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6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65화(965/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24) >
다들 내가 우는 걸 눈치챘을 텐데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의외로 꽥꽥이 또한 침묵을 지켰다. 우는 거 가지고 놀릴 정도로 유치한 악마는 아니었나 보다.
혹은 내가 자신과 말다툼을 벌이며 슬픔을 털어낼까 봐, 일부러 침묵을 지킨 걸 수도 있고.
어쨌거나 조용한 환경에서 멍하니 앉아있으니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미세한 지끈거림이 남긴 했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은 했다. 코피도 멎었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명치인지 어디인지, 아무튼 가슴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증상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다.
‘머리에서 느껴지던 엄청난 고통 때문에 묻혔다가, 그게 좀 가라앉고 나니까 이제야 인식할 수 있게 된 거겠지.’
기억 상실 때문에 머리 쪽에 자리 잡은 마기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는 ‘대부분’의 마기가 머리에 몰려있다고 말했었다.
몸에 퍼져 있던 나머지 마기가 날뛰며 내상을 입힌 모양이다.
각혈했을 때부터 내심 짐작했던 터라 새삼 충격받지는 않았다.
– 펄럭
천막 입구를 가린 천이 거칠게 걷히며 세르펜스가 들어왔다.
울다 온 까닭인지 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는데 나 또한 저런 모습일까 봐 걱정이다.
세르펜스는 들어오자마자 곧장 성큼성큼 다가와, 내 얼굴을 살피더니 비 맞은 새끼 고양이처럼 처량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게 끝인가? 그러게 뭐하러 그딴 실험을 해서 몸을 축내느냐며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울면서 뛰쳐나갔던 격한 행동에 비해 굉장히 온순한 반응이다.
휴마누스는 세르펜스가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을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얌전히 내 옆자리에 앉은 그를 살피며 안도했다.
의외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내 비명을 들었을 텐데 세르펜스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에야 돌아왔다.
그 의문이 풀린 건 뒤이어 들어온 유지스와 윈스톤을 보고 나서다.
지친 얼굴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게, 세르펜스를 달래고 진정시키느라 진이 다 빠졌나 보다.
예상과 달리 세르펜스가 얌전했던 건 아마 이들 덕분이겠지.
기진맥진한 모양새가 둘이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세르펜스를 말리지 못했을 것 같다. 역시 두 명 다 딸려 보내길 잘했다.
“···아까는 결계를 넘어야 하니 위험해서 안 된다고 말했지만, 실은 당신이 내 곁을 떠나는 게 싫어서 그리 말했던 거였다.”
잠자코 앉아있던 세르펜스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심한 얼굴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반말을 써야 한다는 것도 잊고, 나도 몰래 ‘네?’ 하고 존댓말로 반문해버렸다.
그러자 내가 자신과 거리를 둔다고 받아들인 걸까?
기운 없는 세르펜스의 얼굴이 한층 더 시무룩해졌다.
“맹세컨대 당신이 위험한 실험을 자처하도록 몰아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언제까지고 내 곁을 지켜 주겠다고 말했던 당신인데···.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니 그게 너무 야속해서···.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곁가지를 쳐내고 핵심만 요약하자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함께 다녀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괜히 결계가 이러쿵저러쿵 하며 겁을 줘서 미안하다.
대충 이런 의미 같다.
“내가 필요하다고? 나랑 같이 다니면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닐 텐데?”
“전부 감수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도 우리와 함께 다니는 편이 더 안전할 거다.”
“코앞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도?”
“그래도 나와 일행들이 지켜줄 수 있잖은가. 만약 우리와 떨어지게 된다면, 악숭 세력은 무슨 수를 써서든 당신을 납치하려 할 거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다.
신성력이 근처에서 발현되기만 해도 발작을 일으키는 체질이 되어버린 지금, 룩스메아의 계시를 받는 건 이제 불가능할 터이니.
사실상 신의 사자로서의 내 역할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악숭 세력이 작정하고 나를 납치할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을 텐데.
{ 네 가치는 신의 사자라는 게 아니야. 그딴 건 다른 사람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으니까. }
‘그럼 어째서 나를 노리는 건데?’
{ 프라시더스가 너를 소중히 여기니까. 널 인질로 붙잡아 둘 수 있다면, 프라시더스 놈을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위해 봉사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
‘헐···?’
{ 원망하려거든 프라시더스 놈을 원망해라! 크크큭! }
정말 되지도 않는 이간질이다.
그따위로 말하면 세르펜스가 나를 아끼는 바람에 악숭 세력의 타겟이 됐다며, 그를 탓하기라도 할 줄 아나 보다.
진짜로 잘못한 존재가 누구인지는 고민할 것도 없다. 답은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그런데 원망을 쏟아내기 쉽고 만만한 상대가 주위에 있다는 이유로, 생사람을 잡고 싶지는 않다.
‘날 인질로 삼으려는 건 마왕이니까 놈을 원망해야지. 왜 죄 없는 세르펜스를 원망하래? 꽥꽥아, 너 웃긴다.’
{ 칫. }
꽥꽥이가 혀를 한번 차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이 방법으로는 우리를 이간질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걸 테다.
기왕 입을 다무는 김에 꺼져 주기까지 하면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잠깐 끊겼던 세르펜스와의 대화를 마저 이어나갔다.
“사과는 됐어. 딱히 세르펜스가 날 자극해서, 신성 결계에 머무를 수 있는지 실험해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건 아니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할 일이었어. 모두와 함께하든, 가족들에게 돌아가든···. 비록 결과는 이 꼴이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라. 당장은 악숭 세력 때문에 힘들겠지만, 다시 평화가 도래하고 나면 아주 잠깐은 수도의 신성 결계를 해제할 수 있을 거다. 교단은 당신을 적극 지지하니 당연히 도와 줄 테고, 황제 폐하는 휴마누스가 어떻게든 설득해 주겠지. 물론 나도 나서서 폐하께 간청을 드릴 생각이다.”
세르펜스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그리 말하며 다정스레 내 등을 도닥거렸다.
그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니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하듯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째서인가 그 순간 머릿속에서 꽥꽥이가 킬킬거렸으나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구···, 잠깐. 그때가 돼도 내 부모님을 계속 공작저에 머무르게 할 생각이야?”
“리벨론 부부는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겠지만, 당신은 나의 보좌관이니 공작저에서 지내야 할 것 아닌가?”
“나 조기 은퇴할 건데?”
“······!! 당신이 원한다면 그 두 분이 공작저에 계속 머무를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다. 그러니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말아다오.”
세르펜스가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 놀란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
언제부터 조기 은퇴가 무서운 말이 된 걸까? 달콤한 말 아니었나?
과연 고용주라서 같은 단어를 두고도 고용인과는 다르게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조기 은퇴란 단어를 마음속 한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당장 이 얘기를 이어 나가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하고, 반쯤 충동적으로 꺼낸 말인지라 나중에 가면 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려면 시기적으로 아직 멀었으니 천천히 고민해 봐도 늦지 않겠지.
“세르펜스, 그런 말은···.”
유지스가 난색을 드러내며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레몬색 눈동자에 세르펜스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대충 나와 관계된 일이라는 건 알겠는데, 저들이 왜 저러는지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모르겠다.
“그보다 시온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못하니, 쉴 수 있도록 침대에 눕혀 두는 게 어떨까 합니다.”
세르펜스가 티 나게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그를 두고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일행들은 미처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하며, 부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나도 편히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고.
잠시 뒤 커다란 탁자와 의자가 치워지고 침대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휴마누스와 세르펜스를 제외한 이들이 저녁을 먹을 때 다시 올 테니,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아까 세르펜스가 주머니에 넣어 준 회중시계를 꺼냈다.
현재 시각을 확인하니 저녁때까지 고작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잠시 눈을 붙이겠는가?”
세르펜스가 침대에 누운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지끈거리는 두통과 욱신거리는 흉통이 좀 가라앉을 수도 있다.
그런 기대를 품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눈을 감았다.
통증 때문에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긴 하지만, 억지로 눈을 감고 있으면 어떻게든 잘 수 있겠지.
{ 고작 잠 좀 잔다고 나을 리가? 짧아도 일주일은 고생해야 할걸? 완벽히 나으려면 그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
나도 안다. 그래서 ‘좀’ 가라앉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건데, 아무래도 꽥꽥이는 문장 이해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형편없나 보다.
마왕은 악마에게 도덕을 비롯한 각종 교육 혜택을 베풀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다는 예상과 다르게 곧장 정신이 툭 끊겼다.
* * *
내가 눈을 뜬 건 꼬박 하루 하고도 반절이 더 지난 이튿날 아침이었다.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절한 거였나 보다.
휴마누스의 말에 의하면 내가 기절한 사이 열이 펄펄 끓어올라, 세르펜스가 곁에서 계속 간호해 주었다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미열이 있는 까닭에, 지금도 세르펜스가 내 이마에 올릴 물수건을 꽉꽉 짜고 있었으니까.
눈 감기 전과 입은 옷도 달라진 거로 보아 내가 땀을 너무 많이 흘려 갈아 입힌 듯했고.
‘···집에 가고 싶다.’
눈앞에 나를 걱정하며 간호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몸이 아프니 집 생각이 간절해졌다.
무의식중에 가족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 순간.
찰나간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검은색 머리카락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내 가족들은 나와 같은 올리브색 머리칼을 지녔거나 색 바랜 금발인데.
악마의 장난질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미칠 듯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가슴이 먹먹하고 욱신거리는 게 마기의 폭주가 남기고 간 내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 감정 때문인지.
이 또한 모르겠다.
확실한 건 가슴 혹은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어디가 많이 안 좋은가?”
내가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리자 세르펜스가 안절부절못하며 슬픈 낯을 했다.
그 얼굴을 마주 보고 나는 차마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세르펜스는 이미 내게 최선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으니까.
현재로서는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최선이다. 가족들은 그 이후에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고작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여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 일행 중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그래, 힘들면 차라리 그렇게 울어라.”
나도 모르게 향수(鄕愁)에 젖어 눈물이 나왔나 보다.
세르펜스가 누워있던 나를 일으켜 앉히고, 내가 자신에게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은 뒤 등을 토닥거렸다.
가만히 두면 금방 그칠 텐데 뭐하러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그런 생각 따윈 금방 사라져버렸다.
울컥 치밀어오른 서러움에 펑펑 눈물을 쏟고 일어났더니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란다.
기절했다가 깨어나자마자 한다는 게 울다 지쳐 잠드는 거라니.
나 자신조차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