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4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46화(946/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5) >
* * *
“악! 깜짝아!!”
졸음기를 물리치며 부스스 눈을 떴는데, 수많은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실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개중에 엄청난 거구의 사내가 있어서 더 놀라버렸다.
어제 보았던 휴마누스도 꽤나 체격이 좋은 편이었는데, 저 사내 옆에 나란히 서니 성장기 청소년으로 보일 정도였다.
어제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본 사람이 천사 같은 얼굴의 세르펜스고, 그다음으로 본 게 눈매는 날카롭지만 사람 좋은 티가 나는 휴마누스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저 사내부터 마주했다면 살려달라고 빌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과도하게 놀란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눈치챈 걸까?
아직도 내 옆에 누워있던 세르펜스가 그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눈짓을 보냈다.
무섭게 생긴 사람을 물려 준 건 고마운데, 우선 본인부터 일어나서 나와 거리를 둬 줬으면 좋겠다.
나는 슬그머니 잡힌 손을 빼내며 자리에 일어나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 상실이고, 그건 악마가 내게 심어둔 마기 때문이며. 나는 기억나지 않는 지난 4년간, 다 큰 성인 남성을 어린애 취급한 데다가 엉덩이까지 두드려댔다는 거지?’
이걸 내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지난 4년간 내가 미쳤다가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소심하고 무람한 성격인 내가 명망 높은 공작님의 엉덩이를···.
‘아니, 근데 세르펜스는 대체 왜 그걸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거야? 머리 쓰담은 내버려 두더라도 엉덩이 툭툭은 피했어야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지난 4년간의 행적 때문에,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고 있자니 안타깝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다들 무어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으니 생각 정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거려나?
다른 사람들의 배려는 고마웠으나 휴마누스는 괘씸했다.
그가 어제 엉덩이 얘기만 꺼내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에서 손을 뗐다.
“괜찮···은가?”
어느새 나와 마찬가지로 일어나 앉은 세르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그 얼굴을 마주하니 어린애 취급을 왜 다 받아주고 있었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세르펜스를 포함한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터라, 눈치껏 말을 아끼기로 했다.
다들 내가 기억 상실로 인한 혼란. 혹은 마기로 인한 두통 따위로 끙끙댄 거라고 생각할 텐데.
사실은 엉덩이 툭툭 때문에 그러고 있었다는 걸 알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제 세르펜스 엉덩이는 그만 떠올려야지 안 되겠다.
“네, 괜찮아요.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합니다.”
“만약 불편하거나 아픈 곳이 생기면 곧바로 얘기해라. 걱정 끼치는 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혼자 앓지 말고.”
쓴웃음을 머금은 세르펜스가 다정한 음색으로 말하였다.
아무래도 나는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털어놓지 않고, 혼자서 끙끙거리다 들킨 전적이 많은가 보다.
소심하디 소심한 내가 할 만한 행동이기는 하나 올바른 행동은 결코 아니다.
‘기억나는 건 없지만, 괜히 반성하게 되네···.’
안쓰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꼭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울 것 같으면서도 끝내 울지 않았다.
“아, 네. 무슨 일 있으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다들 누구인지 소개 좀 해 주실래요?”
내 부탁에 세르펜스가 사람들을 한 명씩 가리키며, 그들의 이름과 함께 간략한 소개를 덧붙였다.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를 제외해도 무려 여섯 명이나 된다.
풀네임을 전부 외우는 건 어려워 이름과 직업 정도만 기억해 두었다.
“그런데요, 세르펜스. 신성력으로는 제 기억 상실을 못 고치는 겁니까?”
“으음···, 그건 조금. 아니, 많이 곤란하다.”
“왜요?”
“선우의 기억 상실 증상은 악마가 심어 놓은 마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마기를 정화하기만 하면···.”
“그럴 수가 없다. 선우에게 신성력을 사용하기만 해도 마기가 날뛰어서···.”
“많이 아플까요?”
“······.”
괜한 질문이었을까?
세르펜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기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쩐지 어제 휴마누스가 내 몸 속에 남은 마기를 경계하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이상하더라니.
내가 기절해 있었을 때 신성력을 써 봤나 보다.
‘그래도 단순히 고통을 동반하는 것뿐이라면,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후다닥 끝내 버렸을 텐데···.’
추측할 수 있는 답안은 하나다.
내 나약한 육체가 마기의 폭주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도중에 그만둔 거겠지.
애초에 힘없는 민간인을 위험한 곳에 데리고 다니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일행들의 소개를 듣자하니 무력을 갖추지 못한 건 오직 나뿐이었다.
세르펜스야 나를 드림캐쳐로 쓰느라 휴대하고 다닌다 치더라도, 다른 일행들은 어째서 말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르펜스와 이들을 탓하고자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몸 속에 마기가 있다고는 하는데 느껴지는 것도 없고.
기억상실도 아직까지는 ‘자고 일어났더니,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친한 척을 해 온다.’ 정도의 감상밖에 안 든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겠는데, 당장 와 닿는 게 없단 말이지···?’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재 모든 상황이 그냥 남의 얘기 같다.
세르펜스와 휴마누스. 그 두 사람이 말하는 ‘나’와 내가 기억하는 ‘나’ 사이에서 느껴지는 간극도 너무 크고.
“현재 선우의 상태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긴 하지만, 슬슬 외부 문제에 관해 얘기를 나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일행 중 유일한 이종족인 엘프 유지스가 손을 들어올리며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
엘프와 인간을 두고 이런 표현을 써도 되나 모르겠지만, 그녀는 세르펜스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미모의 소유자였다.
세르펜스가 처연하면서도 신성함이 느껴지는 청순한 미인이라면, 유지스는 활기차고 상큼발랄한 미인이라고나 할까?
“그치. 신의 사자가 악마의 술수에 당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게 알려지면, 온갖 뜬소문이 돌기 시작할 테니까.”
붉은 머리의 용병, 푸로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얘기대로라면 보통 큰일이 아니다.
신의 사자의 가치는 신에게 받은 계시 혹은 능력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실용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래로 향하는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컸다.
‘그런 신의 사자가 악마에 의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니···. 보통 큰일이 아닌데, 설마 그거 내 얘기야?!’
정말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다. 말이 안 돼도 너무 안 된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것도 어찌 보면 정체성을 잃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푸로르가 언급한 ‘신의 사자’가 나라는 결론이 나온다.
놀라서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있자,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턱 밑에 손을 대더니 입을 닫아주었다.
그 친절한 손길에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지금 내 입안이 건조해지는 게 문젠가?
“···제가 신의 사자라고요? 그래서 아무 힘도 없는 제가 여러분이랑 같이 다니고 있는 거라고요? 아니면 혹시 제가 기억이 없어서 그렇지, 신께 무언가 능력이라도 받았어요?”
“굳이 따지자면 선우는 계시를 받는 부류에 가깝다.”
“계시를 받으면 받았지, 그런 부류에 가까운 건 또 뭡니까?”
“선우가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면,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기만 할 거다.”
명확한 설명이 아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설명을 억지로 들어서, 지금보다 더 골머리를 썩고 싶지 않았다.
그 이전에 새로운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고.
“직접 전투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 아니라면, 저는 그냥 안전한 곳에서 대기하는 게 낫지 않아요?”
“그건 안 된다.”
“왜요?”
“······.”
세르펜스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울 것처럼 그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들었고, 표정에는 좌절감이 스쳤다.
하지만 끝내 울지 않았다.
눈을 꽉 감고 숨을 고르더니,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내 시선을 피하며 사과의 말을 건넸을 뿐이다.
“미안하다. 그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내 욕심으로 선우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설마 진짜로 드림캐쳐 용도로 나를 데리고 다녔던 건가?
그런 의심이 들었으나 차마 입에 올리지는 못했다.
어제 들었던 세르펜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지금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 맞아서.
차라리 그냥 울든가 아니면 변명이라도 하든가.
울 듯 말 듯 하면서도 결국 울지 않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에 돌이라도 얹힌 듯 답답해졌다.
“아니, 뭐. 됐어요. 저도 여정에 함께 하고 싶으니까 따라나선 거겠죠. 세르펜스가 제게 억지로 목줄을 채워가며 끌고 다닌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목줄···, 으음···.”
뭔가 반응이 이상하다. 꼭 내게 물리적으로 목줄을 채운 전적이 있어서 찔려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겠지.
신의 사자에게 그런 걸 채워 끌고 다녔다면, 지금쯤 그는 이단 심문관들에게 쫓기고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이 선량해 보이는 공작님이 내게 그런 짓을 할 것 같지가 않다.
그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신의 사자라는 신분을 내세워, 그를 함부로 대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런 이유라면 세르펜스가 엉덩이 툭툭을 피하지 않은 것도 설명이 된다.
소심한 내 성격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혹시 아는가? 내가 신의 사자라는 새 신분을 얻고 기고만장해져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을지.
나는 괜한 멋쩍음을 느끼며 세르펜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유지스를 향해 말을 붙였다.
“아무튼 제가 기억을 잃은 게 알려지면 안 되니까, 멀쩡한 척 연기해 달라는 거죠?”
“가뜩이나 당혹스럽고 힘드실 텐데 연기를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아프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절하면 되니까요. 그저 교단에 알리느냐 마느냐, 그에 관해 얘기를 나눠보자는 의미로 말을 꺼낸 거였어요.”
“하지만 제가 아파서 드러누웠다고 알려지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유지스가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히 대답했다.
진실의 종족인 엘프답게 거짓말은 못하겠나 보다.
어차피 답은 처음부터 나와있었다.
“까짓거, 연기 한번 해 보죠. 일단 교단 사람들을 상대로 시도해 봤다가, 들키면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고 협조해 달라 하면 되는 거고. 잘 속이면 그냥 넘어가는 거고. 딱히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아직 세르펜스의 엉덩이를 두드릴 엄두는 나지 않지만.
어제 잠들기 전 5분가량 그의 가슴께에 손을 얹고 토닥거렸더니, 이제 머리 정도는 편히 쓰다듬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