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4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48화(948/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7) >
* * *
“좋아요, 완벽해요! 이 정도면 들킬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몇 번이고 확인차 문답을 주고받고 짤막한 상황극까지 마치고 나서야, 유지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상황극이야 어찌 되었든 정보 자체는 내게 꼭 필요한 거였다.
내 기억 속 세상은 악숭 세력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의 것이었으니까.
너무나도 많은 것이 달라졌고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위험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지낸다는 건, 위험을 향해 맨몸으로 돌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나는 늘 전장의 최전방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악마와 악숭 세력이 찾아오든 아니면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든, 성검의 주인과 그 일행이 있는 장소가 곧 전장이니까.
무력도 갖추지 못한 내가 이제껏 별 탈 없이 지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
아니, 어쩌면 당장 알아야 할 내용이 아니라서 유지스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을 뿐.
몇 번이고 위험한 고비를 넘겨왔을지도 모른다.
이번만 해도 후방에서 보호받는 내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악마를 소환해내지 않았던가.
신성 결계를 무시하고 그 너머의 공간을 찢고 나올 수 있다는 건, 전략적으로 매우 유용한 수였다.
그걸 오로지 나에게 써먹기 위해 꽁꽁 감춰뒀다니 소름이 끼친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다못해 그 능력을 도주하는 데 썼다면. 그리하여 다른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다면, 대륙의 피해가 더욱 커졌을 텐데도 말이다.
유지스에게 배운 내용을 반복하여 되새길수록 경각심 또한 깊게 새겨졌다.
“그런데 세르펜스는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선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카네이션을 달아 주고 있다.”
“···갑자기요?”
“늘 하던 것이다. 그보다 말투에 신경 쓰는 게 어떠한가?”
세르펜스의 말인즉 반말을 쓰라는 뜻이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그가 달아준 카네이션 부토니에를 살펴보았다.
화려한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거기에 박힌 보석의 광채가 보통 예사로운 게 아니다.
설마하니 내가 산 물건을 세르펜스에게 달아 달라고 했을 리는 없고.
그가 직접 사서 이렇게 매일 달아 주고 있다는 건데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어느 친구 사이가 이런 걸 매일 가슴팍에 달아준단 말인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려나?
근데 왜 하필 카네이션이지? 꽃 말고 뭔가 멋진 모양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었나?
하다못해 좀 단순한 디자인으로 만들어 주던가, 이건 너무 눈에 띄지 않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끝내 물어볼 수 없었다.
“손님들이 곧 도착할 것 같네요. 모르는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는데, 웨일리안 님과 테일러 님 외에 다른 분들도 함께 오시나 봐요.”
“한 명은 느껴지는 신성력 보유량으로 보아 추기경급인 듯하군. 그리고 다른 한 명에게서는 상당한 양의 마력이 느껴진다.”
유지스와 세르펜스가 주고받는 대화 내용으로 보아 거물급 인사가 납신 모양이다.
예상했던 것과 상황이 달라졌다.
기껏해야 이단 심문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웨일리안이랑, 우리와 설정 놀이도 함께 했을 정도로 친분이 돈독한 편이라는 테일러.
그렇게 두 사람만 올 줄 알았다.
아니면 기차에서 안면을 텄다는 레베카라는 이단 심문관까지 포함하여 셋이 오거나.
“어떻게 하죠?”
“처음 보는 사이니까, 특별히 주의할 건 없을 거예요.”
유지스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기억이 없어서 불안한 와중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니, 긴장감이 훅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데 돌연 무언가가 손등에 닿았다.
화들짝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파드닥 손을 털어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한 세르펜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방금 내가 무의식중에 쳐냈던 게 그의 손이었던 모양이다.
“그저 손을 잡아주려던 것뿐인데···.”
“아니, 그게, 지금 타이밍에 누가 손을 잡으려 할 줄은 몰라서···.”
“······.”
“아이고, 내가 실수했네! 미안해, 기분 풀어. 응?”
“당신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사과하지 마라. 나야말로 미안하다. 놀라게 해서···.”
안 그래도 처연한 인상의 미인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울적한 목소리로 사과해 오니 진짜 나쁜 놈이 된 기분이다.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세르펜스가 쓴웃음을 머금는가 싶더니 알아서 표정을 추슬렀다.
곧 교단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마법사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이곳에 올 예정이다. 그들 앞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다녀왔어요.”
현관문이 열리고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한 리에나가 모습을 내비쳤다.
뒤이어 들어온 푸로르도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다, 미안.’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저 두 사람이 일부러 상황을 꼬이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닐 테다.
계획에 없던 이들까지 데려온 데에는 분명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교단 분들만 모시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손녀를 보겠다는 걸 어떻게 말려?”
휴마누스의 물음에 푸로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난색을 보였다.
그 말에 나는 성직자들과 함께 막 실내로 들어온 노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하얀 빛을 띤 엷은 붉은색 눈동자 덕분에, 그가 아니마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마는 마탑주의 손녀라고 했으니 노인의 신분도 자동으로 밝혀졌다.
지팡이로 땅을 짚고 선 마탑주는 근엄해 보이는 인상에 옷차림도 말쑥하여, 제법 점잖아 보였다.
그런 사람이라도 오랜만에 손녀를 만나러 왔다면 얼굴에 정이 뚝뚝 떨어져야 마땅했다.
하나 그의 얼굴은 정이 뚝뚝 떨어지기는커녕 그냥 무뚝뚝했다.
‘감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가···?’
그러한 의문을 떠올렸을 때, 누군가가 ‘흥!’ 하고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니, 아니마가 표정을 있는 대로 구기며 척하니 팔짱을 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드나 앞에서는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쉼 없이 애교를 떨어대기에, 싹싹한 성격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또 쌀쌀맞기 그지없다.
“혹시 제가 오면 안 되는 자리에 찾아온 겁니까? 그렇다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마탑주의 시선이 잠시 아니마에게 머무르는가 싶더니, 이내 휴마누스에게로 옮겨졌다.
리에나와 푸로르가 그러했듯 이번에는 휴마누스의 표정이 난감으로 물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그를 대신하여 입을 연 건 아니마였다.
“그래, 가 버려! 언제부터 나랑 사이좋게 대화 따위를 나눴다고···.”
그리 사이좋은 조손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냉랭하다 못해 적의마저 감도는 손녀의 목소리에, 마탑주의 얼굴에 언뜻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버릇없는 아니마의 행동에 당혹을 드러낸 건 교단 관계자들뿐.
당사자인 마탑주와 일행들은 아니마를 나무라지 않는 거로 보아, 마탑주가 그녀에게 무언가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한 모양이다.
‘남에게는 방긋방긋 잘 웃어 주는 애가 저렇게나 가시를 드러낸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기억이 날아간 탓에 자세한 사정까진 모르겠지만, 복잡한 가정사가 얽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일행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쓰며 공연히 마탑주를 노려봤다.
마탑주는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진즉 너와 얘기를 나눠봤어야 했는데 내 그러지 못했구나.”
“이제 와서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사과나 변명은 하지 않으마. 사과를 해 봤자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네가 아닌 나일 뿐이고, 변명을 통해 내 잘못을 이해해 달라 요구하기에는 염치가 없으니.”
“흥!”
아니마는 보란 듯이 에드나에게 달라붙어 살갑게 구는 한편, 마탑주에게는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마치 자신에게는 에드나가 있으니 할아버지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듯한 행동이다.
감정적인 아니마와 다르게 마탑주는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인 태도를 취했다.
물론 겉보기에 그렇다는 얘기고, 진짜 이성적이었다면 방금과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테다.
내가 보기에는 마탑주도 아니마와 마찬가지로 다분히 감정적으로 보였다.
냉정한 척 굴고 있지만, 사과를 해 봤자 받아줄 리 없다는 생각에 지레 겁먹고 도망가는 꼴이었다.
잘못을 했고 그것을 후회한다면, 상대방에게 사과하고 반성하며 잘못을 개선하려 노력할 생각을 해야지.
저렇게 뻗대서야 제자리걸음은커녕, 점점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사이만 틀어질 뿐이다.
졸지에 조손 사이에 끼게 된 에드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구나, 에드나. 너라도 아니마의 곁에 있어 줘서.”
“함부로 우리 언니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
두 사람의 대치를 보고 있노라니, 급작스럽게 이유 모를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문득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취업을 하겠다며 다짜고짜 수도에 올라온 이후. 번번이 낙방하며 자신감이 떨어져, 얼굴을 보러 오라는 가족들의 편지를 무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에는 없지만, 공작가 보좌관이 되고 난 이후에는 가족들을 보러 가긴 했겠지?’
프라시더스 공작가는 제국 최고의 직장으로 복지 또한 훌륭했다.
휴가 제도 또한 잘 마련되어 있으니 분명 그러했을 테다. 한데도 가족들이 그리워진 건 내게 그 기억이 없는 까닭이겠지.
성직자들과 마탑주가 돌아가고 나면 세르펜스에게 물어봐야겠다.
내 가족들은 잘 지내느냐고.
“마탑주님은 손녀분에게 비난을 듣고 싶어서 오신 겁니까?”
“아···! 못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제게는 사과를 잘하시네요?”
“···면목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면목,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염치도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삐딱선을 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부러운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비꼬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어르신에게 너무 심했나?
뒤늦게 후회가 찾아왔지만, 이제 와서 태도를 달리하는 것도 이상할 듯싶어 계속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시온···, 크흠! 리벨론 님 맞으십니까?”
에드나의 이름을 말했다가 아니마에게 한소리 얻어먹은 게 마음에 걸렸던 걸까?
마탑주가 나를 부르다 말고 아니마의 눈치를 살피며 호칭을 수정했다.
정작 아니마는 내 이름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맞는데, 왜요?”
“이전에 경고해 주신 것에 관해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 예. 많이 감사하세요.”
대체 내가 뭘 경고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아니꼽다는 태도를 계속 유지하며 건성으로 대답하자, 마탑주를 바라보는 성직자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마치 ‘신의 사자께서 저리 거리를 두신다니, 이단인가?’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다.
물론 진짜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냥 마탑주 때문에 본론에 들어가기는커녕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있으니. 그것 때문에 짜증이 나서 노려보는 거겠지.
“성검 일행이신 아니마 님께서 많이 불편해하시는 듯하니, 마탑주님께서는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배신자에 관한 보고라면 제가 대신 전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가 주십시오.”
교단 소속 인물 중, 혼자 다른 복장을 한 이가 대화 진행에 방해되니 꺼지라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래, 분명 그런 이유로 기분이 상하여 노려봤을 뿐일 테다.
설마하니 내가 좀 차갑게 대했다고 이단으로 몰아가겠어? 그것도 성검 일행인 아니마의 가족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