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4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47화(947/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6) >
“선우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교단이라면 믿을만하니까요.”
유지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풋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들으니 교단 이외에는 믿을만하지 않다는 뜻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이해할 수 있었다.
악마 숭배자들이 정체를 숨기고 잠입할 수 없는 단체는 오로지 교단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어제 세르펜스와 휴마누스가 말한 바에 따르자면,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를 못 미더워하며 비난하는 이들도 상당하다는 모양이고···.’
행동방침이 정해지긴 했으나 곧바로 실전에 돌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지난 4년간의 나’에 관하여 제대로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나마 파악한 거라고는 세르펜스를 어린애 취급했다는 것 정도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침을 먹으며 일행들에게 속성 과외를 받아, 필요한 정보를 숙지하기로 했다.
“선우에게 기억이 없는데 음식은 어떻게 하지?”
“제가 재고를 전부 파악하고 있긴 합니다. 한데 무엇을 꺼내야 할지···.”
“그냥 아무거나 꺼내.”
휴마누스와 세르펜스가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후.
세르펜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침대에서 일어났고, 나는 어쩔까 하다가 그냥 일어났다.
나를 언급한 걸 보면 식사 준비는 내 담당이었던 것 같으니 뭐라도 돕기 위해서다.
‘누워 있을 때도 이 침대만 유독 고급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서 보니 보통 튀는 게 아니네.’
일어나서 침대를 보며 그런 감상을 떠올리던 그 순간.
갑자기 침대가 사라져버렸다.
세르펜스가 품속에서 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꺼내어 그 입구를 침대 모서리에 갖다 대니, 호로록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게 뭐예요?!”
“아공간 주머니다.”
“혹시 제 것도 있어요?”
“있었는데 휴마누스에게 빌려주고, 지금은 내 것을 함께 쓰고 있다.”
이어진 설명에 따르자면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면, 그 형태를 떠올려야 한다는 모양이다.
어차피 내 것이 있어 봤자 써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물건들을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로 옮길 때, 세르펜스가 옆에서 지켜보았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거실로 나가자 휴마누스와 윈스톤, 푸로르가 여러 가구와 각종 실험 도구들을 치웠다.
다른 두 사람은 그렇다 쳐도 황태자인 휴마누스도 나선 건 좀 의외였다.
싹싹하고 소탈한 게 제국이 망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구나 싶다.
공간이 확보되자 세르펜스가 아공간 주머니라는 것에서 커다란 테이블을 꺼냈다.
침대가 호로록 빨려 들어간 것도 신기했지만, 테이블이 후루룩 튀어나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신기했다.
그 다음으로 의자와 식기류가 나오는 건 좀 덤덤하게 봤는데, 갓 만든 것처럼 따끈따끈한 음식들이 나온 건 놀라웠다.
식사 준비에 내가 도울 것은 없었지만, 침대에서 일찍 일어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좋은 구경이었다.
“선우의 자리는 여기다.”
먼저 자리에 앉은 세르펜스가 자신의 옆 의자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은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테이크였는데 어째서인지 딱 하나에만 붉은 소스가 끼얹어져 있었다.
세르펜스가 내 자리라고 알려준 곳에 하나뿐인 그 붉은 음식이 놓여 있었다.
나만의 특별식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매워 보였다.
“저 매운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매운맛은 일종의 통각 아닌가?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은 약간 변태 같고 그러던데.”
“나는 매운 걸 못 먹지만, 단 한 번도 선우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다.”
“그야 저는 매운 걸 좋아하는 변태가 아니니까요.”
“선우는 그런 사람이 맞으니, 어서 이리 와서 먹어 봐라.”
세르펜스가 손수 빨간 소스가 묻은 고기를 잘라서 포크로 콕 찍어 내밀기까지 하니, 먹기 싫다고 하기 뭐했다.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매콤한 냄새가 왠지 모르게 맛있게 느껴져서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포크를 건네받아 그 끝에 꽂혀있는 고기를 한입에 넣었다.
가장 먼저 화끈한 매운맛이 혀에 닿았고. 턱을 움직여 음식을 씹자, 고기에서 고소한 육즙이 터져 나와 얼얼해진 혀를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돼지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였나 보다.
입안에서 소스와 고기의 맛이 어우러지니 미뢰가 즐거워하는 게 느껴졌다.
정말 자극적이고 맛있었다.
“하마터면 이 맛있는 걸 모르고 살 뻔했네! 매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 뭐가 어쩌고 어째? 그딴 편협한 사고방식에 갇혀 있으니 변변찮은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로 살지!”
“현재의 선우는 친구도 많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그리고 그 친구 중에서도 제일 특별한 존재가 바로 나다.”
“아무렴 그렇겠죠. 아랫사람과 친구를 먹는 것도 모자라 어린애 취급까지 받는데, 특별하다 못해 특이한 수준이죠.”
“···내가 특이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뜻이었다.”
“어유, 우리 공작님! 그런 얘기가 하고 싶으셨구나!”
반쯤 장난으로 세르펜스를 어린애 취급해 보았다.
그러자 그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방긋 웃었다.
내가 신의 사자 신분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어린애 취급한 건 줄 알았건만. 세르펜스도 충분히 즐기고 있던 모양이다.
약간 예행연습 삼아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니 그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쓰다듬 받는 걸 좋아하는 거야 그냥 취향이려니 싶지만, 엉덩이를 두드렸을 때도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세르펜스가 불편해질 것 같다.
살짝 궁금해지긴 했지만, 역시 시도하지 않는 게 관계 유지에 이로울 성싶으니 그만두자.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모두가 자리에 앉았고, 완벽한 연기를 위한 선행 지식 습득 시간이 도래했다.
가장 열성적으로 정보 전달에 힘쓴 건 유지스였다.
에드나라는 사람의 첨언에 의하자면 우리는 그간 여러 가지 설정 놀이를 즐겼는데, 그때마다 유지스가 진두지휘에 나섰다고 했다.
‘설정 놀이라니, 그건 또 뭐람···?’
악마 숭배자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시간이 나면 틈틈이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재밌게 지냈나 보다.
하기야 이들도 사람인데 항상 싸우거나 수련만 하며 지내지는 않겠지.
다음 놀이 시간은 언제일까?
나는 낯가림이 심하고 붙임성 또한 없는지라, 내 놀이 상대는 언제나 형 카론과 동생 제온뿐이었다.
그마저도 카론에게 끌려다니는 게 대부분이었지.
또래 친구들과는 놀이다운 놀이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무척이나 기대된다.
“당장은 이 정도만 알아도 문제없을 거예요.”
너무 많은 정보는 혼동만 야기할 뿐이다.
그 때문인지 유지스는 딱 알짜배기 정보만 추려서, 내가 그것들을 전부 달달 외우고 이해할 때까지 반복하여 알려주었다.
아니, 그러겠다고 말은 했는데 정말 간추린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일행들을 부르는 호칭, 곧 만나야 하는 이단 심문관들에 관한 정보, 나와 그들의 관계성을 시작으로.
현 대륙과 이곳 프뤼네 왕국의 상황, 내가 기억을 잃기 직전에 치러진 전투와 악마에 관한 것.
자매품으로 최상급 악마 레기오와 계약했던 매국 마인이란 자와 폭주 마인에 관한 것.
그리고 내가 레기오를 쓰레기오라 불렀다는 것과 그 외 기타 등등, 화제에 오를 만한 정보들로 머리가 꽉꽉 들어찼다.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머리가 1kg 정도는 더 무거워진 것 같다.
“흠, 흠! 그리고 끝으로···.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요.”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를 정면으로 받아내느라 살짝 멍해진 내 정신을 붙들기 위함인지, 유지스가 헛기침까지 해 가며 집중을 요구했다.
표정까지 굳히며 나와 시선을 맞추고 목소리까지 내리까는 걸 보니, 예사로이 넘겨서는 안 될 중요한 정보임이 틀림없다.
나는 흩어져가는 집중력을 끌어모아 유지스의 입이 다시 열리길 기다렸다.
“선우는 악마 숭배자를 악숭이, 악마 숭배 세력은 악숭 세력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악숭이 중에서도 흑마법사는 법숭이, 검을 다루는 자는 검숭이, 암살 기술을 익힌 자는 암숭이. 아무 능력도 갖추지 않은 이들은 ‘민간인 악숭이’를 줄여 민숭이라고 부르셔야 해요.”
“네? 그걸 대체 누가 그렇게 줄였대요?”
“선우가요.”
“와, 특별한 재주 하나 없던 내게 이런 천재적인 재능이?! 완전 편한 데다가 기억하기도 쉽고 너무 좋은데요?”
정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제까지 그 기나긴 명칭을 일일이 불렀다는 게 불합리하다 느껴질 정도로 획기적이다.
할 수만 있다면 사전에 등재하여 널리 퍼트리고 싶을 따름이다.
“기억을 잃어도 역시 선우는 선우네요.”
유지스가 마음이 놓인다는 듯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나는 2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내, 윈스톤에게 종종 장난을 걸어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모양이다.
심지어는 그가 나에게 ‘선배’라 부른다더라. 나보다 늦게 프라시더스 공작가에 취직했다는 이유로.
‘직종도 다르고 나보다 나이까지 많은 사람. 그것도 근육질의 기사에게 내가 군기를 잡았다는 거잖아?!’
겁 많은 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지난 4년의 세월이 나를 180도 바꿔 놓은 것이 틀림없다. 항거할 수 없이 밀려드는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나 무섭다.
당장은 시간이 촉박하여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시간이 나면 세르펜스에게 내가 어쩌다 그렇게 변했는지 물어봐야겠다.
“만약 모르는 얘기가 나오면 딴생각을 하는 척 침묵하면 돼요. 그럼 저희가 알아서 대화를 진행하거나 화제를 다른 데로 옮길게요.”
“모르면 닥치고 있는 게 제일이란 거죠? 간단하니 좋네요!”
“선우가 세르펜스 앞에서 그런 비속어를 거침없이 내뱉다니···? 기억을 잃었다는 게 새삼 와 닿네요.”
언제 마음을 놓았느냐는 듯, 유지스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았다.
닥치라는 말이 엄청나게 심한 욕설도 아니건만, 너무 과민한 반응이다.
보아하니 내가 세르펜스 앞에서는 내숭이라도 부린 모양이다.
아, 내숭도 아닌가? 난 원래 얌전하니까.
“닥치라는 말은 괜찮다. 예전에 선우가 내게 알려 줘서 실사용도 몇 번 해 봤다.”
세르펜스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뭔가 기억나는 게 있어야 변명이라도 하지, 그렇게 쳐다봐도 나는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나저나 순진한 상사에게 비속어를 가르치고 그걸 써 보라고 권유하다니.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 건지 짐작조차 안 갔다.
“이상하네···? 난 정말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접시에 남은 소스를 싹싹 긁어모아 마지막 한 조각 남은 고기에 듬뿍 묻혀서 먹었다.
정보를 전달받는 동안에 조금 식긴 했으나 고기는 여전히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웠다.
소스가 식어 뜨거움에 가려져 있던 감칠맛이 도드라지며, 오히려 더 맛있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럼 교단 분들을 부르러 다녀올게요.”
식사를 마치자 리에나가 그리 말하며 자리를 떴다.
대륙에 소환된 악마는 모두 죽었고 이번 전투에 가담한 악숭이들도 전부 처치했지만, 그래도 리에나 혼자 나가는 게 걱정되었는지 푸로르도 따라나섰다.
다들 푸로르가 따라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거로 보아, 두 사람은 평소에도 곧잘 붙어 다니는 단짝인가 보다.
곧 사람들이 올 예정인데 식사의 흔적을 남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마라는 하늘색 머리 마법사가 빈 그릇과 테이블을 마법으로 깨끗이 닦자, 에드나가 그녀를 칭찬했다.
같은 마법사인 거로 아는데 돕지는 않고 저래도 되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아니마가 으스대는 표정으로 칭찬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걸 보니, 저것도 나름대로 돕는 거라고 봐도 될 성싶다.
깨끗해진 식기는 윈스톤이 차곡차곡 모아서 세르펜스에게 건넸다.
세르펜스는 그것을 받아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후, 작은 테이블을 하나 더 꺼내어 기존의 테이블과 붙여 길이를 연장했다.
의자도 추가로 더 꺼냈다.
“대체 의자를 몇 개나 가지고 다니는 겁니까?”
“원래는 우리 일행의 인원수에 맞게 9개만 가지고 다녔는데, 선우가 예비용이 필요할 것 같다며 여섯 개를 더 챙겼다.”
9개는 미묘하니 10개를 맞춰야 할 것 같고, 예비용으로 한 개만 준비하는 건 뭔가 정이 없으니 5의 배수인 15개를 채운 거려나?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고 있을 즈음, 유지스가 짝짝 손뼉을 쳐서 내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외운 것들 최종 점검해야죠.”
유지스는 무척이나 열의가 넘치는 선생님이라는 지식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