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5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54화(954/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13) >
‘이렇게나 좋은 친구가 곁에 있는데, 세르펜스는 어째서 유독 나한테 친근하게 구는 거지? 아니, 이걸 그냥 친근하다고 표현해도 되는 수준인가?’
어지간하면 내 상태가 좋지 못하니까 걱정하며 신경 써 주는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보자 보자 하니 어지간한 정도가 아닌 것 같다.
한 침대를 쓰는 것까지는 사정이 있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동생이라는 이유로 제온을 채용했다고 하질 않나,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하니 더욱 잘 가꿔보겠다고 하질 않나, 매일 아침 내 가슴팍에 부토니에를 달아주는 게 일상이라 하질 않나.
‘과거의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세르펜스가 이러는 거지?’
낮에 들었던 정보는 선택의 날 이후 터진 사건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전에 벌어진 사건에 관하여 들은 것은 얼마 없다.
법숭이들이 나를 세미타 거리로 유인했고 세르펜스가 몰래 뒤따라와 나를 구했다는 것.
그리고 나와 세르펜스, 유지스가 ‘일루미나티’라는 가상의 단체로 위장하여, 투기장에서 구르던 윈스톤을 구출했다는 것.
위의 두 가지가 전부였다.
심지어 이 부분은 일행들이 코멘트를 붙이기 전이라서 딱 사건의 개요만 들었을 뿐이다.
즉, 나와 세르펜스가 어쩌다 친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성격이 바뀐 이유 또한 들을 수 없었다.
일행들의 얘기 속에서 ‘소심하고 유약하며 조심성 많은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르펜스에게 과분한 대우를 받으며, 천둥벌거숭이처럼 까불거리는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었다.
오늘은 이미 많은 양의 정보를 받아들인 까닭에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게다가 밤도 늦었으니 모든 얘기를 듣는 건 힘들겠지. 그래도 일부만이라도 들어두고 싶다.
어떤 과정을 거쳐 내가 세르펜스와 가까워지고, 어째서 내 성격이 이렇게나 많이 달라졌는지.
그것을 알면 지금 내가 느끼는 괴리감을 줄이고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
베개를 꽉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 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샤워를 마친 세르펜스가 방으로 들어왔고, 나는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기겁하고야 말았다.
얇은 셔츠 차림에 물기가 맺힌 젖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그 모습이란!
“지금 그 꼴을 하고 여자 셋이 있는 거실을 가로질러 온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온 세상의 여자들을 유혹할 듯한 모습을 한 주제에, 세르펜스는 순진무구한 낯으로 맑은 녹색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고의는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더 나빴다.
나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서 세르펜스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세르펜스의 뒤로 가 무릎으로 서서, 그가 목에 두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덮고 마구 문질렀다.
“으음···, 기억을 잃더니 손길이 많이 거칠어졌군.”
그렇게 말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에서 반가움이 묻어났다.
내가 그의 머리를 말려준 게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보다.
“이런 적이 많았어?”
“꽤 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기차 특실 칸에서 함께 머물 때에도 선우가 내 머리카락을 말려주었지. 그때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는데···.”
세르펜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낯가림도 심한 내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머리를 말려주겠다고 나섰을 리 없다.
그러니 어느 정도 친해진 이후에 있었던 일이겠지.
기차가 언급된 걸 보면 친해져서 같이 기차 여행이라도 떠났던 거려나?
“그런데 우리는 언제,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야?”
“기점이 된 건 방금 언급한 날 있었던 일 덕분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말려주겠다며 나섰나 보다.
나는 머쓱함을 느꼈으나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휴마누스를 힐긋거렸다.
우리의 추억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고 싶지 않다더니, 휴마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어···, 혹시 내 앞에서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혹시는 무슨 놈의 혹시입니까? 대놓고 말하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
“기억을 잃기 전이었다면 눈치가 많이 늘었다고 말해줬을 텐데···.”
눈치 없는 휴마누스의 발언에 나도 모르게 면박을 주고 말았다.
속으로 아차 했는데 의외로 휴마누스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의 눈치가 늘어서 이 정도인 거라며, 본래는 얼마나 참담했던 것인지 상상케 했다.
제국의 황태자가 이래서야. 장차 제국의 미래가 걱정이다.
그가 황위에 오르기 전에 최소 일반인 수준의 눈치를 갖출 수 있도록, 열심히 갈궈야겠다는 책임감이 샘솟았다.
이러한 내 생각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휴마누스는 세르펜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어.”
“······.”
“그, 그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봐도 소용없어! 이유는 충분히 설명했잖아?”
“······.”
“선우야, 쟤 입술 삐죽거리는 것 좀 어떻게든 해 봐.”
휴마누스가 내게 무리한 것을 요구해왔다.
세르펜스의 입술을 눌러서 집어넣을 수도 없고,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뭐 어쩌라는 거냐는 눈으로 휴마누스를 쳐다보며 계속 세르펜스의 머리를 말렸다.
내게 도와줄 의사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휴마누스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그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눈을 뜨고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선우가 너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자리를 비켜줄 수는 없으니, 세르펜스가 자신의 앞에서 나와의 추억을 말하도록 설득할 심산인가 보다.
그런 휴마누스의 말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기울어진 세르펜스의 고개를 다시 세워서 마저 머리를 말리는데,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편히 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르펜스가 뒤로 가서 내 머리를 말려 주었다.
휴마누스는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건 안중에도 없는지, 고개를 돌린 채 큰 결심을 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네 변화로 인해 선택의 날에 그···, 그런 일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도대체 어쩌다가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건지 나도 알아야겠어.”
“선택의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요?”
“······.”
먼저 화제를 들고 온 주제에, 자세히 말하기도 싫다는 듯 휴마누스가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반드시 그에게서 들어야 할 얘기는 아니었으므로 상관없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불가항력적인 그 상황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푸하하하하하! 아, 미친! 불가항력이래! 거기에 활기와 새로운 힘이라니! 그래서 그곳에 활력은 좀 생기셨습니까?”
“내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활기 넘쳤어!”
쓸데없는 정보를 입수하고 말았다.
나는 수치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는 휴마누스를 쳐다보며 또다시 한바탕 웃어 재꼈다.
덕분에 진짜 제대로 웃었으니 세르펜스를 설득하는 일을 도와주어야겠다.
‘어차피 세르펜스나 휴마누스 중 한 명은 의견을 굽혀야, 내가 원하는 정보를 들을 수 있기도 하고.’
그렇다면 괜한 고집을 부리는 세르펜스보단,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겠다는 휴마누스를 지지하는 편이 낫다.
더욱이 오죽했으면 불가항력적인 이야기까지 꺼냈을까 싶기도 하고.
정말 눈물겨운 우정이 아닐 수가 없다.
“세르펜스, 휴마누스는 이미 소중한 걸 잃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가 양보하자.”
“안 잃었어! 잘 있다고!”
“품위와 자존심을 말한 건데요? 남성성이 아니라.”
“······.”
휴마누스의 눈물겨운 희생에 감동한 것인지, 아니면 그를 동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르펜스는 휴마누스의 앞에서 추억 얘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음 마법이 부여된 스크롤을 찢자, 휴마누스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선택의 날 얘기를 하기 전에 사용해 주지···.”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겁니까?”
“귀족들 사이에서는 얘기가 좀 퍼지긴 했지만···. 교단에서 나서서 그 일을 함구시키기도 했고, 나도 그걸 굳이 일행들에게 얘기하진 않았으니까.”
“하긴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닐 만한 얘기는 아니긴 하죠.”
“······.”
더 놀리면 진짜 삐칠 것 같다.
나는 피식피식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세르펜스에게 기차 특실 칸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달라 부탁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내가 했던 말들이 세르펜스의 입을 통해 온전한 문장으로 흘러나왔다.
신의 계시를 통해 세르펜스의 과거를 알고 있던 내가 도와주겠다 말하며, 자신 대신 눈물까지 흘렸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선우는 그때의 일을 두고 너무 섣부른 행동이었다며 자책했지만, 나는 당신의 그 서투름 속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세르펜스는 그렇게 말을 마무리 지으며 내 머리를 말리던 수건을 치웠다.
그러고는 내 옆으로 와 빙그레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가 얼마나 내게 고마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오지랖 넓은 성격은 아니다. 제 앞가림하기 바빠 남을 돌볼 여유 따윈 없다,
하지만 귀가 얇아 남의 얘기에 쉽게 휩쓸리는 타입이니.
신이 계시를 통해 세르펜스의 과거를 알려주었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 만도 하다.
세르펜스를 안쓰럽게 여기는 그 마음에 동조하고, 신이 자신을 믿어서 중요한 일을 맡겼다고 기고만장해져 사명감에 사로잡혔으리라.
내게 접근한 게 신 룩스메아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악숭이가 세르펜스에 관한 유언비어를 떠들며 그를 모함했더라면,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테다.
그랬다면 지금 같은 관계는 맺지 못했겠지.
어쩌면 그에게 큰 상처를 입혔을 수도 있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선우가 하는 말이어서, 세르펜스 네 마음이 움직였던 거겠지···?”
휴마누스가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르펜스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차마 딱 잘라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뭐하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저런 식으로 답을 한 것이리라.
이대로라면 정적이 가라앉을 분위기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세르펜스에게 말을 붙였다.
“그거 말고는 또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얘기하겠다.”
“에계? 좀 더 얘기해 줘! 스크롤 값이 아깝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야 하지 않겠는가?”
“쪼잔해.”
“쪼잔한 건 스크롤 값에 연연하는 선우의 금전 감각이다. 스크롤 따윈 몇백 장도 사줄 수 있으니 아까워하지 마라.”
세르펜스가 굉장히 설레는 말을 했다.
기왕이면 현금으로 달라고 농담을 던져볼까 했으나, 그랬다간 돈뭉치에 깔려 죽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어서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고, 부른 적 없는 꿈이 찾아왔다.
기억에는 남지 않았으나 아련하고도 그리운 꿈이었다.
꿈을 꾸는 내내 즐거웠고 마음이 따뜻했다.
그 반작용일까?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따스함이 사라지고 서늘함이 엄습했다.
즐거운 마음이 도려내진 듯 공허했으며, 아련함과 그리움은 쓸쓸함과 외로움만 남기고 떠나갔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분명 행복했던 것 같은데.
깨어나니 이유 모를 서러움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