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7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76화(976/1105)
< 93. 공작님, 저는 누구예요? (6) >
피식 웃으며 세르펜스의 손을 의지하듯 잡고 상체를 일으켜 앉는 찰나.
“내게 웃어 주는 건가···?”
{ 기억을 되찾을 생각이 없나 봐? }
한 사람과 한 악마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세르펜스는 내가 손을 잡아달라 말한 것에 이어, 미소까지 지어 보이자 얼떨떨하면서도 몹시 기쁜 눈치였다.
고작 웃은 거 가지고 뭘 그리 기뻐하느냐고 넉살 좋게 대답할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긴 했으나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세르펜스를 이해하고 원활한 관계를 이어나가기로 마음먹었다지만.
지금 당장 그와 편하게 대화를 나눌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세르펜스를 향해 웃어 보이며,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앞으로도 계속 프라시더스의 비위를 맞춰주며 살 생각이야? 그 인간에게 버려질까 봐, 그래서 진짜 너를 알아주는 이가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 }
‘······.’
{ 그렇게 남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기억을 되찾아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 더 낫지 않겠어? }
얼핏. 아니, 누가 들어도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동의해서는 안 될 말이기도 했다.
꽥꽥이가 방금 한 말에는 자신과 계약을 맺으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으므로.
직접 계약을 언급한 건 아니었으니, 저 얘기에 동의를 한다고 해서 곧장 계약이 성사되는 건 아닐 테다.
하지만 만만해 보여서 그렇지 꽥꽥이도 악마는 악마다.
악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동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서히 마음이 기울게 될 수도 있다.
{ 왜 그렇게 계약을 맺길 거부하는 거야? 내게 영혼을 저당 잡히는 게 그렇게나 싫어? }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 난 딱히 네 영혼을 집어삼킬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안심해.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서 이클립스라는 이름까지 내리며, 널 악마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잖아. 고작 곁에서 함께하는 동료가 바뀌는 것뿐이야. }
‘겨우 그게 끝일 리가 없잖아.’
내가 정말 천사라면 가족들 또한 천사라는 게 된다.
꽥꽥이와 마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악마가 된다면, 기억을 되찾아도 그들과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테다.
어쩌면 내 손으로 그들을 해하게 될지도 모르고.
{ 네 가족들은 건드리지 않을게. }
‘거짓말, 너한테 그런 걸 결정할 권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계약하려고 되는대로 막 던지지 마.’
{ 나 이래 봬도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 인정받는 악마인데···. }
‘그래서 권한 있어, 없어?’
{ 있···. }
‘일행들이 기만하니까 자기를 믿으라면서, 꽥꽥이 너도 날 기만할 생각이야?’
{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없다고 말하려고 했어. }
꽥꽥이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대며 자신의 하찮음을 과시했다.
{ 내가 언제 그런 걸 과시했다는 거야?! }
나는 머릿속에서 꽥꽥 울리는 소음을 무시하며 고민에 잠겼다.
역시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건 두려웠다.
당장 기억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내 가족들은 어떤 이들이며 이 세상에 오기 전의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나의 근간이 되는 정보쯤은 파악해 두고 싶다.
‘하지만 과연 일행들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까?’
정황상 내 정체와 본명은 밝힌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어디까지 말을 해 뒀을지 알 수가 없다.
설령 전부 말해 뒀다 하더라도 나는 들을 수가 없다.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꽥꽥이와 마왕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니까.
{ 마신님께선 다른 일로 바빠서 널 지켜보실 시간이 없다니까 왜 안 믿는 거야? }
‘그래, 그래.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럼 나에 관해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어도 마왕에게 보고 안 할 거야?’
{ 보고는 올려야지. }
‘······.’
아무튼 일행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내 정보를 필사적으로 숨기려 할 테다.
이대로라면 나는 평생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되겠지.
게다가 지금 내게 닥친 문제는 기억 상실이 다가 아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신성력이 발현되었을 때, 몸속의 마기가 폭주하는 증상이 어떤 의미로는 기억 상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기억을 잃어서 괴롭고 힘든 건 오직 나뿐이다.
하지만 마기의 폭주는 얘기가 다르다. 나 때문에 일행들이 전력을 다하여 싸울 수 없으니까.
일행들의 목숨.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명운이 걸린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꼴랑 나 하나 때문에 세계 멸망의 가능성이 수직 상승한다는 게??’
이래서야 짐 덩어리 수준을 넘어 재앙의 씨앗이나 다름이 없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놓는 걸 깜박하여 계속 잡고 있던 세르펜스의 손을 더욱 꽉 붙들었다.
“세르펜스, 정말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
{ 나야 네 생각을 다 듣고 있었으니까 상관없지만, 네 주변의 인간들에겐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 아닐까? }
꽥꽥이가 뭐 어쩌라고 싶은 소리를 해댔다.
괜한 말로 내 주의를 분산시켜 일행들과 대화하지 못 하도록 방해하려는 심산일 테다.
그런 뻔한 수작질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무시하자.
{ 그냥 솔직한 감상을 말했을 뿐인데 너무 몰아가네. }
“으음···.”
{ 저거 봐. 프라시더스가 당황하고 다른 인간들도 어쩔 줄 몰라 하잖아. }
세르펜스가 침음을 흘렸고, 다른 이들은 곤혹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와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기야 세르펜스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니.
내가 ‘시온’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억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만도 했다.
{ 조금 전까지 용서한다며 웃어 보일 땐 언제고,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간절하게 그런 소리를 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보이겠지. }
‘말없이 가만히 있다니? 나는 너랑 대화했고, 다들 그걸 빤히 눈치챘을 텐데. 그럼 당연히 네가 뭐라 뭐라 떠들어대서 내가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 억울해! }
머릿속에서 꽥꽥거리는 놈을 무시하고, 일행들의 걱정 어린 시선도 애써 외면하며.
나는 세르펜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만약 일행 중 누군가가 마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세르펜스일 터였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아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대를 해 봐도 되는 걸까?
“세르펜스는 마인과 악마 사이의 계약도 끊을 수 있다며. 그런데 악마가 심어놓은 마기 하나 정화 못 할 리 없잖아. 그렇지?”
그 마기가 신성력에 반응하여 미친 듯이 날뛴다는 게 문제였지만.
마인들의 몸속에 있는 마기라고 신성력에 무반응이었던 건 아닐 테다.
분명 그들도 발작을 일으켰을 거고, 그럼에도 강제로 계약을 끊어낸 거겠지.
{ 하지만 마인은 마기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육체 또한 강화됐지. 그런데 넌 그게 아니잖아? }
겁을 주는 꽥꽥이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내고자 노력했다.
내가 시온의 가족들을 만나고 괴리감 속에서 무너지길 바란 건지, 아니면 제물을 끌어모으느라 바빴던 건지.
그동안 악숭 세력은 벌레 마인 이후 적을 보내오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얄팍한 평화가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언제까지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고···.’
{ 악마와 계약할 생각은 전혀 없다더니, 그냥 버티는 거였어? }
‘생각 좀 읽지 마!’
{ 하긴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일행이라며 함께하는 이들은 너를 속이고 기만했으니 그럴 만도 해. 솔직히 저 인간들이랑 대화하는 것보다, 나랑 얘기하는 게 더 마음 편하고 좋잖아? }
‘······.’
{ 이클립스, 네가 힘들고 괴로워할 적에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말을 걸어준 게 누구지? 일행이랍시고 같이 다니기만 할 뿐. 네 눈치를 살피느라 오히려 죄책감만 자극하는 불편한 인간들보다, 내가 더 의지 되지 않아? }
최대한 빨리.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마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 솔직히 무섭잖아? 성검의 주인이 잠깐 주변에 결계를 펼쳤을 때도 엄청나게 아프고 괴로웠는데, 신성력이 몸에 들어온다니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고통스러울 거야.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마.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고민해도 괜찮아. }
꽥꽥이 주제에 꽥꽥거리지 않고 사근사근 말하는 게 괘씸하다.
억지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외면했던 부분을 끄집어내어, 마기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느꼈던 고통을 상기시키는 것도 진짜 못돼 처먹었다.
그런데도 놈이 하는 말이 위로처럼 들려서 정말 큰일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악마의 속삭임을 ‘달콤하지만 위험한 유혹’이라고 말하나 보다.
{ 네가 너무 불안정하게 느껴져서 하는 말이야. 아까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억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도 하다’고 생각했지? 근데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야. 너는 진짜로 혼란에 빠져서 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배당하고 있어. 하지만 네겐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 공연히 프라시더스를 닦달하며 그를 괴롭히고 있지. }
내 시선이 자연스레 세르펜스에게로 향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생각에 잠겨있는 건 여전했지만, 어느덧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그를 괴롭힌 걸까?
‘그래도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세르펜스뿐이잖아. 게다가 세르펜스는 성검을 휴마누스보다 더 잘 다룬다는 것 같으니까···. 아! 이건 비밀인가?!’
{ 그건 우리도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신경 쓰지 마. 현 성검의 주인이 아니라 프라시더스가 우선 제거 대상인 이유도 그래서고. }
‘내가 너와 계약하면, 날 인질로 잡고 세르펜스를 죽일 생각이었구나.’
{ 네가 마인이 되든 악마가 되든. 우리 쪽에 붙으면 프라시더스 놈도 우리 편이 될 텐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만약 네가 저 놈이 꼴도 보기 싫다면 이런저런 임무를 잔뜩 떠넘기면 되고, 곁에 두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 어쨌든 죽이지는 않을 거야. }
내가 세르펜스를 불편하게 여기면서도, 그에게 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파악했기에 나올 수 있는 맞춤형 영업 멘트다.
{ 아니지? 프라시더스 놈이 성검을 쥐어도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이길 가능성은 없으니, 사실상 놈이 살 방법은 네가 악마가 되어 그를 우리 편으로 이끄는 것뿐인가? 나는 네가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나와 계약해주길 바라지만, 프라시더스 놈을 살리고 싶다는 이유로 계약하겠다고 해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어. }
꽥꽥이의 머릿속 상상의 나라에서는 내가 그에게 계약해 달라며, 목을 매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기분 나쁘니까 어서 현실로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징글징글한 꽥꽥이의 말에 진저리치던 그때.
“그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기는 하다.”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개미가 기어들어가듯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었다. 방법이 있다고.
정말 바라 마지않던 말이었지만, 그래서 더 놀랍고 얼떨떨했다.
“정말로?!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어째서 지금까지···. 아! 지금 떠올린 거려나?”
내가 너무 놀라서 굳어있는 사이, 휴마누스가 기뻐 죽겠다는 듯 잔뜩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그가 대신 호들갑을 떨어 준 덕분에 나는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은 순수하게 기뻐해야 할 때가 아니다. 방법이 있다는 것치곤 세르펜스의 표정이 지나치게 어두웠다.
더욱이 세르펜스는 내 그리움을 해결해 주겠답시고, 시온의 가족과 만나게 해 준 전적도 있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그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