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8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88화(988/1105)
95. 공작님의 분노 (3)
그렇게 세르펜스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힐링 타임을 즐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녀석을 부러워한 아니마가 에드나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슬그머니 타고 올라 정수리에 손이 다다랐을 무렵.
“이제 남의 머리는 그만 쓰다듬고 슬슬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 보는 게 어때?”
휴마누스가 생산적인 얘기를 하자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세르펜스와 아니마 모두 그 말을 듣고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휴마누스의 말이 완전히 무시당한 건 아니었다.
아니마는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세르펜스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으니까.
그 탓에 내 머리를 쓰다듬는 녀석의 손길이 서서히 느려졌다.
“선우를 희생시킬 생각은 없으나 대놓고 인질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그자들을 구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쳐야 합니다.”
세르펜스가 계속해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인질을 구하면 구하는 거지, 구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쳐야 한다는 건 또 뭔가 싶다.
이 녀석, 사람들 구하기 싫은 건가?
“어떤 식으로?”
할 말은 많으나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조용히 있는 나와 달리,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의 말에 관심을 내비쳤다.
아니, 휴마누스의 눈동자가 내 머리 위를 흘깃거리는 걸 보면 저쪽도 ‘할말하않’ 상태인가?
“우선은 제국에서 오고 있다는 지원군을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제국군과 왕국군이 영지에 갇힌 이들을 구출하는 동안 우리가 악마의 이목을 끌기만 해도, 어느 정도 생각이 있는 이들은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해 줄 겁니다.”
“세르펜스라면 뭔가 대단한 계획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정공법이네.”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선우를 미끼로 쓰는 건 너무 위험하고, 제가 홀로 영지에 잠입하여 악마의 암살을 시도하는 건···.”
“그냥 정공법으로 가자.”
세르펜스가 본인 혼자 악마를 암살하러 가는 방법이 있다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휴마누스가 정색했다.
그 반응이 퍽 마음에 든다는 듯 세르펜스가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녀석의 손이 내 머리에서 휴마누스의 머리로 옮겨가는 일은 없었다.
“운이 좋다면 제국의 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 영지에 잠입했다던 추기경이 유의미한 정보와 함께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렇게 말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에서 기대감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휴마눈새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며 하하 웃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웃음을 멈추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생각 있는 자들은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인정해 줄 거란 얘기는···. 생각 없는 자들은 우리를 비난할 거란 뜻이야?”
“네. 인질로 잡힌 이들이나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영지에 진입한 군사들이 일부라도 죽는다면, 그들은 비난을 쏟아부을 겁니다. 신의 사자 한 명만 희생시켜도 됐을 일인데, 불필요한 사상자를 냈다고 말입니다.”
“······.”
다른 건 몰라도 인질을 구하기 위해 나선 이들의 죽음까지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까닭일까?
입을 꾹 다문 휴마누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리고 만약에···. 절대 그럴 생각은 없으나 선우가 희생했다고 가정하자면. 그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악마와 거래를 했다든가, 신의 사자를 악마에게 바쳤다며 비난할 겁니다. 더불어 악마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렇게 될 줄도 몰랐느냐며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조소를 보내올 겁니다.”
“잠깐만, 그럼 뭘 하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
“악마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 신의 사자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치에 맞는 반응을 보일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세르펜스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녀석의 손은 내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녀석보다 늦게 쓰다듬을 시작한 아니마는 진작 손을 내리고, 제 팔뚝을 주물럭거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세르펜스의 손을 떼어낼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뒀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나 두고 보자.
“그런 자들은 상황의 이해와 공감 없이 오로지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고자, 제 딴에는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허술한 논리를 늘어놓을 뿐입니다.”
“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걸까? 우리를 비난한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굳이 그런 자들을 이해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그렇긴 한데···. 내가 황태자로서 배웠던 것들과는 너무 달라서,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혹은 터무니없는 비난을 들을 때마다 너무 당혹스러워.”
휴마누스가 갑갑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체 누가 황태자에게 ‘장차 전하께서 다스리게 될 백성 중에는 타인의 선의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그것을 빌미로 선을 행하는 이들을 비난하길 즐기는 쓰레기가 섞여 있사옵니다. 그것도 지금 떠올리신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이요.’ 하는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어렸을 적부터 그딴 가르침을 듣고 자라면 폭군이 될 게 뻔하다.
제국을 말아먹고 싶어 환장한 놈이 아닌 이상, 황태자에게 힘없고 가련한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을 테다.
“아!! 그래서 선택의 날 이전에 만났던 휴마누스의 머릿속이 꽃밭이었구나?!”
“선우야···? 너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아닙니까?”
“······.”
양심적인 휴마누스는 차마 내 말에 부정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 *
며칠 뒤 제국에서 보내온 지원군이 베카 왕국군과 합류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동안 우리는 신전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면 악마가 성검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베카 왕국의 영토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악마가 알게 된다면, 놈은 어떻게 반응할까?
어서 나를 내놓으라고 재촉하며 인질로 붙잡아둔 영지민들을 죽이겠지.
“이제 슬슬 군사를 이동시키고 우리도 움직이는 게 좋겠···, 응?”
보고서를 확인한 휴마누스가 말을 하다 말고 회의실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서 나도 문을 쳐다보았으나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들어올 사람은 곧 나타났다.
똑똑똑똑, 빠른 노크 소리가 울렸다.
얼마나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지, 급한 용변 신호를 받은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 회의실을 화장실로 착각한 줄 알았다.
의아함을 느끼며 들어오라고 말할 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이곳까지 달려온 건지, 문을 연 신관은 땀까지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도, 도와주세요···!!”
“무슨 일인데요?”
“에, 에녹···, 추기경님께서 오셨는데···. 상태가 위급하셔서···.”
악마가 점령한 영지는 여기서 꽤 멀다.
그런 곳에 잠입했던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와서 치료를 받으려 하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신전에 널리고 널린 게 성직자들이며 본인도 추기경인데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어서 가 보죠.”
“이, 이쪽으로···!”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힘들다며 주저앉을 듯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달리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신성력으로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 게 틀림없다.
“성직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면 됩니까?”
“네, 네에···!”
세르펜스의 물음에 신관이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대답했다.
그러고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더는 자신이 길을 안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쓰러진 걸 테다.
쿠당탕 하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얼마나 아프게 넘어졌는지 짐작이 갔다.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는데 몸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주변 풍경이 휙휙 빠르게 지나쳤다.
확인하지 않아도 나를 들어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승차감이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몸을 맡기고 뒤를 돌아보았다.
넘어진 신관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신성력으로 제 무릎을 치료하는 모습이 보였다.
숨을 돌리는 것보다 치료를 우선하는 거로 보아 무진장 세게 넘어졌나 보다.
어쩐지 소리가 엄청나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다.
세르버스는 총알택시 뺨치는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데다가, 최첨단 세르네비까지 탑재되어 있다.
그 덕분에 나와 세르펜스는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세르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둥글게 모여있는 성직자들 사이로 파고들어, 에녹 추기경의 상태를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나를 붙잡은 탓에 그러지 못했다.
“악마가 에녹 추기경님의 몸에 마기의 씨앗을 심었다고 합니다.”
먼저 와 있던 이자벨라 주교가 에녹 추기경의 상태를 알렸다.
‘씨앗’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몸에 들어간 마기가 말썽이라는 얘기다.
최근 내게 비슷한 일이 생겼고, 그로 인해 한 차례 홍역을 치렀던 세르펜스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추기경이면 체내 신성력도 많을 텐데, 어떻게 안 돼요?”
“그 덕분에 씨앗의 발아를 억누르고 이곳까지 오실 수 있었던 겁니다.”
씨앗이라더니 발아도 하나 보다.
이번에 소환된 악마가 식물과 관련된 능력을 지녔다는 걸 떠올려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윈스톤 경.”
세르펜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윈스톤을 불렀다.
이런 상황에 윈스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나 싶어 의아함을 느낄 무렵, 세르펜스가 붙잡고 있던 내 팔을 윈스톤에게 양도했다.
‘아하! 내가 에녹 추기경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는 데 필요했구나?’
내가 윈스톤의 쓰임새에 관해 고찰하는 사이.
세르펜스는 휴마누스, 리에나와 함께 에녹 추기경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추기경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성직자들이 좌우로 갈라지듯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면서 마력 구속구를 착용한 채, 반듯하게 누워있는 에녹 추기경의 모습이 드러났다.
“발아되기 전의 씨앗이면 한 덩어리로 뭉쳐있을 테고, 그 기운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신성력으로 두껍게 감싸는 거로 충분할 것 같은데···. 기절해서 그게 안 되나?”
“마력 구속구라면, 마기의 씨가 발아했을 때 주변에 끼칠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용도입니다.”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이자벨라가 바로 의문을 풀어 주었다.
이 사람을 비롯하여 다른 성직자들이 이곳에 몰려있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겠지.
마기의 씨앗이 발아했을 때 얼마나 큰 식물이 자라날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하기 위함일 테다.
“무, 무슨 일이래요?!”
세르버스에 탑승한 나와 푸로르 라이더 리에나와 달리, 직접 달려오느라 뒤처졌던 에드나와 아니마가 이제야 도착했다.
에드나의 물음에 나는 알고 있는 바를 최대한 간결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에녹 추기경이 체내 신성력으로 마기의 씨 발아를 막고 있긴 한데, 그걸 없애는 건 불가능한가 봐요.”
“마기 이 씨X아···요···?”
“······.”
다시 설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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