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4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43화(943/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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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의 몸 안에 있는 악마의 기운 말이야, 너도 어떻게 못 하는 거야?”
등 뒤에서 들려온 질문에 나는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휴마누스가 갑작스레 말을 건네와서 놀란 것인지, 아니면 그 내용 때문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대답 또한 할 수 없었다.
‘나는 마기의 발작을 억누르며 그것을 정화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내가 사용한 신성력 때문에 선우가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불현듯 2회차의 내가 선우에게 했던 짓이 떠올랐다.
그래서 더 겁이 나고 자신감이 사라졌다.
“···휴마누스는 할 수 없습니까?”
“네가 못 하는 걸 내가 어떻게 하겠어?”
“성검의 도움을 받으면···.”
“알잖아. 난 내 의지로 신의 힘을 끌어오지 못하고, 설령 그게 가능하더라도 섬세한 운용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한다는 거.”
휴마누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예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러나 최근에는 자주 보게 되어 익숙해진 표정이다.
저 표정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라리 휴마누스가 정말로 좋은 사람이란 사실을 몰랐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어째서 이 세상은 좋은 사람들에게 이다지도 냉혹하고 잔인한 것일까.
악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마왕이 신의 경지에 오른 까닭에, 이 세상이 악의로 물들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부당해도 너무 지나치게 부당했다.
3회차까지 끌고 올 것도 없이 1회차에서 모든 것을 끝냈어야 했다.
혼자서 완벽하게 악마 숭배자들의 계략을 파훼하고 마왕을 무찔렀다면, 나 혼자만 고통받고 말았을 터였다.
만약 그랬더라면···.
‘행복이 무엇인지 끝까지 알지 못했겠지.’
선우가 알면 경을 치고도 남을 일이나, 그가 지금처럼 고통받고 위험에 노출되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내 한 몸 희생하여 선우를 비롯한 소중하고 선한 이들을 평온케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금이 이런 위태로운 시기가 아니라 평화로운 시대이고, 선우가 원하는 대로 고향과 이곳을 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허황된 상상을 떠올릴 무렵.
“아! 네가 나를 보조해서 신의 힘을 이끌어내어 사용하는 건 안 될까? 직접 성검을 잡는 게 아니라, 나를 거치면 이전 회차의 자아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잖아.”
휴마누스의 목소리가 나를 차가운 현실로 불러들였다.
내가 선우에게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꺼린다는 걸, 아직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2회차의 내가 선우에게 신성력을 사용했을 땐, 거짓된 감정일지라도 평온과 안정감을 선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지금은 어떠한가. 오로지 고통만을 느끼게 할 뿐이다.
이래서야 선우가 겁먹고 두려워하기에 충분하다.
만에 하나 그러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우가 아파하며 비명을 내지르는 걸 보며, 내가 끝까지 정화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친 다리를 치료할 때에도 굉장히 버거웠다.
하물며 작은 실수가 죽음 혹은 그 이상의 악영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금은 오죽할까.
“그, 그래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거야···?”
“······.”
휴마누스가 무언가 오해한 듯했으나 정정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포기하고 도망칠 만한 상황에도 늘 용기를 내는 그 앞에서, 지레 겁을 먹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이 얼마나 비겁하고 한심한 행동인가.
이런 겁쟁이인 나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선우 뿐이다.
어서 선우가 눈을 뜨고 일어나, 내 손을 꼭 잡고 시선을 맞추며 나를 믿는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온 마기를 정화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거라며 응원해 준다면.
자신감을 갖고 용기를 낼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 거지···?”
나는 선우에게로 다가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선우의 본래 육체와 같은 빛을 띤다던. 깊고 따스한 고동색 눈동자가 간절히 보고 싶다.
전투를 하느라 떨어져 있던 시간까지 포함해도 두세 시간쯤 되었을까.
고작 그 정도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선우가 가족들을 그리는 마음은 이 이상일 터였다.
올해로 무려 4년째다.
그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온 것인지, 대체 어떠한 심정으로 그 마음을 계속 묻어두겠다 한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내게 베풀어지는 선우의 거대한 온정이 너무나도 무겁다.
하지만 너무나도 포근하여 떨쳐낼 수가 없다. 오히려 그 무게에 짓눌리고 싶다.
“선우···, 어서 눈을 떠라.”
절실함이 통한 건지 그 순간 선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행여 간절한 마음에 착각한 건 아닐까. 혹은 내가 내뱉은 숨결이 닿아 흔들린 건 아닐까.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호흡을 참으며 선우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내 착각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속눈썹이 떨리는가 싶더니 눈꺼풀이 걷혔다. 고동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막 깨어난 터라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가 몇 번의 깜박임을 거쳐 초점을 잡았다.
나는 그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짧지만 긴 기다림이 끝나고 마침내 선우의 입이 열렸다.
“···천사?”
“나를 위로해 주려는 그 마음은 알지만, 이런 순간에도···.”
“예? 이런 순간에도 뭐요?”
“그 얘긴 됐다. 그보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나?”
“불편한 거라면 하나 있어요.”
어째서 반말을 하기로 한 선우가 존댓말을 하는지 의문이었으나, 그냥 장난치는 거려니 하고 넘겼다.
일단은 선우의 상태를 살피고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것이 우선이다.
“무엇이 그대를 불편하게 하는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제가 걱정스럽다는 그 표정···?”
“주의해 보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이번만큼은 봐다오. 상황이 상황이었잖은가.”
“무슨 상황이요? 아니, 것보다 여긴 어디예요?”
“기억나지 않는 건가?”
내가 되묻자 선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함이 엄습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선우처럼 평범한 사람이 중급 악마를 바로 코앞에서 마주한다면, 그 순간의 기억을 잃어버릴 만도 하다.
죽음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위압감과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아득한 악의.
그것은 일반인이 맨정신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 악마는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까지 지니지 않았던가.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고자, 문제가 되는 기억을 무의식의 경계 너머로 보냈다 하여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상황 설명을 해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말없이 머뭇거리는 내 행동에 답답해졌는지 선우가 채근했다.
“아, 대체 뭔 일인데요?”
“그게, 으음···. 악마가 머리에 손을 얹은 직후, 선우가 기절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헐! 악마가요?! 그 선우란 사람은 괜찮대요?”
“···이상한 장난치지 마라. 괜히 불안해지잖는가.”
“장난치는 거 아닌데요?”
“······.”
“그래서 그게 끝이에요? 저에 관한 얘기는요? 혹시 그다음 악마의 표적이 된 게 저인데 천사님께서 구해주신 겁니까?”
얼떨떨하다는 표정과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눈동자, 의문스럽다는 목소리.
그 모든 반응은 결코 장난이나 연기가 아니었다.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겁니까? 꼭 울 것처럼···.”
“선우는 당신이잖은가.”
“네? 아닌데요.”
“선우가 아니라면 당신이 누구란 말인가.”
“시온이요. 시온 리벨론.”
잠깐의 망설임조차 없는 즉답이었다.
선우는 정말로 자신을 ‘시온 리벨론’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악마가 무엇을 노리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선우로서의 기억을 지우고, 시온 리벨론이라 믿게 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정신을 지배하려다가 도중에 악마가 죽어서 혹은 성수의 영향 때문에.
어떤 이유로든 진행하려던 술법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걸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엉뚱한 결과가 나온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억에 혼선이 생긴 건 의도치 않은 부수적인 효과이고,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따로 있을 가능성도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확실한 건 없지만.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적어도 선우에게 지난 4년여간의 기억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가슴이 답답하여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미치겠군.”
“미치겠는 게 아니라 이미 미치셨는데요? 얼굴이···. 아! 혹시 프라시더스 공작님이세요?”
“······.”
“우와, 대박 개쩔어! 진짜 소문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름다우시네요! 저 진짜 공작님이 천사인 줄 알았지 뭡니까?”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뒹굴 거리며, 내 얼굴을 두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이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선우가 틀림없다.
진짜 ‘시온 리벨론’의 영혼은 다른 육신을 얻어 새로 태어나기까지 했으니,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첫만남과 다르게 나를 경계하지 않고 순수한 호감만을 드러내는 건, 나의 타락한 모습을 알지 못해서겠지.’
하지만 이 호감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를 일이다.
‘시온 리벨론’의 머릿속에 남은 정보와 다르게, 완벽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나를 보며 실망하지는 않을까.
내 본성을 알고도 품어주었던 이전과 달리 밀어내고 두려워하지는 않을까.
나를 예전처럼 대해주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세르펜스, 선우 상태가···. 그러니까, 기억에 좀 문제가 생긴 거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
휴마누스가 얼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선우를 관찰했다.
그제서야 눈치가 보였는지 선우가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상황 파악이 된 건 아닌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름이 시온 리벨론이라고?”
“네, 선우 같은 이상한 이름이 아니라.”
“혹시 지금 나이가 어떻게 돼?”
“스물다섯인데요?”
“가족 구성은?”
“엄마, 아빠, 누나···. 누나? 누나가 왜 나오지? 아무튼 누나는 없고 형이랑 남동생이 하나씩 있어요.”
휴마누스가 선우에게 개인 정보에 관한 질문을 던졌고, 선우는 4년 전 ‘시온 리벨론’의 정보를 읊었다.
잠시 본래의 가족을 떠올린 듯했으나 말 그대로 잠깐에 불과했다.
그 순간, 아주 못된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 선우가 자신을 ‘시온 리벨론’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더 이상 가족들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시온 리벨론’의 가족은 이 세상에 있으니 언제든 보러 갈 수 있으므로.
선우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잃어버린 건 기억뿐. 선우는 여전히 선우였다.
오히려 최근 여러 가지 일을 겪어 힘들어하던 때보다 더 선우다웠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뭐야?”
“프라시더스 공작님의 보좌관 자리가 비었다길래 면접을 보고 나서, 우편으로 통지가 날아오길 기다리며 집에서 계속 죽치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 공작님이 보이는 걸 보면 취업에는 성공한 것 같고, 악마 때문에 그 이후의 기억이 싹 다 날아간 거려나···?”
휴마누스와 얘기를 나누던 선우가 도중부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이 끝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 맞으시죠?”
“응, 맞아.”
“그렇구나, 머리색 보고 알았어요. 진짜 특이하다 못해 강렬하네요.”
“그게 끝이야?”
“뭘 더 바라세요? 제가 공작님에게 했던 것처럼 외모 칭찬이라도 해 드릴까요?”
“세르펜스, 얘 선우 맞아.”
“선우 아니고 시온이라니까요?”
자신이 ‘시온 리벨론’이라고 우기면서도, 선우는 이전처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말하며 편하게 행동했다.
마기로 인한 부작용이 기억의 상실 및 혼선뿐이라면,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