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6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67화(967/1105)
< 92. 공작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26) >
모두가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떠날 채비를 했다.
세르펜스는 내가 입은 내상이 완벽히 나을 때까지는 이동을 삼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 때문에 일행의 발이 묶이는 건 사양하고 싶다.
지금도 대륙 어딘가에서는 폭주 마인이 날뛰고, 악숭이들이 사람들을 죽여 제물을 모으는 중이라고 들었다.
소수인 우리의 힘으로 사람들을 전부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공터에 머무르며 허송세월을 보내다간, 없던 죄책감도 생겨날 테다.
더욱이 우리는 프뤼네 왕국을 벗어나기는커녕 얼마 나아가지도 못했다.
이러다간 병력을 추슬러 고국으로 돌아가는 지원군과 마주치게 생겼다. 어쩌면 이단 심문관들과 다시 만날 수도 있고.
아군이긴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 마주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세르펜스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고, 이동하자는 내 의견에 마지못한 표정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랬던 주제에···.”
나는 세르펜스가 떡하니 꺼내 놓은 마차를 보며, 가출 직전의 어이를 가까스로 붙들었다.
심지어 그는 나를 마차에 태우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됐는지, 에드나에게 마차에 부유 마법을 걸어달라 부탁했다.
그리하여 나는 흔들림이 줄어들다 못해 완전히 사라진 공중 부양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6인승이고 우리 일행은 총 9명이었으나 정작 탑승객은 다섯뿐이었다.
윈스톤은 마차를 몰겠다고 자원하여 마부석에 앉았고, 푸로르는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한 마차보다 말을 타는 게 좋다고 했다.
리에나는 승마에 더 익숙해지고 싶다며 마차 탑승을 거부했다.
그리고 유지스는 바람을 맞으며 명상에 잠기고 싶다면서 마차 지붕에 자리를 잡았다.
‘잠깐만. 유지스도 마차에 타긴 탔으니, 적정 인원을 다 채운 셈인가?’
아무튼 그리하여 나와 세르펜스, 휴마누스, 에드나, 아니마. 이렇게 다섯 명이 공중 부양 마차 체험에 당첨되었다.
내 옆자리는 당연하다는 듯 세르펜스가 차지했고, 뒤이어 탄 에드나와 아니마가 맞은편에 붙어 앉았다.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의 옆에 앉으려다가 아니마의 옆자리로 쫓겨났다.
“자리가 한 칸 비었으니 편히 누울 수 있겠군.”
세르펜스가 내 옆통수를 지그시 눌러서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눕게 했다.
말을 탈 땐 자처하여 등받이가 되더니 마차에서는 베개가 되었다.
이러다 기차에서는 의자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현재 운행 가능한 기차는 제국의 것뿐이며 기차는 도시를 통과하여 달리니, 신성 결계 때문에라도 기차를 탈 수 없다는 게 되려 다행스러웠다.
{ 에이, 설마! 그래도 의자는 아니겠지. }
나도 의자는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꽥꽥이가 저렇게 말하니 괜한 반발심이 솟구쳤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내가 베개펜스를 베고 눕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러니 의자펜스를 깔고 앉는 날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 설득력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네···? }
꽥꽥이가 홀린 듯한 음성으로 내 헛소리가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중얼거렸다.
악마 주제에 순진한 걸까, 순진한 척하는 걸까?
내 의문을 읽었는지 꽥꽥이가 자신은 순진한 쪽이라고 주장했다. 그걸 듣고 나는 놈이 순진한 척하는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 달가닥
돌연 귓가에서 단단한 무언가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천장 방향을 쳐다보니 세르펜스가 유리병의 뚜껑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달가닥거리는 소리는 병 안에 들어있는 사탕이 서로 부딪히며 생긴 소리였다.
예쁘게 세공된 투명한 유리병에 알록달록한 사탕이 들어있는 게 참 보기 좋다.
“···하나 먹겠는가?”
세르펜스가 제 눈동자 색을 닮은 초록빛 사탕을 꺼내어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사탕을 든 손을 살짝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먹겠다고 하면 저 달콤해 보이는 사탕을 내 입에 쏙 넣어주겠지.
하지만 딱히 사탕이 먹고 싶었던 건 아닌지라 거절했다.
“먹고 싶어서 쳐다봤던 것 아니었나?”
“그냥 병이 예뻐서 쳐다봤을 뿐인데?”
“으음···, 그렇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세르펜스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는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식사도 셰이크로 대체했다.
그런 내가 무언가를 먹고 싶어 한 줄 알고 기대했다가,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고 실망한 눈치다.
“난 먹어줄 수 있는데.”
“죄송합니다, 휴마누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탕은 드릴 수 없습니다.”
손바닥을 쓱 내미는 휴마누스를 향해, 세르펜스가 정색하며 초록색 사탕을 제 입에 쏙 넣어버렸다.
그러고는 사탕 병의 뚜껑을 꽉 닫아서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어찌 보면 얄밉기까지 한 그 행동에 휴마누스의 얼굴에 불만이 떠올랐다.
“지금 친구를 차별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사탕 병은 시온과 둘이서 야시장에 들렀던 추억이 담긴 물건이자, 그가 제게 준 첫 번째 생일 선물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세르펜스의 생일에 야시장에 놀러 가서, 내가 생일 선물이랍시고 예쁜 유리병을 하나 사서 그에게 건넨 모양이다.
생일 선물치고는 너무 성의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 찰나.
세르펜스의 입에서 그러한 생각을 반전시킬만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 병에 사탕을 가득 담아 선물하며, 평생토록 저와 함께하며 매달 사탕을 채워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사탕을 하나씩 꺼내 먹으며, 당시의 추억과 약속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생일 선물 주제에 성의가 지나치게 넘쳐 흐르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아니, 기간이 평생이었으니 종신 계약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 과거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저딴 약속을 한 건가 싶어 당혹스러웠다.
‘사탕을 빌미로 평생직장을 확보하고, 세르펜스의 돈으로 유유자적 먹고 노는 노년의 삶 같은 걸 꿈꿨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노후 보장 이외에, 평생을 약속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고작 사탕을 리필해 주는 것 가지고 온갖 생색을 다 냈구나 싶다.
사기 계약의 종족인 악마 꽥꽥이가 내게 계약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사실상 욕에 가까운 칭찬을 해댔다.
“즉 이 병은 제게 추억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물건이고, 안에 채워진 사탕은 앞으로도 시온이 저와 함께할 것임을 알려주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이 사탕 병은 과거와 미래, 두 가지 의미로 제게 크나큰 가치를 지닌바. 시온에게는 사탕의 일부를 양보할 수 있으나, 다른 이에게는 절대로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겨우 주기적으로 유리병에 사탕을 채워 주는 것뿐인데 과거와 미래까지 언급될 일인가?
지나치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세르펜스의 발언에 부담감이 커졌다.
동시에 세르펜스가 느닷없이 사탕 병을 꺼내 든 이유도 대강 짐작이 갔다.
휴마누스의 반응은 사탕 병의 존재를 오늘 처음 알게 된 사람의 것이었다.
그 반응으로 보아 그간 세르펜스는 저 귀하디귀한 사탕 병을 숨겨두고, 몰래몰래 먹어왔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오늘은 보란 듯이 사탕 병을 꺼내고 구구절절 설명까지 늘어놓은 건···.
‘저번에 내가 조기 은퇴 얘기를 꺼내서겠지.’
기억을 잃기 전에 자신과 이러한 약속을 했으니, 다시는 은퇴 얘기를 입에 담지 말라는 뜻이리라.
그리고 슬슬 리필할 사탕을 준비해 두라는 의미도 없잖아 있을 테다.
“어, 응. 그래, 알았어. 미안해. 다시는 달라고 안 할게.”
휴마누스가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에게 사탕을 뺏어 먹으려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세르펜스가 사탕 병에 관한 설명을 늘어놓으려고,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세르펜스의 설명은 무척이나 길고 거창했다.
그러니 나란히 앉아 마탑주의 연구 일지를 보던 두 마법사가 고개를 들고, 그의 얘기를 귀담아듣게 된 건 필연이었다.
“와···. 시온 씨, 정말 엄청난 걸 선물하셨네요.”
“언니, 언니. 나두 저런 거 갖구 시포~!”
에드나가 혀를 내두르며 내가 경솔한 약속을 했다는 듯 반어적 어투로 말하였고, 아니마는 세르펜스의 손에 들린 사탕 병을 가리키며 비슷한 걸 받고 싶다며 졸라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에드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때, 마차 위에 있던 유지스가 창가 쪽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온이 세르펜스에게 사탕 병을 선물할 때는 저도 옆에 있었는데 말이죠···. 평생이라는 언급은 없지 않았나요?”
엄청난 증언이 나왔다.
나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는 눈빛으로 세르펜스를 노려보았다.
세르펜스는 내게 기억이 없다는 걸 알고 사실을 날조하려 했으면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굴었다.
“하지만 종료일 또한 언급하지 않았으니, 끝이 정해지지 않은 영원을 뜻하는 거라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당시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부실한 약속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유지스라면 뭔가 알고 있을까 기대했건만.
그녀는 세르펜스의 말에 설득당하여,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빠끔 내밀고 있던 고개를 거뒀다.
{ 계약 잘한다는 말은 취소할게. 성인이 되었으면 계약서 작성 시 필수로 기재해야 할 사항 정도는 알아 둬야지. 구두로 하는 약속이라 해도 기한처럼 중요한 건 빼먹지 마. }
‘···악마가 그런 조언 해도 되는 거야?’
{ 너무 한심해서 그래. }
악마인 꽥꽥이가 구구절절 옳은 조언을 건네며 나를 동정하기에 이르렀다.
고마운데 억울했다.
기한을 정해두지 않은 내가 잘못한 거긴 한데, 아니 이게 잘못한 거 맞나? 알아서 은퇴하기 전까지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것보다 세르펜스는 대체 몇 살까지 사탕을 입에 달고 살 생각이지?
{ 원래 계약이라는 게 그런 법이야. 그래서 우리 악마들도 계약할 때 일부러 기한을 정해두지 않거나,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곤 하지. }
일반 계약이 아니라 사기 계약의 상식을 입에 담는 꽥꽥이는 무시하기로 했다.
* * *
◆
에드나 씨가 만든 단백질 음료 덕분에 선우는 필수적인 영양분을 공급받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함에도 지난번처럼 야위지 않았다.
마기가 폭주하며 생긴 내상 또한 차도를 보였다.
하지만 누군가와 가벼운 주제로 잡담을 나눌 때를 제외하면, 얼굴에 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끔은 혼자 조용히 있다가 피식 웃거나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악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틀림없었으나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으로 대화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오직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우는 잠깐이라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금세 우울에 빠져들었고, 그 우울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선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하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럴 때면 바로 옆에서 불러도 반응이 없거나 느렸다.
그렇다고 나와 일행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줄 수도 없었다.
현재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자니 부정적인 말이 나오기 일쑤였고, 과거의 추억을 나누자니 기억을 잃은 선우가 소외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미래를 그릴 수도 없는 게, 선우의 몸속에 자리를 잡은 마기가 희망을 집어삼켰다.
선우의 상태가 가장 심각해지는 건 자고 일어난 직후다.
눈을 뜸과 동시에 눈물을 쏟아내며, 집에 가고 싶다는 말과 가족이 보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기억이 있었을 땐 괜찮다고 말하며 버텼으면서···.’
그들을 잊자마자 속절없이 무너져 향수병을 앓는 선우를 보며, 이는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저대로 두면 안 된다. 무언가 해야 했다.
비록 그것이 선우를 속이고 기만하는 행위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