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5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53화(953/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12) >
푸른 막이 우리가 있는 공간을 감쌌고, 나를 제외한 이들의 추억 여행이 재개되었다.
그 이야기 속의 시간이 현재와 맞닿은 건 하늘이 어둑해진 즈음이었다.
“다행히 오늘이 다 가기 전에 끝났네요. 혹시 궁금한 점 있으신가요?”
유지스가 친절한 미소를 띠며 질문할 것이 있는지 물어왔다.
나는 그런 유지스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 뒤, 내가 열심히 필기한 종이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스툴 왕국 혁명을 마치고 아르케 왕국으로 넘어가기 전, 대략 2~3주 정도 시간이 묘하게 뜨는 것 같은데요? 이때 쌍둥이 중급 악마랑 싸웠다는 건 알겠는데, 놈들이랑 몇 주에 걸쳐서 싸운 건 아닐 거 아닙니까? 닼숭이가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니 빨리 아르케 왕국에 가야 하는 상황 아니었어요?”
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질문하자, 유지스의 웃는 표정이 흐려지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차 하는 표정이다.
유지스가 ‘그게···.’ 하고 말끝을 흐리며 세르펜스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로 따져 보았을 때, 악숭 세력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거든요. 그래서 잠시 여정을 멈추고 휴식을 겸한 수련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어요.”
“기왕 쉴 거면 아르케 왕국에 가서 쉬는 게 낫지 않아요?”
“그렇기는 한데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대련하는 건 좀 그래서요. 특히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세르펜스는 짱 세구나, 하고 생각하겠죠.”
“···그 얘기도 틀린 건 아니네요.”
“휴마누스 말고, 세르펜스가 성검의 선택을 받았어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죠?”
“네, 맞아요.”
유지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래서 사람이 오가지 않는 곳에서 수련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수긍이 가는 내용은 아니었다.
아까 유지스는 바스툴 왕국 혁명을 마치고 아르케 왕국 행을 결정한 이유로, 내가 닼숭이에 대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일단 닼숭이에 관한 경고를 먼저 전하고 나서 수련을 시작하는 게 올바른 순서다.
아무리 악숭 놈들이 당장 움직일 기미가 없더라도 말이다.
자신의 설명에 오류가 있다는 걸 유지스 본인도 알고 있는지, 그녀의 얼굴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질문 따위 괜히 받았다는 표정이다.
세계수가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다치게 된 이유에 관해서도 설명하지 않더니.
이쯤 되니 시간 관계상 중요하지 않은 설명을 건너뛰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들은 분명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그럼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악숭 살롱 일이 끝나고 저랑 세르펜스만 따로 움직인 이유가 뭡니까? 그것도 한 달 넘게.”
“선우가 대륙 곳곳에 숨겨져 있는 악숭 세력의 은신처 위치를 계시받았거든요. 그래서 적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대피하기 전에 빠르고 은밀히 처리하기 위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전 아닙니까? 전투에 쥐뿔도 도움 안 되는 저랑 세르펜스가 둘만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어제만 해도 최상급 악마 하나를 상대로 세르펜스와 휴마누스, 거기다 테일러 님까지 가세했는데도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했다면서요.”
최상급 악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급 악마만 되어도 세르펜스 혼자 나를 지키며 싸우는 건 무리이지 않을까 싶다.
무모해도 보통 무모한 짓이 아니다. 그런데 말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당장 나만 해도 세르펜스가 우리 둘만 따로 다니자 같은 소리를 하면, 제정신이냐고 물어볼 거다.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하나 더 있네요. 악숭 살롱의 악마는 대체 어떻게 해치운 겁니까? 놈은 거의 최상급에 근접한 수준이었고, 우리 쪽은 주요 전력인 휴마누스와 아니마가 늦게 합류했다면서요?”
“휴마누스가 도착했을 땐 악마가 많이 지쳐있었으니까···.”
“세르펜스랑 다른 일행들도 엄청 지쳤을 거 아닙니까? 더구나 거기에는 악마를 치료할 수 있는 악숭 사제까지 있었다면서요?”
“그, 글쎄요? 그땐 건물 안과 밖이 차단된 상태였던지라···. 밖에 있던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내 거듭된 질문에 둘러댈 말이 사라졌는지, 유지스가 나 몰라라 하며 대답을 피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상황을 아는 사람은 그녀 외에도 많았으니까.
나는 일행들을 쭉 둘러보았고, 다 같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내 눈을 피했다.
“다들 저한테 뭘 감추고 있는 겁니까?”
“내가 성검을 사용하여 그 악마를 처리했다.”
세르펜스의 깜짝 발언에 나는 반말을 쓴다는 것조차 까먹고 ‘네···?!’ 하고 반문했다.
성검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오직 성검의 주인뿐이며, 현 성검의 주인은 휴마누스 아닌가?
내가 방금 들은 문장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을 알면 선우도 내가 성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내 과거를 알고 있으며, 나를 무척이나 아꼈으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선우는 모든 것을 잊었잖은가?”
“······.”
얘기를 듣자하니 세르펜스는 휴마누스보다 강하고, 성검을 잡으면 더더욱 강해지는 모양이다.
만약 어제 성검이 세르펜스의 손에 있었다면 최상급 악마를 쉽게 처리했으려나?
어쩌면 내가 기억을 잃는 일 또한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이라도 한 듯, 세르펜스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세르펜스는 성검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서 살아온 세월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모두가 내게 멋대로 기대하며 책임을 떠넘기기만 할 뿐, 그 누구도 나를 도우려 하지 않았던. 외로웠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혹시 살롱의 악마를 처치한 후 나랑 둘이서만 다닐 땐···.”
“내가 성검을 지니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뭐라 따질 말이 없다.
세르펜스가 성검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숨기고 있다는 게 황당해서가 아니다.
대체 얼마나 힘들었길래 성검 트라우마가 생긴 걸까 싶어서, 황망함에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를 겁 많고 이기적인 사람이라 비난하더라도 이해하겠다.”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러니까 세르펜스도 그런 말 하지 마.”
“···속여서 미안하다.”
“괜찮아, 그럴만한 이유였잖아.”
“······.”
세르펜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 올려 미소를 짓고자 애썼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마주하다가,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필기 종이를 한데 모아 곱게 접었다.
앞으로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내가 세르펜스에게 성검을 잡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는 게 속 편했을 텐데 괜히 물어봤다.
“이제 그만 씻고 잘 준비 할까요?”
나는 모두를 향해 그리 말했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 얼굴이 피곤해 보였는지, 일행들은 내가 제일 먼저 씻을 수 있도록 양보해 주었다.
씻는 내내 후회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일행들이 다 같이 입을 맞춰 숨기려 드는 데에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뭐하러 그걸 캐내려 해서···.’
사실 이유는 알고 있다.
일행들에게 나는 친숙한 존재일지 몰라도 나는 그들이 낯설었다. 그들이 말하는 나 또한 생소했다.
그런데 자꾸만 무언가를 감추려고 하니 마음속에 의심이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세르펜스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 ··· ······ ······. }
모처럼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분위기 잡고 반성하는데 귀가 간질간질하다.
귀에 물이 들어갔나 보다. 얼른 씻고 나가야겠다.
마력 구속구를 착용하면 머리를 감을 때 고개를 숙이지 못하여, 서서 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휴마누스가 욕실로 들어가며, 내게 어제 잤던 방으로 가면 된다는 말을 전했다.
거실에는 2인용과 1인용 침대가 각각 하나씩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정작 침대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씻으러 다른 건물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뚱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있는 세르펜스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푸로르. 그리고 마법용 실험 도구들을 살펴보는 에드나와 아니마의 모습이 보였다.
저 여성진 세 명이 거실에 있던 침대의 주인인가 보다.
나머지는 다른 방에서 잘 준비를 하고 있으려나?
“세르펜스는 그렇다 치고, 세 분은 왜 여기에 계세요?”
“휴마누스가 너랑 세르펜스 나리를 둘만 두지 말라던데?”
푸로르가 입을 쩌억 벌려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런 말을 듣긴 했다.
어제 하루만 내 상태를 지켜보겠다는 느낌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이럴 생각인가 보다.
목에 마력 구속구를 착용하고 있어서 그런가 괜히 감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유가 이유였으니 딱히 화를 낼 생각은 없다.
다만 인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드시 감시를 받아야 한다면 같은 남자인 윈스톤이 그나마 좀 편할 것 같은데.
“그런데 어째서 세 분이 남아 계시는 겁니까? 윈스톤이 아니라?”
“윈스톤 경은 세르펜스 나리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잖아.”
즉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의 말을 안 들어도 되고,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이곳에 배치해 뒀다는 거려나?
그렇다면 에드나는 세르펜스에게 고용되어 월급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아니마를 따라온 건가 싶다.
“세르펜스는 대체 평소 행실이 어떻길래, 휴마누스가 이렇게나 철저히 신경 쓰는 거야?”
“선우가 내게 너무나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서 그렇다. 만에 하나 인질로 잡히게 된다면···.”
“잡히게 된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데?”
반쯤 농담으로 가볍게 던진 질문에 세르펜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으음···, 가정하는 것조차 끔찍하군.”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왜 궁금하게 운을 떼기만 하고 말은 안 하는 거야?”
“예전에 선우가 내게 해 준 얘기가 떠오르는군.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
세르펜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그대로 끝이 났다.
고의성이 다분한 그 행동에 하마터면 세르펜스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어이없지만, 차분하고 인내심이 뛰어난 내가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 진짜 푹신하다. 완전 고급 침대! 근데 이거 아침에 집어넣지 않았어? 그래서 난 오늘 여기서 머물지 않고 딴 데 갈 줄 알았는데.”
“이런 난잡한 곳에 침대를 오래 꺼내 두기 싫어서 넣어두었을 뿐. 아직 어디로 가야 한다는 계획은 없다. 그래도 이런 걸 계속 선우의 목에 채워둘 수는 없으니, 되도록이면 내일 이곳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세르펜스가 내 목에 걸린 마력 구속구가 못마땅하다는 듯, 검지로 툭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침대를 집어넣은 이유가 참으로 놀랍다.
벌레가 있다면 이해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굳이 귀찮게 침대를 넣었다 뺐다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 실로 의문이다.
‘그보다 지금 갈 곳도 없는데 그냥 무작정 길을 나서서 노숙하겠다는 건가?’
마력 구속구를 차고 욕실과 지붕 있는 집에서 지내느냐, 마력 구속구를 벗고 인적 없는 곳에서 노숙을 하느냐.
선택지가 이거 두 개뿐이라니 세상이 내게 너무 가혹하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씻고 온 휴마누스가 쾌활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감시역 두 사람과 덤으로 딸려온 한 사람이 거실로 나갔고, 세르펜스도 씻으러 갔다.
순식간에 휴마누스와 단둘이 남겨졌다.
“아도르랑 제가 둘만 있는 건 안 된다면서 휴마누스는 되나 봐요?”
가라앉은 정적이 어색하여 뭐라도 말을 꺼낸다는 게, 어째 시비를 거는 듯한 말이 튀어나왔다.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니 시비 걸리는 일은 매우 드물었을 텐데.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그는 외려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랑 세르펜스가 둘만 있을 때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르펜스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실의에 빠질 게 뻔하거든. 하지만 나랑 함께 있을 때 문제가 생긴다면 적어도 남 탓은 할 수 있게 되지 않겠어?”
“휴마누스는 안 그렇게 생겨서, 엄청 희생적인 성격이네요.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아서 사람들에게 듣지 않아도 될 욕도 듣고 있다면서, 세르펜스에게 성검을 떠넘기려 하지도 않고.”
“희생적인 건 내가 아니라 세르펜스지. 나는 그냥 그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겼던 짐들을 다시 되돌려받았을 뿐이야.”
“그럼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고 정정할게요.”
“하하! 그 표현은 마음에 드네.”
휴마누스가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조금 전만 해도 감시를 받는 듯한 느낌에 살짝 불쾌했는데 그런 기분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그저 친구를 몹시 아끼는 좋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