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5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55화(955/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14) >
{ ···째서 ······, 안······. }
“선우, 괜찮은가?”
먼저 깨 있던 세르펜스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어왔다.
일순간 그의 목소리가 아닌 작은 소음이 겹쳐 들린 것도 같다.
아마도 단순한 착각에 불과하겠지. 그저 잠이 덜 깬 탓이리라.
“응, 괜찮아.”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꿈자리가 조금···.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맛있는 음식이 잔뜩 차려진 파티에 참석해서, 뭐부터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엄청나게 맛있어 보이는 걸 발견해서 막 그것을 먹으려는 찰나 잠에서 깬 느낌? 아무튼 그래서 좀 멍때린 것뿐이야.”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꿈에서 찾지 말고 내게 말해라. 어떻게든 구해다 줄 터이니.”
세르펜스가 안도한 듯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는 결코 빈말로 한 소리가 아닐 테다. 어제 먹었던 ‘호두 과자 뇌이크 에디션’이 바로 그 증거다.
정말 고마운 얘기였지만, 음식을 운운한 건 그냥 비유에 불과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워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뭐였더라?’
곰곰이 고민해 보았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기야 잠에서 깬 직후에도 떠오르지 않았던 꿈 내용이 뒤늦게 떠오를 리 없었다.
눈을 뜬 그 순간 흩어지려는 기억을 끌어모아 반복해서 되새기지 않는 이상,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휘발되어 사라지는 것이 꿈 아니겠는가.
나는 기억나지 않는 꿈을 억지로 떠올리고자 애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다고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는 건 아니지만.
{ ···금만 ······ 될······. }
또 귀가 간지러웠다. 아니, 귀가 아니라 머리가 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계속 누워 있으니까 잠이 안 깨나 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다른 일행들은 이미 일어나서 아침도 안 먹고 내 기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깨워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입 밖에 꺼내놓지는 않았다.
막상 꿈을 꾸는 도중에 깨어났더라면 무척 아쉬웠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아쉬웠다. 일어나지 말고 차라리 눈을 붙이고 좀 더 잘 걸 그랬나 싶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기억도 안 나는 꿈속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음식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식사 시간 내내 정신이 딴 곳에 가 있었다.
그 탓에 세르펜스가 몇 번이고 나를 불러 괜찮으냐고 물어보았다.
“그냥 잠이 덜 깨서 그래.”
“식사를 마치고 더 자고 싶다면 그리해도 괜찮다.”
“아니야, 됐어. 세수하고 나면 깨겠지.”
사실 약간이지만 솔깃하긴 했다.
어저께 세르펜스가 오늘 떠날 예정이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딱히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하루이틀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어도 상관은 없으리라.
그러나 게으름은 한 번 피우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계속해서 몸이 늘어지기만 할 뿐이다.
나는 후다닥 그릇을 비운 뒤, 욕실로 가서 얼굴에 물을 끼얹고 내친김에 양치까지 마쳤다.
그러자 어수선했던 마음이 한결 상쾌해졌다.
기분 좋게 거실로 돌아오니, 일행들은 깨끗이 치운 테이블에 둘러앉은 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니 오늘 바로 이곳을 떠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세르펜스가 일행들을 향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앞부분은 못 들었으나 어제 그가 내게 한 말이 있으니 유추하기는 쉬웠다.
연약한 일반인에 불과한 내가 마력 구속구를 차고 있는 게 안쓰럽다는 이유를 들어, 일단은 도시를 떠나고 보자는 얘기를 하고 있던 거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하긴. 이런 구석진 지역에 있다간 저번처럼 대륙 횡단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 대륙 중심부로 가서 대기하는 게 낫겠네.”
휴마누스가 저런 말을 하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거로 보아, 내 추측이 틀린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프뤼네 왕국에 악마가 소환된 게 우리가 아레나 왕국에 있었을 때라지?
거리가 너무 먼 까닭에 이동하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고 하니,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일 만했다.
‘나는 세르펜스가 마력 구속구를 풀어주고 싶어서, 목적지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떠나자고 한 줄 알았는데···.’
아무렴 고작 그런 이유로 중요한 결정을 내렸을 리가 없지.
돌이켜 보니 자의식 과잉이었던 것 같아 뻘쭘해졌다.
나는 비어 있는 의자로 가서 슬그머니 앉았고, 그동안 일행들의 의견은 당장 이곳을 떠나자는 쪽으로 몰렸다.
내가 생각해도 그게 최선인 듯하여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불현듯 제국 수도에서 머물고 있다던 가족들이 생각났다.
그 순간, 자고 일어난 이후로 줄곧 내 마음을 어지럽혔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대륙의 중심부면 제국으로 가는 거 맞죠? 그럼 혹시 수도로 가는 겁니까?”
“거기가 일단 제국 땅이 맞기는 한데 수도는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해.”
“잠깐 들리는 것도 안 돼요···?”
“제국 수도는 방비가 잘되어 있잖아. 최대한 많은 사상자를 내서,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악숭이들이 그곳에 악마를 소환할 것 같지는 않으니. 굳이 가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황태자인 휴마누스의 가족 또한 제국 수도에 머물렀다.
그동안 계속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를 겪느라 가족 생각이 간절할 텐데.
성검의 주인인 자신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이유로 일정을 좌지우지할 수 없으니 꾹 참고 있는 거겠지.
대륙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휴마누스도 참는데, 내가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수도로 가자고 주장할 수는 없다.
{ 더 ······. }
– 똑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내 고개가 현관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이미 윈스톤이 서 있었는데, 아마 문밖의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것이리라.
윈스톤은 나름 일행의 리더라 할 수 있는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를 무시하고, 세르펜스를 바라보며 문을 열어줄지 말지 허가를 구했다.
세르펜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고 윈스톤이 문을 열었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웨일리안과 마탑주였다.
어제 그렇게 쫓겨나고도 마탑주가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이단 심문관이랑 같이 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예상치 못한 조합의 방문이다.
“웨일리안 님이 어쩐 일이세요? 그것도 아동 방임범이랑 같이···.”
내 말에 마탑주가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동 방임범이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라는 걸 알긴 아는 모양이다.
나는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의미를 담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마탑주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서 이자를 감시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계신 곳으로 향하길래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아동 방임이란 건···. 과연, 그래서 아니마 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거로군요. 이해했습니다.”
웨일리안이 그리 말하며 마탑주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마탑주의 악숭 의혹은 벗겨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실시간으로 심각해지는 중이었다.
하기야 아동 방임이 악숭할 짓이긴 하지.
모두의 차가운 시선을 한몸에 받은 마탑주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저쪽은 왜 우리를 찾아온 거래요?”
“대사제에 관해 얘기할 것과 아니마 님께 줄 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제 쫓겨나기 전에 해결했어도 될 일을 오늘까지 끌고 오다니, 괜히 의심스럽다.
그래도 대사제에 관한 건 들어봐야 할 것 같으니 일단 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세르펜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의자를 하나 꺼내어, 테이블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내려놓았다.
의심스러운 자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함일 테다.
마법사와 거리를 두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따로 견제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웨일리안이 세르펜스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마탑주를 의자에 앉혀놓고, 자신은 그 뒤에 가서 섰다.
명백히 죄인을 대하는 그 태도에 마탑주가 껄끄럽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반발하며 따지지는 않았다.
“대사제가 보낸 편지는 무시한 거 아니었습니까? 근데 놈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요?”
“정확히는 그의 조부라 할 수 있는 제 형님에 관한 얘기입니다.”
“행방불명 됐다던?”
“네, 그렇습니다.”
대사제 본인도 아니고 그 조부에 관한 거라니, 별로 중요한 내용은 없을 듯싶다.
아니마에게 줄 물건이 있다고 하면 웨일리안이 대신 전해 주겠다고 했을 게 뻔하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찾아올 핑계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형님은 저보다 더욱 뛰어난 마법사였습니다. 만일 형님이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마탑주 자리는 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요?”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딴 경고가 없더라도 악숭 대사제와 마주하게 되면 긴장하고 경계했을 테다.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참 알맹이가 없는 얘기라 생각했는지, 마탑주가 얼굴을 홧홧하게 붉히며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마에게 줄 물건이라는 건요?”
“그간 제 연구 일지를 정리한 것과 최근에 만든 마법 수식이 적힌 문서입니다.”
마탑주가 로브 안쪽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두꺼운 책자와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러자 웨일리안이 그것들을 가로채더니 다짜고짜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별 이상은 없는 물건이었는지 책자와 종이 뭉치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웨일리안이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니마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마탑주가 쌓아온 노력의 결실을 가만히 노려보기만 할 뿐.
펼쳐서 그것에 적혀진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이런 것을 자신에게 주느냐고 질문하지도 않았다.
마탑주는 그런 아니마를 재촉하지도 못하고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저런 걸 주는 이유는···. 아니,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으려나? 도움이 되라고 주는 걸 테니까.”
“제가 아니마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건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뿐입니다. 그걸 전해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럼 아니마가 성검 일행으로 선발되었을 때 주시지 그러셨어요?”
“당시에는 결과를 내지 못한 연구도 많았고···. 그때 아니마는 마법에 뜻이 없었던 까닭에, 줘 봤자 길거리에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습니다.”
성검 일행의 마법사가 마법에 뜻이 없어도 되는 걸까?
순간 마탑주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미심쩍었다.
하지만 푸로르가 ‘예전의 아니마라면 그러고도 남았지.’라고 중얼거리는 거로 보아, 사실인 듯했다.
마법에 뜻이 없는데도 성검 일행으로 선발되었다니, 그만큼 천재라는 뜻이겠지.
“아니마는 저보다 뛰어난 재능과 오성을 갖추었으니, 제가 만든 마법 수식에서 개선할 점을 찾아내어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마탑주가 나를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춰 말했다.
그냥 아니마에게 직접 해도 될 소리를 굳이 친하지도 않은 내게 말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얼마나 손녀를 대하는 게 불편하면 저러할까. 그러게 진작 잘하지.
“이제 와서 아니마를 신경 써 주는 이유가 뭡니까?”
기억을 잃은 탓에 아니마와 친분이랄 것도 없었으나 왠지 화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