 내 착각이나 확대 해석 같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매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세르펜스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는지, 쓰레기오가 아닌 중급 악마들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그럼 당장 죽을 각오로 계획을 실행해!”
쓰레기오가 몸에 두른 그림자를 다시 한 점에 그러모으며 소리쳤다.
놈은 그 상태로 휴마누스에게 등을 훤히 내보이면서까지, 세르펜스에게 그림자 줄기를 날려 녀석을 붙잡고자 했다.
세르펜스는 그 공격을 막아내느라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한 바를 이룬 대가로 쓰레기오의 등에 성검이 꽂혔다.
나는 놈의 최후를 눈에 담는 대신 ‘계획’을 진행 시킬 중급 악마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표범 다리 악마가 바로 지척에 접근한 푸로르를 무시하며 공간을 찢었다.
푸로르가 곰의 앞발 형태로 변한 팔을 휘둘러 놈을 공격했고, 제대로 적중했다.
녹색 기운을 두른 곰의 손톱이 악마의 팔을 반쯤 뜯어내다시피 잘랐다.
하지만 놈이 공간 너머로 몸을 날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크악!!”
공간 저편으로 사라진 놈의 비명이 들려온 건 염소 머리 악마가 있는 방향이었다.
한쪽 팔이 뜯긴 표범 다리 악마가 새까만 피를 뚝뚝 흘리며 그곳에 나타났다.
또다시 공간을 찢고, 멀쩡히 붙어있는 팔로 염소 머리 악마를 잡아서 그 안에 밀어 넣었다.
염소 머리 악마에게로 향하던 모든 공격이 표범 다리 악마의 몸에 박혔다.
“내, 내가 악마를 무찔렀다···!”
본래 상대하던 악마가 아니라, 다른 악마를 얼결에 해치운 자 중 하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잘 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내 앞에 시꺼먼 공간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니어가 펼친 결계 안쪽에 말이다.
“아니 왜?! 나 오늘은 도발 한 번 안 하고 진짜 얌전히 있었단 말야! 쓰레기오를 쓰레기오라고 부른 적조차 없는데···!”
내 억울함과는 무관하게 공간의 틈새를 비집고 염소 머리가 튀어나왔다.
악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다. 심지어 결계를 사이에 둔 것도 아니었다.
엄청난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혔다.
가로로 쭉 찢어진 동공을 마주한 순간, 미칠듯한 두려움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세니어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내 이성을 간신히 붙들어 주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당장 손에서 세니어를 놓고 싶어졌다.
어차피 내가 세니어를 휘둘러도 악마는 가볍게 막아내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막아내지 않아도 문제다.
‘아무리 악마라 해도 검을 찔러 넣을 때의 감각은 비슷비슷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세니어를 들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손 안에 든 무게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발치에서 댕그랑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나마 세니어를 쥐고 있었기에, 악마의 정신 간섭에 영향을 덜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덮쳐왔다.
“아, 흐으···, 아아···.”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고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억지로 힘을 주어 버티던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악마의 손이 점점 가까워지는데도 피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무섭고 두려웠다.
쉬면서 신성력을 회복한 웨일리안이 은빛 기운이 넘실거리는 검으로 악마의 목을 베었다.
거의 동시에 윈스톤의 대검이 악마의 허리를 동강 낸 걸 보면, 세니어의 결계도 사라진 모양이다.
하기야 악마가 결계 안에 들어와 있는데 그걸 계속 유지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
세니어를 놓쳤으니 버프가 사라졌음에도 그 모든 광경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지독하리만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솟구친 새까만 피가 내게로 쏟아졌고, 상체만 남은 악마의 손이 내 얼굴을 덮었다.
이윽고 시야가 어둠에 물들었다.
* * *
◆
선우가 노려지고 있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켜내지 못했다. 너무 늦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악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적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움직였더라면, 이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악마의 피를 뒤집어쓴 채 기절한 선우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치 죽은 자의 것처럼 싸늘하여 덜컥 겁이 났다.
맥이 뛰고 호흡도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너무나도 희미했다.
무슨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선우는 괴로워 죽겠다는 얼굴로 ‘으으···.’ 하고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선우에게 접근한 건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이 있는 악마다.
죽음을 불사하며 진행된 계획인 만큼 그 악마가 죽었다 하여 안심할 수는 없다.
신성력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하는 건 선우가 싫어하는 행동이지만, 현재 선우가 느끼는 괴로움은 악마의 ‘계획’이란 것과 관련 있을 공산이 컸다.
‘그러니 지금은 선우의 허락 없이 신성력을 써도 괜찮겠지···?’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며 조심스럽게 선우의 몸 안에 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그 순간 선우의 안에서 악마가 심어 놓은 게 분명한 마기가 날뛰었다.
“아아악!!”
선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발작이 자해로 이어지는 건 흔한 일이다. 그렇기에 서둘러 신성력을 거두고 선우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떨림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펑펑 눈물을 쏟으며 선우에게 위로받고 싶다. 선우의 다정한 목소리와 따스한 손길이 간절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바랄 수가 없다.
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선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선우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죄송합니다.”
윈스톤 경이 사죄해 왔으나 그 어떠한 대답도 돌려줄 수 없었다.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괜찮지 않았고, 당신 탓이 아니라 말하기에는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선우를 품에 안은 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속이 타들어 간다는 표현도 모자랐다.
그저 괴롭고 세상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선우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나 때문에 선우가 이런 세상에 와서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고, 결국에는 이렇게 된 것 같아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우가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면서도 계속 신성력을 밀어 넣어야 하나?
부러진 발목뼈를 다시 이어 붙였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몸 안에서 마기가 날뛰면 연약한 선우의 몸은 버텨내지 못할 거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하지만, 어떻게···?”
머릿속이 멍했다.
품 안에 있는 선우가 떨고 있는 건지 내가 떨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되었다.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데 어깨에 툭 하고 무언가가 얹어졌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휴마누스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