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8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87화(987/1105)
95. 공작님의 분노 (2)
좌중은 침묵했다. 그 누구도 내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의 무언은 곧 긍정이라고 봐야 한다.
결코 짧지 않은 정적이 흐른 뒤 입을 연 건 이자벨라 주교였다.
“네, 맞아요. 악마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거든, 시온 님 혼자서 영지 안으로 들어오라고···.”
그저 말을 전달하는 것뿐인데도, 이자벨라는 마치 자신이 죄라도 지은 양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본인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다.
“혹시 주교님께서는···, 시온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악마의 요구 따위를 들어줘서는 안 된다는 게 교단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교단 소속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세르펜스의 물음에 이자벨라가 화들짝 놀라 양손을 내저으며 부정하다가,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땐 힘없이 팔을 내렸다.
그녀의 말에 나는 거리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평온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해하며 초조함에 떠는 이는 없었다.
‘단순히 악마가 소환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만약 그런 이유가 아니라, 악마가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 거라 낙관하고 있는 거라면.
그 생각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악마가 저를 요구했다는 게 얼마나 알려졌죠?”
“아직은 베카 왕국 내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도시 규모의 영지에 사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역시나였다.
아까 거리에서 보았던 이들 대다수가 내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 이런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인지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어찌하여 교단은 소문을 막지 않은 겁니까?”
세르펜스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목소리가 사뭇 냉랭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이자벨라가 위축되어 몸을 움츠렸다.
괜한 사람을 잡는 것 같아서 세르펜스의 팔을 툭툭 치자,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내게 뒤통수를 보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제서야 이자벨라가 움츠렸던 몸을 펴고 질문의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악마가 점령한 영지의 사람 중, 그곳에 가정이 있는 몇몇 이들을 몰래 빼돌려 다른 영지로 보냈거든요. 그들을 잡아들였을 땐 이미 목격자가 너무 많아서···.”
그렇게 여러 영지로 흩어진 이들이 할 일이란 뻔하다.
악마가 한 말을 고스란히 옮기며 자신의 가족과 이웃들을 살려달라고 호소했겠지.
물에 빠진 자가 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간절한 심정으로 말이다.
“저,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한데 악마의 능력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돌연 유지스가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자벨라를 상대로 던진 질문이었으나, 유지스의 시선은 세르펜스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으로 보아 그녀는 일부러 대화 주제를 바꾸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게 틀림없다.
자꾸 나를 희생시키니 마니 하는 얘기가 오가 봤자, 진전되는 것 하나 없이 기분만 상할 테니까.
싸워야 할 적의 능력을 파악해 두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기도 하고.
“악마가 점령한 영지의 성벽이 검은 가시넝쿨로 뒤덮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전에 파괴된 두 개의 영지에도 가시넝쿨이 남았나요?”
“아니요, 오히려 기존에 자라던 식물들까지 전부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땅도 바짝 메말랐고요.”
“가시넝쿨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건 진짜 식물이 아니라 마기로 이루어진 형상이겠네요. 그리고 수분과 생명력을 앗아가는 능력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아요.”
유지스가 자신이 분석한 바를 입에 담으며 좌중을 쭉 둘러보았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얘기해 달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 처리다.
현재 들은 정보만으로는 그 이상의 추론을 내놓을 수 없었기에,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정보는 더 없나요?”
“당장은 없지만, 곧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에녹 추기경님께서 악마가 점령한 영지로 잠입하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다시 나오는 데 성공하신다면 추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어중간한 대답이다.
그 에녹 추기경이라는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을 거란 보장은 물론이거니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조차 확실치 않다.
“그런 불확실한 일에 추기경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나서도 되는 겁니까?”
“본래라면 현직 이단 심문관분들 중 한 명이 해야 할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젊고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사지로 보낼 수는 없다며···. 아! 에녹 추기경님은 몇 년 전 이단 심문관을 은퇴하시며 ‘베니그네’란 성을 새로 받으셨지만, 그 이전까지는 ‘시카’를 성으로 사용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은신과 잠입 실력만큼은 어지간한 현직 이단 심문관 못지않습니다.”
내 물음에 이자벨라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시카’라면 현재 테일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이다. 즉, 에녹 추기경은 테일러를 가르친 선임이라는 게 된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으나 이자벨라의 얘기만 들으면 무척이나 좋은 사람일 것 같다. 희생정신도 뛰어나고.
정보는 못 구해도 괜찮으니 부디 죽지 않고 탈출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혹시 병력 지원이 필요할까요?”
속으로 에녹 추기경의 무사 귀환을 빌고 있는데, 이자벨라가 너무 당연해서 터무니없게 들리는 말을 했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니 이자벨라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악마가 점령한 영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베타 왕국군이 주둔해 있거든요. 원래는 성벽을 따라서 일정 거리를 두고 포위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악마가 사람들을 가시넝쿨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여 사기가 떨어지기도 하고, 고문당하는 사람이 비명과 함께 신의 사자를 데려와 달라고 외쳐대는 통에···. 만약 지원이 필요하시다면 병력을 이동하라는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이번에 소환된 악마가 그럭저럭 머리를 쓸 줄 알며, 보통 잔인한 놈이 아니라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런 놈이 나를 데려오라 했다는 건가?
섬뜩한 기분에 진저리를 치며 옆을 힐끔 바라보니, 세르펜스의 표정도 장난 아니게 섬뜩했다.
“여러분이 이곳에 오셨다는 건 악마도 아직 모를 테니, 제국에서 보낸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셔도 괜찮습니다.”
“먼저 저희끼리 얘기를 나누고 답을 드려도 될까요?”
“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볼 테니 편히 대화 나누세요.”
내 부탁에 이자벨라가 선뜻 대답하며 회의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탁, 조심스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림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선우, 설마하니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희생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애초에 악마가 약속을 지킬 리가 없잖아?”
사람 목숨을 인질로 잡는 놈치고, 요구 조건을 들어줬을 때 인질을 무사히 풀어주는 놈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인질을 진작 죽였거나, 풀어주는 척하고 죽이거나.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은 후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반쯤 죽이고 풀어주거나, 시한폭탄 따위를 부착하고 풀어주거나.
대개 그따위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데서 자주 봤지.’
인간도 악독한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 짓을 악마가 못할 리 없다.
심지어 놈이 요구하는 건, 세르펜스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새로운 인질이다.
돈 놓고 돈 먹는 도박판도 아니고, 인질을 내걸고 더 가치 있는 인질을 얻으려 하다니 도둑놈 심보가 따로 없다.
“세르펜스, 너야말로 이제 와서 나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하려는 거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라. 선우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잖은가. 그러니···. 만약 이곳에 머무르는 게 돌아가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여겨진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
나는 세르펜스에게 따지고자 입술을 뗐다가 도로 닫았다.
녀석의 발언이 내게 많이 양보한 결과라는 걸 아는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할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세르펜스는 강제로 책임을 떠안고 희생을 강요당하던 삶을 살아왔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며, 그러다 무너져버린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 타이밍에 저런 말을 한 거겠지.
그런 녀석의 앞에서 나는 멀쩡할 거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비난 따위 내 알 바 아니라고 떠들어댄들. 녀석은 믿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나 또한 자신할 수 없기도 하고.
“그보다 나를 죽이려 하길래, 나를 회유하거나 인질로 잡는 건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는데···. 포기한 건 회유뿐이었나?”
“악마는 선우가 희생할 거라고 생각하여 그런 조건을 내건 게 아닐 거다. 만에 하나 선우가 희생하려 하거나, 사람들이 강제로 선우를 납치해 악마에게 바치려 해도. 내가 막을 테니까.”
그건 그렇다.
세르펜스는 내가 이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게다가 악마도 나를 납치하지 못하여 인질극 따위를 벌이고 있는 판국에, 그 누가 세르펜스의 밀착 경호를 뚫고 나를 납치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악마가 그런 요구 조건을 내건 건. 순전히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추악한지 보여주고, 그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 우리의 전의를 꺾기 위함일 테다.”
“늘 하던 짓이네.”
“그래, 늘 하던 짓이지. 다만 이번에는 휴마누스나 내가 아니라, 선우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거다.”
“···그렇겠지.”
악마가 지금 점령한 영지의 사람들을 몰살시킨다면 그건 전부 내 탓이 될 거다.
실제로 내 잘못은 하나도 없고 그들을 죽인 건 악마라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죽인 것처럼 얘기가 퍼지겠지.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다 많은 이들을 죽게 놔뒀다고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게 신의 사자가 할 짓이냐며 비난이 쇄도할 테고, 내 입지까지 흔들릴 거다.
“하지만 그런 비난이 두려워 도망칠 거라면, 이곳에 남겠다고 결심하지도 않았어.”
“···악마가 인질로 잡고 있는 인간들을 전부 죽이더라도, 그건 선우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만 잊지 마라.”
세르펜스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걱정됐나 보다.
나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야 당연하지! 악마가 한 짓이 어떻게 내 탓이 될 수 있겠어?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내가 존재했기에 인명 피해가 줄어든 거 아닌가? 만약 내가 없었으면 그 악마 놈은 영지 하나에 눌러앉아 인질극을 벌이는 대신, 여기저기 쏘다니며 학살극을 벌였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됐다.”
시종일관 얼어붙어 있던 세르펜스의 표정이 녹아내리며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는 매우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내 머리는 왜 쓰다듬는 거야?”
“선우도 내가 기특한 말을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잖은가. 그대로 배워서 따라 하고 있는 거다.”
“어쭈? 이게 한 살 더 먹었다고 기어오르려고 하네?”
“그럼 안 되는가?”
“안 될 거야 없지.”
나는 픽 웃으며 세르펜스가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게 내버려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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