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8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83화(983/1105)
< 94. 공작님과의 갈등 (5) >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단어는 ‘부러움’이었다.
이 위험하고도 가혹한 세상을 떠나, 안전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세상으로 도망칠 수 있는 건 나인데도.
다른 일행들은 강제로 목숨을 건 싸움을 이어나가야 하는데도.
부러움을 사야 하는 건 나라는 걸 아는데, 당당하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휴마누스가 부러웠다.
누가 들으면 복에 겨워 헛소리를 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럽기까지 했다.
“그럼···, 저는요?”
“응?”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휴마누스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저대로 아무것도 모르게 놔두는 게 좋을까, 아니면 얘기하는 게 좋을까.
망설이고 있는 내게 휴마누스가 질문을 건넸다.
“혹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더 있는 거야?”
“그야···.”
나는 당연하다는 뒷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휴마누스의 올곧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마치 내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 같은 눈빛이었으나, 눈치 없는 휴마누스에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겠지.
“그럼 너는, 뭐? 제대로 말해줘. 그러지 않으면 몰라.”
“저는···, 저는 휴마누스처럼 확신할 수 없잖아요. 모두가 안전할 거라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잘 살고 있노라고···. 그렇게 믿을 수가 없어요.”
다른 이들은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간 내 안전을 확신하며 안심할 수 있다.
반면에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가 고향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르펜스를 비롯하여 내 소중한 동료들은 막강한 적과 싸우다 피를 흘릴 테다.
이간질에 넘어간 어리석은 이들로부터 지탄을 받아 마음이 깎여 나가는 날도 있겠지.
나는 일행들이 강해져서 마왕을 꼭 이겨 줄 거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이건 바람에 가깝다.
2회차의 성검 일행은 마왕펜스를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데 진짜 마왕은 마왕펜스 이상 가는 실력자로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른 존재다.
더불어 꽥꽥이의 말에 의하면, 현재 일행들의 수준으로는 마왕은커녕 자신조차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이러니 내가 어찌 고향에서 안락한 삶을 즐길 수 있을까.
매일같이 일행들의 생사를 걱정하며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지내게 될 게 뻔하다.
온갖 불길한 상상에 사로잡혀, 밤이면 그들이 마왕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악몽에 시달리겠지.
“가족들의 품이 따뜻할수록,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울수록···. 저는 제 소중한 이들을 전장에 남겨둔 채, 홀로 도망쳐 왔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게 될 겁니다.”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죄책감에 짓눌리는 삶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 저를 보는 가족들의 심정은 또 어떻겠어요?”
그들의 걱정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하다.
“제가 살던 세상은 마법이니 신성력이니, 그러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말입니다. 다른 세상이 어쩌고 하는 말을 늘어놓으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어디 가서 상담도 못해요.”
그런 나와 달리 이곳에 남은 이들은 이따금 내가 그리워져도, 나와의 추억을 공유하며 감상에 젖을 수 있다.
괴롭고 힘든 일이 생기면, 나를 안전한 곳으로 도피시켜 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안도할 테고.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홀로 평화로운 세상으로 떠난 나를 걱정이나 해 줄까?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기에 급급하여 나를 떠올릴 시간마저 점차 줄어들겠지.
“미안해. 우린 널 생각한다고 한 건데···, 정작 네가 어떤 심정으로 이 세상에 남으려 한 건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
휴마누스가 사과의 말을 건네며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말하는 도중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방금 그 얘기 말인데···. 혹시 세르펜스에게도 해 봤어?”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생각으로만 그쳤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생각만 하고 말은 안 했구나.”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겁니까?”
“넌 걸핏하면 머릿속으로 생각을 진행해 나간 뒤 결론만 툭툭 내뱉잖아.”
“그래도 알아들을 사람은 다 알아듣던데···.”
“못 알아들을 사람은 못 알아듣잖아. 그리고 네가 조금 전에 한 얘기는 제아무리 세르펜스라 해도 몰랐을걸?”
자신의 눈치 없음을 인정한 휴마누스가 툴툴거리며 불만을 내뱉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키득 웃다가 코를 훌쩍대며 생각에 잠겼다.
휴마누스의 추측대로 나는 세르펜스에게 이 얘기를 하지 않은 게 맞다.
다만 그 이유가 달랐다.
혼자 머릿속으로만 생각을 처리해서가 아니라 그냥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반쯤 충동적으로 하소연한 것일 뿐, 될 수 있으면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 했다.
세르펜스는 내가 느끼는 모든 괴로움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는 녀석이니까.
내가 일부러 말하지 않았음에도, 얘기한 줄 알았다고 말한 이유도 세르펜스의 성격과 연관이 있다.
자신에게도 숨기려 했던 얘기를 휴마누스에게 술술 털어놓았다는 걸 알면, 세르펜스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했다.
그래서 둘러댄 거다.
“뭐···. 세르펜스라면 씻으면서도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을 테니, 된 거 아닐까요?”
“그런가?”
“그렇죠.”
“다른 일행들한테도 말할 거지?”
“······.”
“내일 얘기하자. 다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널 이해하지.”
휴마누스의 채근하는 말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나는 쓰다만 편지를 이어서 써 내려갔고, 휴마누스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가 편지지를 반절 가량 채운 뒤 대충 마무리 지었을 때.
세르펜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나 먼저 씻을게.”
나와 세르펜스가 둘이서 편히 대화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듯, 휴마누스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 고맙지 않은 배려였다.
아직 세르펜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두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한 면을 끝까지 채우지 못하고, 사과의 말만 겨우 담아낸 편지지를 곱게 접어 편지 봉투에 넣으며 딴청을 부렸다.
– 달칵.
그런 내 앞에 세르펜스가 작고 단단한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세르펜스가 내려놓은 건 페브, 그러니까 내가 ‘갈레트 데 루아’에 넣어 줬던 도자기 인형이었다.
함께 귀염뽀짝한 페브를 감상하며 기분 전환을 하자는 의도는 아닐 테고.
이는 필시 소중히 간직하겠다던 선물을 반납하면서까지, 내게 빌 소원이 있다는 뜻이리라.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도자기 인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위로 올려 세르펜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내 앞자리에 앉은 녀석은 막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사람답지 않게, 안색이 창백하여 꼭 추위에 떠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이 못내 걱정스러웠지만, 다독여 줄 만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녀석이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선우는 역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뭐?! 나랑 휴마누스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들었다.”
“그런데도 날 기어코 돌려보내겠다고? 소원권까지 써 가며?!”
울컥 화가 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세르펜스는 입술을 앙다물고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의가 느껴지는 그 표정으로 보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다.
“내 소원은 선우가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서···, 모든 걸 잊고 지내는 거다.”
“모든 거라면···. 세르펜스, 너도 말이야?”
“···그래.”
상처 되는 말을 꺼낸 건 본인이면서 세르펜스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 말에 화가 끓어 넘쳐 겨우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까워서 평생 쓰지 못할 것처럼 굴었던 소원권을 내밀면서 하는 말이 이딴 거라니.
“내가 이딴 소원이나 빌라고 페브를 선물한 줄 알아?!”
“선우가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님을 안다. 분명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나를 위한 소원을 빌길 바랐겠지.”
“그런데 왜, 이걸 지금 나한테 주는 거야?”
“···선우를 지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분하다는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한참 노려보다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녀석이 순순히 뜻을 굽히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소원권을 써가며, 자신을 잊어 달라 말하는 건 예상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렇게나 내가 네게 짐이 되는 거야?”
“그, 그런 건···.”
세르펜스가 반사적으로 부정의 말을 내뱉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면 나를 돌려보내지 못할까 봐 중간에 말을 끊은 거겠지.
“모질게 굴 거면 짐이 맞으니까 꺼지라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선우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저 내 능력이 부족해서, 선우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다. 이번 일만 해도···.”
자신을 잊으라는 말은 잘도 하면서, 차마 내 탓은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이란.
내게는 모든 걸 잊으라는 그 무정한 말이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걸 모르나 보다.
“이번 일이 뭐? 마왕이 직접 나서서 내 영혼을 소멸시키려고 한 걸, 네가 구해줬잖아.”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거다. 마왕이 선우를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니, 다음번에는 기회만 생기면 그 즉시 당신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 거라고? 영혼도 무사하지 못할 거고?”
“···아주 잘 알고 있군. 그런데 어째서 계속 남으려 하는 거지?”
“내가 휴마누스와 나눈 대화 다 들었다며?!”
적어도 이 대륙에 평화가 찾아온 이후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 돌아간다 한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오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늘 불안, 그리움, 후회, 죄책감 따위의 부정적이고 암울한 감정과 함께해야만 한다.
이는 일행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무력감을 느끼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아니, 그 무력감마저도 고스란히 가지고 가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다 잊혀질 거다. 이곳에서 만났던 인연들도, 나와 함께한 추억들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절대 못 잊어. 매월 1일이 다가오면 무심결에 ‘아, 맞다. 세르펜스 사탕 리필해 줘야 하는데.’ 하고 생각해 버릴 거고, 크리스마스에 남들이 산타 장식이 올라간 케이크를 먹을 때 혼자 촛불을 붙일 거고, 매년 8월 24일마다 2회차의 네가 떠나가던 그날을 되새길 거야. 네가 야옹거렸던 게 생각나서 평생 고양이도 못 기르겠지.”
“······.”
“너도 비슷할 거야. 그치?”
나는 세르펜스가 내 안전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책임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다.
너무 부담스럽고 때로는 짓눌릴 것처럼 무겁고 힘에 부치기도 할 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녀석은 그 책임감의 무게마저도 기꺼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서 모두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을 때와 다르게, 나는 녀석이 진정으로 지키고 싶다 생각한 첫 번째 존재다.
내가 자신에게 의지할수록 만족스러워하며, 자신의 힘으로 나를 지키고 나면 뿌듯함을 느끼겠지.
단지 그 이상으로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건 다시 가져가. 네가 진심으로 바라는 소원이 아니라면 못 들어 줘.”
나는 편지봉투 끝으로 페브를 밀어서 세르펜스의 바로 앞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