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4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50화(950/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9) >
“아무튼 당장 큰 이상이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불안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두 이단 심문관들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던 레안드로가 점점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근심 어린 얼굴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겨우 웃음을 지었던 테일러가 다시 울적한 낯으로 되돌아갔다.
왜 애를 기죽이고 그러느냐고 따질까 하다가, 남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치만 정화하는 게 불가능하다니 뭐 어쩌겠습니까? 아! 혹시 레안드로 님은 가능하세요?”
“성검의 주인이신 휴마누스 님이나 세르펜스 님께서도 못하신 일이라면, 저 또한 불가능할 겁니다.”
추기경이라길래 살짝 기대했건만, 못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와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여기는 뭐하러 온 건가 싶다.
그냥 예의상 인사를 건네러 온 거려나?
“혹시 교황 성하···. 그러니까, 슈테판 님이시라면 가능할까요?”
“세르펜스가 못 하는 거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거야.”
내 물음에 답한 건 레안드로가 아닌 휴마누스였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고, 얼굴에는 씁쓸함이 짙게 서렸다.
희망 고문이 될까 봐 마지못해 진실을 말하는 자의 표정이다.
세르펜스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력’에 한정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신성력을 다루는 실력 또한 교황 이상이라니···?’
그가 성검의 주인 예정자로서. 그리고 공작으로서 수많은 지식과 기술들을 익혀야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몹시 경탄스러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절망스럽기도 했다.
결국 내 머릿속에 심어진 마기를 제거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므로.
“저, 시온 님. 그런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런 얘기를 하기 송구스럽지만···. 저도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으나···. 악숭 세력이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트릴까 봐 저어되어···.”
가뜩이나 심란한데 추기경이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무겁게 운을 뗐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대는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진땀이 흐르며 긴장됐다.
도대체 무슨 얘기길래 저리도 망설이나 싶어 불길함마저 엄습했다.
“본론만 간단히 얘기해 주세요.”
“신의 사자께서 마기를 품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는 날엔,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겁니다. 하여 마력 구속구를 착용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난 또 뭐라고.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에 긴장이 탁 풀렸다.
신성력 보유자가 마기를 더 예민하게 느낀다 뿐이지, 오러나 마력 보유자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내가 마기를 잘 갈무리하여 드러나지 않게 꼭꼭 숨길 수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내 것도 아닌 기운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그게 됐으면 진작에 내다 버렸을 거다.
어쨌든 명색에 신의 사자라는 인간이 마기를 풀풀 풍기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신의 사자’라는 명칭 앞에 ‘마’자가 붙기 딱 좋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력 구속구의 착용은 필수다.
“정말 괜찮겠는가? 그런 걸 목에 걸어도···.”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금속이라 꽤 무겁다.”
세르펜스의 말에 급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용도야 어찌 되었건, 사람이 착용하라고 만들어진 물건이니 못 차고 다닐 정도는 아니겠지.
일단 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도 늦지 않으리라.
“목 근육 단련되고 좋겠네.”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하니, 세르펜스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마지못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지난 몇 년간의 기억이 사라지긴 했으나, 세르펜스가 어떤 생각으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인품도 몹시 훌륭했거니와 그는 줄곧 나를 안심시키고자 노력했으니까.
그러니 방금 억지로 웃어 보인 건 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걸 티 내면 내 불안감에 불을 지피는 꼴이니.
내가 안심할 수 있게 웃어 보이려고 노력한 결과겠지.
얼굴만 천사 같은 게 아니라 마음씨까지 천사처럼 선량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르펜스에게 천사펜스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로 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온 님.”
나와 세르펜스의 대화가 일단락되자 레안드로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마력 구속구 착용은 나를 위한 조언이기도 했다.
그러니 레안드로가 내게 감사를 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해는요, 무슨. 그냥 제가 괜한 오해를 사는 게 싫어서 알겠다고 한 건데.”
“과연 듣던 대로 참으로 너그러우십니다.”
“···그보다 이제 슬슬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죠?”
레안드로는 마탑주를 쫓아내며 배신자가 어쩌고 하는 말을 했다.
또한 유지스는 마탑이 무너진 게 내부의 배신자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 얘기들을 상기하고 있으려니, 레안드로의 입에서 해당 주제가 튀어나왔다.
“일단은 마탑의 붕괴를 초래한 배신자의 정체에 관한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거 말고 또 있어요?”
“다른 건 시온 님께서 마탑주에게 경고하신 일에 관한 겁니다.”
하나는 마탑에 관한 거고 또 하나는 마탑주와 관련된 것이다.
마탑주가 괜히 여기까지 왔던 게 아니었나 보다. 그래 봤자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쫓겨나 버렸지만 말이다.
쫓겨난 게 내 쌀쌀맞은 태도 때문이었다는 걸 떠올리니 괜히 미안해졌다.
“마탑의 보호 및 유지를 위해 상시 가동되어야 할 중추 마법진을 고의로 훼손한 건, 문지기 업무를 담당한 마법사 중 하나인 ‘버드렝 웨르미스’라고 합니다.”
“헐···. 배신자에게 문지기 일을 맡기다니, 그거 완전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음?’ 하고 의문스럽다는 소리를 내더니, 마치 자신을 불렀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느낌이 그랬다는 것일 뿐. 진짜로 그런 의미로 나를 바라본 건 아닐 테다.
갑자기 의문점이 떠올라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세르펜스가 내게 말을 붙였다.
“우리가 예전에 마탑을 방문했을 당시 에드나 씨와 언쟁을 벌였던 자다.”
나는 ‘버드렝이란 사람 말이야?’ 하고 되묻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아-! 맞다, 그 사람이 그런 이름이었지?’ 하고, 깜박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 척 연기했다.
퍽 자연스러웠는지 성직자 중 내 반응을 미심쩍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연기에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고위 귀족 가문이 아니라 어디 극단에 이력서를 넣어볼 걸 그랬다.
보좌관이 아니라 배우를 목표로 했다면 백수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었을 텐데.
“에드나 님, 그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주제에 오만한 새···, 세상에서 제일 좀스러운 사람이었어요.”
레안도르가 이번에는 마탑 소속 마법사인 에드나에게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에드나 저 사람 방금 ‘새끼’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바꾸지 않았나?
성직자들 앞이니 언어를 순화하려고 한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더 심한 말이 되어버렸다.
아무렴 ‘세상에서 제일 좀스러운 사람’보다는 그냥 ‘새끼’가 낫지.
“마탑은 왜 그딴 사람에게 문지기 업무를 맡긴 거래요?”
“원래 마탑은 설립 당시부터 실력 없는 자들에게 문지기 일을 맡겼어요. 누군가의 시간을 낭비시켜야 한다면, 실력 없는 이의 시간을 낭비시키는 게 더 나으니까요. 실력 있는 이들은 그 시간에 연구하여 성과를 내는 게 더 효율적이잖아요.”
“하지만 그러면 악숭 유혹에 쉽게 넘어갈 법한, 열등감 넘치는 마법사가 외부와 쉽게 접촉 가능한 문지기 일을 맡게 되는 셈인데. 그거 정말 효율적인 거 맞아요?”
“···어릴 때 효율적이라고 들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시온 씨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정말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네요. 다시 탑이 세워지면 시스템을 바꿔 보자고 제안해 봐야겠어요.”
에드나가 손바닥 뒤집듯 의견을 뒤집었다.
어른들이 귀찮은 일을 서로 미룬 결과 세워진 규칙일 뿐. 효율 따윈 쥐뿔도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나 보다.
아니면 알고는 있었는데 문지기 일을 하기 귀찮아서 외면했거나.
어쨌든 에드나는 그렇게 나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레안드로에게 배신자의 개인 신상 정보인지 뒷담화인지 모를 얘기를 늘어놓았다.
요약하자면 능력도 없는 주제에 노력도 안 하고. 그러면서도 뒤처지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만만해 보이는 사람에게 시비나 거는 놈팡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란 뒷배도 없고 저보다 나이도 어린 여자애, 즉 에드나였다.
아니마에겐 마탑주라는 배경이 있어서 시기하며 노려볼지언정, 대놓고 시비를 걸지는 못했다나?
에드나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진짜 못났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악숭할만한 놈이 악숭했네요.”
“버드렝 씨처럼 구는 마법사들이 마탑에 꽤 많았던 터라, 그 이론대로라면 조금 곤란한데요?”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법을 배우느라 바빠서 인성은 안 배웠나 봐요?”
“···그러고 보니 마탑 차원에서 인성 교육을 시행한 적이 없긴 하네요.”
슬슬 마탑이 무너진 게 다행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인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뛰어난 마법 실력은 그저 폭력의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대로 한 100년만 더 고였으면 예비 법숭이 양성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이곳에 소환되었던 악마들도 처치했으니. 혼란을 초래할까 봐 덮어둘 수밖에 없었던, 모든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한 이단 색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레안드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싸움 도중 뒤통수 맞지 않으려면 색출 작업은 재깍재깍 진행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미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내게 그 이유를 설명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가 없어, 물어보지는 못하겠지만.
‘어차피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해.’
그렇지 않아도 성벽이 무너지자마자 멋대로 마탑 부지로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이곳을 전장의 중심으로 삼은 판국이다.
그래놓고 마법사들을 의심하며 조사하려 들었다면 분명 내분이 일어났겠지.
외부의 적을 두고 서로 반목하다 맥없이 무너지는 것보다야, 버티면서 뒤통수 한두 대 맞아주는 게 낫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드리는 말씀인데, 마탑주에게 ‘대사제’라 불리는 자의 편지를 전달한 마법사 또한 악숭 세력의 끄나풀이었습니다.”
“그냥 우편으로 보내지, 뭐하러 사람을 썼대요?”
“편지를 전해달라 부탁한 사람이 마탑주의 젊은 시절과 무척이나 닮았으며, 먼 곳에서 힘들게 찾아왔다 하니 한 번 만나보시는 게 좋겠다는 등. 마탑주가 편지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남을 부추기는 역할을 맡았다는 모양입니다.”
저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버드렝인지 버드렁니인지 뭔지 하는 놈은 놓쳤지만, 편지를 전달한 놈은 잡아서 심문까지 마친 모양이다.
그나저나 ‘대사제’는 또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다.
일단 대사제가 편지를 보내달라 했고 마탑주의 종손이 악숭이라 하였으니, 그 종손이라는 놈이 대사제겠지?
그리고 내가 마탑주에게 경고한 내용은 ‘님 종손=대사제’라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한다.
대충 감이 오긴 했지만, 그걸 입 밖에 꺼내 놓으며 잘난 척하지는 않았다.
만약 내 추측이 틀렸다면 기억을 잃은 사실을 들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