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4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44화(944/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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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눈을 뜨니 낯선 장소인 데다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방 한쪽에는 이상한 실험 기구들이 잔뜩 있는지라, 위험한 사람들에게 납치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비단 천사 같은 얼굴의 공작님만 아니었으면 진짜 납치당한 줄 알고, 도망칠 궁리를 하느라 바빴으리라.
물론 얼굴만 보고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한 건 아니다.
선량하고 순수하며 가련하기까지 한 얼굴이지만, 사람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그런데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다정한 녹색의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묘한 신뢰와 안정감을 느꼈다.
‘아, 초면은 아닌가? 공작님의 표정과 말투에서 친근감이 묻어나는 게, 나와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닌 것 같으니···.’
나는 기억이 없지만, 무의식이 눈앞의 공작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판단한 게 틀림없다.
하기야 그 유명한 프라시더스 공작님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내 추측대로 취업에 성공한 거라면 그는 내 직속상관이다. 매일 집무실에서 얼굴을 보며 지내왔을 테니 친한 게 당연하다.
황태자가 나를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좀 의문스럽긴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공작님과 친구라니까, 보좌관인 나와도 어찌저찌 안면을 트고 지내다 친해진 걸 테다.
그런 게 아니라 해도 당장 필요한 정보는 아니니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파악해 둬야 할 것이자 제일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지금 제 기억이 얼마나 날아간 겁니까? 그리고 저를 계속 ‘선우’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또 뭐고요?”
악마가 소환될 정도면 적어도 선택의 날로부터 1년 이상 지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 마지막 기억은 선택의 날이 되기 직전 해의 4월 말이었으니.
최소 1년 반. 어쩌면 그 이상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게 된다.
게다가 나를 ‘선우’라는 사람으로 오인하는 듯한 두 사람의 태도 또한 마음에 걸렸다.
설마하니 악마가 나와 선우라는 사람의 영혼을 뒤바꿔, 내가 선우라는 자의 육체에 들어와 있기라도 한 걸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정도를 넘어 내가 어떻게 이런 발상을 떠올릴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순간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방에 거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아 보았다.
살짝 곱슬기가 있는 녹갈색 머리카락.
이는 분명 시온 리벨론, 그러니까 내 머리카락이 맞다.
의아한 마음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그때, 공작님이 자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선 내가 그대를 ‘선우’라 부르는 이유부터 설명하자면, 그건 그대가 나의 ‘선하고 어진 벗’이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선우’가 ‘선하고 어진 벗’이란 뜻을 지닌 단어라는 겁니까?”
“그러하다.”
이 가나안 대륙에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애초에 ‘선우’란 이름은 그 발음부터가 이 세상의 것과 묘하게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프라시더스 공작님이 누구던가.
성검의 주인이 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것을 익혔을 테니,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식을 많이 알고 있을 법했다.
가령 오늘날에는 잘 쓰지 않는 고어(古語)라든가.
“하긴 제가 좀 선하고 어진 면이 있는 훌륭한 친구···. 아, 잠깐만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려던 찰나.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떠오르지 않는 최근의 기억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옛날. 내가 아카데미에 다녔을 때의 기억을 말이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공작님은 지금 속고 계신 겁니다!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어줘도 소심하게 어물거리다 분위기만 흐리고, 결국 제대로 된 친구 하나 못 사귀고 겉돌기만 했는데! 그런 제가 선하고 어진 벗이라 불리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소심하다고 해서 현명하지 않은 건 아니잖은가? 선우, 그대는 내게 있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다.”
“네, 공작님 말이 무조건 맞습니다. 저는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에요.”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내 손을 꼬옥 붙잡으며, 자애롭고 상냥한 미소를 짓는데 어찌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을까.
하얀색을 가리키며 검다고 말해도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의견을 뒤집고 말았다.
그러자 공작님이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글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아무것도. 그보다 앞으로도 당신을 계속 선우라 부르고 싶은데, 그래도 되는가?”
“네, 뭐···. 정히 그러고 싶으시다면야···.”
부모님이 지어주신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긴 했지만, 차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딱히 나쁜 뜻이 담긴 단어도 아니니 그냥 별명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도 저를 ‘선우’라고 부르시던데···.”
“그냥 날 따라 하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휴마누스 이외에도 당신을 그렇게 부르는 이들이 몇 명 더 있다.”
“선우란 호칭은 진짜 별명 같은 거였구나···.”
당연히 별명이겠거니 생각했어야 하는데, 자꾸 아니라고 부정해서 걱정을 끼친 것 같아서 괜히 뻘쭘해졌다.
나야 기억 일부를 잃었어도 내가 나라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악마가 내 머리에 손을 얹은 후 내가 정신을 잃고. 깨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나 자신을 부정하는 얘기였으니, 이 두 사람은 엄청나게 혼란스러웠을 테다.
“잠깐, 잠깐! 세르펜스, 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선우’가 별명이라니? 게다가 ‘선하고 어진 벗’은 또 뭐고?”
“으음, ‘선우’의 뜻은 혼자만 알고 싶었는데···.”
“아, 그게 정말로 그런 뜻이었구나? 선우랑 잘 어울리네···가 아니라. 너 말을 좀 이상하게 하고 있지 않아?”
“선우가 너무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으니, 일단은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제일 혼란스러워하는 건 선우가 아니라 나인 것 같은데···?”
황태자가 공작님과 나를 스윽 돌아보더니 허허로이 말했다.
참나 어이가 없다. 기억을 잃은 건 난데 왜 자기가 더 혼란스럽다고 자신하는 건지.
공작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표정을 굳혔다.
“선우가 워낙에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 크게 티가 나지 않을 뿐이지, 현재 그가 느끼고 있는 혼란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예? 밝고 긍정적? 제가요? 아닌데? 저는 화목하고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런 것치고 왜 이렇게 자랐나 싶을 정도로 소심하고 자존감도 낮아요. 뭐 하나 똑 부러지게 잘 해내는 게 없어서 그런가? 스펙도 별로고. 그런 주제에 공작님의 보좌관을 하겠다며 이력서를 넣었으니, 긍정적이라 오해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취직이 너무 안 되니까, 자리만 나면 되는대로 이력서를 막 뿌린 거라서요.”
“···선우야. 너 기억 되찾으면 시온에게 꼭 사과해.”
내가 나 자신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말하자, 황태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했다.
아무리 본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친구에 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싫다는 거려나?
이제까지 나를 대하는 태도로 보아, 황태자 또한 나와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듯하니 제법 그럴듯한 가설이다.
“그건 그렇고, 아까 잃어버린 기억이 얼마나 되는지 묻지 않았었나?”
공작님이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려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리며 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잃어버린 기억이거늘, ‘선우’란 호칭에 관한 얘기를 듣느라 그걸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님에게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열리더니 충격적인 얘기가 흘러나왔다.
“현재는 선택의 날로부터 3년째 되는 해다.”
“예?! 그럼 무려 4년분의 기억이 날아갔다는 겁니까?”
“으음···. 많이 놀랐는가?”
“당연히 놀라죠!”
“너무 불안해하지는 마라. 지난 4년간 있었던 일들이라면 내가 다 얘기해 줄 터이니.”
“아니, 아니. 그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혹시 아는가? 얘기를 듣다 보면 기억을 되찾을지.”
4년이란 세월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긴 했는데, 듣고 보니 공작님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원래 기억 상실이라는 게, 잃어버린 과거의 행적을 되짚다가 실마리를 얻어 기억을 되찾기도 하고. 뭐 그런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게 해도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겠지만.
그렇다고 민간요법···이라는 표현도 사실 좀 그런데.
아무튼 그런 방법에 따라, 기억이 되돌아올 때까지 머리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자연스레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고 있는 것도 좀 그렇고.
“확실히···, 현재로서는 공작님에게 이것저것 들어보는 게 최선이겠네요.”
“‘공작님’이 아니다.”
“네? 공작이 아니시라니, 설마 은퇴하셨어요?! 그럼 제 직장은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아! 그러고 보니 선택의 날이 지났죠? 성검의 주인님이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내 질문에 공작님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니 공작님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름으로 불러다오.”
“어, 진짜 그래도 돼요?”
“아니면 ‘아도르’라고 불러도 좋다.”
“설마 그거 세례명입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이 주위에 없을 때만 그리 부르도록.”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
그 다른 사람에 황태자는 포함이 안 되는 건가 의문이 들긴 했지만, 뭐.
둘은 오랜 친구 사이라고 알려졌으니 진작에 세례명을 공유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줘. 참고로 세례명은 ‘브라이트’인데 이쪽으로 불리는 건 왠지 좀 민망하니까, 그냥 알고만 있어.”
“참고로 성검의 선택을 받은 건 내가 아니라 이쪽, 휴마누스다.”
황태자 휴마누스가 자신의 세례명을 공개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놀라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왔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고강한 검술 실력으로, 역대 최강 성검의 주인이 될 거라는 평이 자자했던 세르펜스가 아니라.
금붕어 머리가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니?
무척이나 놀라운 얘기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긴 성검 따위가 없어도 아도르는 강하니까, 다른 사람에게 성검을 줘서 강자를 한 명 더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요.”
“다른 사람들도 선우처럼 생각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엥?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땠길래 그런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겁니까?”
“보통은 신이 잘못된 선택을 내렸거나 내게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더군.”
“헐···.”
그야말로 ‘헐’이다.
신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뿐만 아니라, 천사처럼 아름답고 선량한 아도르에게 결함을 운운하다니.
이런 게 진짜 신성 모독이지, 신성 모독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이단 심문관들은 그런 놈들 안 잡아가고 대체 뭘 하나 모르겠다. 명백한 근무 태만이다.
그러고도 이단 심문관이라고 할 수 있나? 이단 심문관들도 이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