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5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57화(957/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16) >
‘근데 이거 언제까지 쓰다듬어야 하는 거지?’
충동적인 행동이었던지라 그만둘 타이밍을 못 잡겠다.
누군가 말려주면 좋으련만. 곁눈질로 살펴보니 다들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딱 한 사람. 무탑주만이 이게 뭔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현재 그는 내 행동에 뭐라 말을 얹을 처지가 못 되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슬그머니 세르펜스의 머리통을 놓았다.
마구 흐트러진 청은빛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정돈하며 해야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생각을 마친 뒤 나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탑주님의 윤리 의식이 개판 났다는 게 밝혀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니마를 아낀다는 건 진심이겠죠?”
“···네. 아니마는 저의 자랑이자 보물 같은 아이입니다.”
“더는 하나뿐인 혈육이 아닌데도요?”
“그렇다 해도 소중하고 마음이 쓰이는 건,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아니마뿐입니다.”
말 그대로 지켜보기만 해서 문제였지만.
나는 그 점을 꼬집어 한소리 늘어놓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무탑주도 본인의 과오를 잘 알고 있으니, 얘기를 꺼내 봐야 시간을 낭비하는 꼴밖에 안 된다.
그러는 대신 다른 말을 일러두는 편이 나았다.
“탑주님은 아니마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거니까, 남은 평생 그 빚을 갚으며 사셔야 할 겁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대륙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원이면서 세상을 지키고자 노력하지 아니하고, 그 짐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도 반성하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그 죗값을 치를 겸 성검 일행에 속한 아니마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가진 바 능력을 다해 악숭 세력과의 싸움에 성실히 나서주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무탑주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로 그를 바라보는 한편, 슬쩍 눈동자만 굴려 웨일리안 이단 심문관의 눈치를 살폈다.
감격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게 벅차오르는 희열을 만끽하는 모양새다.
‘이 정도면 신의 사자답게 행동한 건···가?’
소심한 성격에 무게 잡고 남을 혼내려고 하니 어색해 죽겠다. 심지어 혼내는 대상이 나이 많은 어르신이라서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웨일리안의 반응도 너무 부담스럽고.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매번 이런 짓을 해 왔던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하던 일인데, 내가 괜히 나선 건가?
전자라면 나 자신이 너무나도 대견했고, 후자라면 이미 할 말 다한 마당에 내 알 바인가 싶다.
“다른 용건은 더 없으십니까?”
내 물음에 무탑주가 공손한 태도로 그렇노라 대답했고, 웨일리안도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여 용건이 없다는 뜻을 전했다.
그럼 이제 우리 쪽 용건을 전해도 되는 거겠지?
“안 그래도 일행들과 슬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일이 편해졌네요.”
“지금 바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네, 다른 분들께도 얘기 전해주세요.”
“그러지 마시고 얼굴이라도 한 번 뵙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대로 가시면 레안드로 추기경 예하와 테일러 님이 서운해하실 겁니다. 그리고 다른 이단 심문관분들도 시온 님을 많이 뵙고 싶어 했는데···.”
반쯤 사정하다시피 말하는 웨일리안의 얼굴에 아쉬움이 철철 흘러넘쳤다.
천사 설정 얘기를 듣지 못했더라면 대체 왜 저러나 싶었을 텐데.
그걸 알고 났더니 웨일리안의 태도가 이해되고, 사기 치는 것 같아서 더더욱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이별의 순간은 짧을수록 좋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제게는 짧을지 몰라도 다른 분들에겐 없는 수준인데···.”
“언젠가는 또 만나겠죠.”
“시온 님의 뜻이 그리도 강경하시다면 더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보다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다음 악마가 어디에서 소환될지 모르니 일단은 대륙 중앙 쪽으로 향하려 합니다.”
단순히 대비하기 위함이니 딱히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내 얘기를 듣고도 웨일리안은 구질구질하게 붙잡지 않고 알았노라 대답했다.
깔끔하니 좋다.
나는 일행들을 한 번 쭉 둘러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르펜스가 따라서 일어나 아공간 주머니에 나와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챙겼고, 일행들도 우르르 일어나 세르펜스에게 의자를 반납했다.
끝으로 테이블과 무탑주가 앉아있던 의자까지 챙기니 거실이 휑했다.
“크흠···! 그···, 아니마.”
지팡이를 짚고 선 무탑주가 조심스럽게 아니마를 불렀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근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이 순간 무탑주는 기세가 꺾이고 쇠약해진 한 명의 노인에 불과했다.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어, 본인의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똑바로 마주한 까닭이리라.
아니마는 그런 무탑주의 모습에도 마음 약해지지 않았다.
에드나의 팔을 꼭 껴안다시피 팔짱을 걸고, 차가운 시선으로 무탑주를 쳐다보며 ‘뭐?’ 하고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다.
이는 아주 당연한 일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 어린아이가 제일 먼저 찾은 건, 당연히 핏줄인 할아버지였을 테다.
하지만 무탑주는 아니마를 철저하게 방치했다.
그동안 쌓인 배신감은 태산만치 높을 테고,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어지듯 감정의 골 또한 깊어졌으리라.
이제와서 ‘사실은 너를 아끼고 있었고, 그 모든 건 널 위한 거였단다.’ 같은 소리를 들어 봤자다.
의지할 곳이 아예 없었다면 모를까.
그딴 말에 흔들릴 정도로 아니마는 정에 굶주려있지 않았다.
아니마는 무탑주의 행동을 이해해 줘야 할 의무가 없었고, 무탑주는 그것을 탓할 자격이 없었다.
이러한 관계를 만든 건 다름 아닌 무탑주 혼자만의 판단이다.
틀어진 관계 회복에 힘써야 하는 것도, 그 과정에서 상처 입어야 하는 것도 모두 무탑주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다.
“···건강해라, 다치지 말고.”
“흥!”
아니마가 팩하니 고개를 돌리며, 에드나의 팔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행동이 미수로 그친 건 무탑주가 붙잡아서가 아니다.
에드나가 양치를 빼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웨일리안이 무탑주를 데리고 나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범죄자를 연행하는 듯했다.
일행들이 양치를 하는 동안 세르펜스는 내게 두터운 로브를 입히고, 목도리를 둘둘 감아 마력 구속구가 보이지 않게 가렸다.
그러고는 두툼한 털모자와 장갑까지 건네고 저도 양치하러 갔다.
아까 세수하러 가서 양치까지 마친 내 판단은 훌륭했다.
잠시 후, 단단히 채비를 마친 일행들과 나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자 폐허나 다름없는 풍경이 시야에 가득 찼다.
추위에 대한 대비는 갖췄으나, 마음은 아무런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그 광경을 목도해야만 했다.
그간 건물 안에만 머물러서 실감 나지 않았는데.
내가 알던 평화롭던 세상은 이제 없다는 현실이 한달음에 성큼 다가왔다.
{ 됐···! }
“시온 님!”
{ ······ 안 됐······. }
저 멀리서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교단의 성직자 무리가 보였다.
먼저 나갔던 웨일리안이 우리가 떠난다는 소식을 알린 모양이다.
결국 이렇게 얼굴을 보고 가게 됐구나 싶다.
그래도 귀찮게 붙잡지 말라는 얘기를 해 두었는지, 처음 보는 이단 심문관들이 자기소개를 하며 시간을 잡아먹는 일은 없었다.
그냥 가시는 길을 배웅하겠다며 우르르 몰려왔을 뿐이다.
추기경 하나와 이단 심문관들이 잔뜩 따라붙자, 온갖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 시선 중에는 타국에서 온 기사들의 것도 있었고, 이곳 영지 소속의 기사와 병사들의 것도 있었으며, 마법사나 민간인의 것도 있었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사이로 부담스러운 이단 심문관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불편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교단이 준비해 준 말을 타고 떠날 수 있었으니까.
“그럼 가시는 길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추기경 레안드로가 대표로 인사말을 건넸고, 나는 예의상 기회가 되면 또 보자는 말을 건네며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 미소가 멋지다며 호들갑 떨어대는 이름 모를 이단 심문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일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레안드로의 말을 씹었더라도, 아마 저들은 고고하다며 찬양의 말을 쏟아냈으리라.
그래서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얼마나 말을 타고 이동했을까.
무너진 성벽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즈음, 나는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냈다.
“내가 세르펜스와 말을 같이 타는 것까지는 이제 그냥 그러려니 싶은데, 보통은 말을 모는 사람이 앞에 타지 않아?”
“처음에는 선우를 뒤에 태웠었다. 하지만 속도를 조금 높였더니 선우가 떨어질 뻔하여 자리를 바꾸었다.”
“안전 문제면 어쩔 수 없지.”
“영지로부터 거리가 꽤 벌어졌으니 마력 구속구를 풀어주겠다. 잠시 고삐를 잡고 있어라.”
세르펜스가 꼼지락거리며 목도리를 풀고, 마력 구속구를 벗겨 낸 뒤 다시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갑갑하고 무거웠던 쇳덩이가 사라지니 목과 어깨가 가뿐해졌다.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목 운동을 하자, 세르펜스가 어깨를 조물락조물락 주물러 주며 고생했다는 말을 건넸다.
“하긴 내가 고생하긴 했지. 나처럼 예의 바르고 공경심 넘치는 사람이 노인을 상대로 모진 말을 하려니, 너무 힘들더라.”
“거짓말하지 마라. 선우는 공작가로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순을 넘긴 집사와 싸우고, 화해한답시고 말다툼을 벌여 끝내 그자를 울리기까지 했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대화를 나눈 무탑주만 해도 희대의 개 쓰레기였지만, 울리지 않고 잘 타이르지 않았던가.
집사라면 그냥 힘없는 노인에 불과할 텐데 내가 그런 약자를 핍박했을 리 없다.
“내게 기억이 없다고 없는 말을 지어내지 마.”
“아, 그러고 보니 울렸다는 얘기까지는 못 들었지만···. 전 집사가 선우를 은근히 압박하며 못살게 굴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선우의 편의를 봐 주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증언했다.
내가 전 집사를 울렸다는 게 사실일 확률이 올라갔다. 그래도 나는 떳떳했다.
어찌 되었건 먼저 나를 괴롭힌 건, 전 집사라는 얘기였으니까.
“소심한 내가 참다 참다 못 참을 정도로 그 집사란 사람이 무진장 나쁜 놈이었나 보네!”
“선우는 단 한 순간도 참지 않았으나 그자가 나쁜 사람이라는 건 맞다. 그래서 선우가 그자와 싸워 줘서 기쁘고 고마웠다.”
“···그 정도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면 진작 잘랐어야지, 왜 내버려 뒀던 건데?”
“그자는 전대 공작의 사람으로서 그 이념에 따르던 이였다. 그리고 나는 선우와 만나기 이전까지, 그 이념이 잘못된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세르펜스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거두고, 다시 고삐를 쥐고 한쪽 팔로 내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균형을 잡느라 잔뜩 긴장하며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상체에 힘이 빠졌다.
반사적으로 등을 기댔다가, 뒤에 있는 게 등받이가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도로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냥 긴장 풀고 나를 등받이 삼아 편히 기대어 앉아도 된다. 원래도 그러했으니.”
“아, 그래?”
나는 본래 겸양을 갖춘 사람으로 사양할 건 사양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 본인이 등받이 노릇을 하는 게 익숙하다고 하니 존중해 주기로 했다.
몸에 힘을 쭉 빼고 등을 기대며 늘어져 있자니 과연 편했다.
말 위에서 이러고 있어도 세르펜스가 붙잡아 주니 떨어질 위험도 없고.
기억에 없는 4년간.
내 성격이 아주 약간이지만, 안하무인처럼 변한 건 분명 세르펜스 때문일 테다.
공작이란 사람이 이렇게 온갖 편의를 다 봐 주는데, 어찌 버르장머리가 나태해지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