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8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89화(989/1105)
95. 공작님의 분노 (4)
나는 띄어쓰기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며 ‘씨X아’를 ‘씨앗 발아’로 정정했다.
“아, 그렇군요. ‘씨X아’가 아니라 ‘씨앗 발아’···.”
에드나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정정된 내용을 중얼거렸다.
제대로 알아듣고 정확히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에드나의 입을 거치니 욕처럼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씨앗의 발아’라고 말하게 시켰는데도 여전히 욕같았다.
좀 더 에드나를 붙들고 발음을 교정해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때와 장소가 적절치 못했다.
“심장에 자리를 잡은 마기 덩어리가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힘을 계속 키워나가고 있군요. 그래서 에녹 추기경님께서 신성력으로 그것을 정화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던 거예요. 정화되는 것보다 늘어나는 게 더 빠르니까요. 반면에 추기경님의 신성력은 마기를 억누르며 생명력까지 회복시켜야 하니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네요.”
리에나가 에녹 추기경의 현재 상태를 짚어냈다.
그러면서 ‘마기의 씨앗’ 대신 ‘마기 덩어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분명 에드나의 쌍시옷 발음을 들어서 그런 걸 테다.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추구하는 자세가 존경스럽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서둘러 마기의 씨앗···. 아니, 마기 덩어리를 정화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마기 덩어리가 외부에서 들어온 신성력에 반응하여, 추기경님의 심장을 터트리려 해서···.”
이자벨라 주교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어째서 자신들이 마기 덩어리를 정화하지 못했는지 설명했다.
에녹 추기경의 체내 신성력에는 반응하지 않으면서, 외부에서 신성력이 들어오면 심장을 터트리려 하다니.
아무래도 마기 덩어리는 일부러 에녹 추기경을 살려두고 있는 듯하다.
그의 생명력을 양분 삼아 더욱 강하고 거대한 식물을 키워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적당한 양의 신성력은 생명력을 계속 보충해주니 내버려두고, 너무 많은 양의 신성력이 들어오면 에녹 추기경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위협한다는 거네.’
내게 기억 상실을 유발했던 마기와 여러모로 다르다.
하지만 여차하면 마기가 날뛰어 몸의 주인을 죽이려 든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렇다면 세르펜스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일행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그들의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향했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에녹 추기경의 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 희미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미약한지, 아주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그 빛이 은색이 아닌 백색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색의 신성력을 다룰 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일까?
아니면 은색과 백색의 빛이 원체 비슷한 데다가, 희미하기까지 해서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세르펜스가 발하는 신성력이 널리 알려진 정보와 달리, 백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의아해하는 성직자는 없었다.
“외부에서 신성력을 불어넣으면 심장이 터진다면서요?”
“마기 덩어리를 정화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적은 양의 신성력을 흘려 넣어, 소실된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 중요한 얘기는 왜 빠트린 겁니까?”
“생명력이 회복되는 만큼 마기 덩어리에 더 많은 힘이 응축되는지라···.”
내 물음에 이사벨라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에녹 추기경의 생명을 연장할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빼먹을 수 있나 싶다.
그래서 따지려고 막 입술을 뗀 순간.
“저, 저기···. 추기경님께서 저희 쪽 신전에 오셨을 때,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시키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건 마기의 씨···가 아니라, 마기 덩어리에 힘을 실어주는 거나 다름없다고···.”
신관들 사이에 끼어있던 성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반 성기사보다 갑옷의 문양이 화려하고 망토까지 두른 거로 보아 단장급인듯하다.
그리고 ‘저희 쪽 신전’을 운운한다는 건 이곳이 아닌 다른 신전 소속이라는 거겠지.
에녹 추기경이 제 발로 이곳까지 찾아온 게 아니라 저 성기사 단장이 옮겨 줬나 보다.
그리고 추기경이 저 성기사 단장의 소속 신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 같고.
“정화를 시도하기에 앞서, 제 신성력이 이분의 심장에 다다를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야 날뛰는 마기로부터 심장을 보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신성력을 거두며 말하는 세르펜스를 향해, 성기사 단장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우리 애 능력을 의심하는 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도끼눈을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아니면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건지, 성기사 단장이 서둘러 변명의 말을 주워섬겼다.
“현재 추기경님의 심장에 자리를 잡은 마기 덩어리는 상급 악마의 것인 데다가, 응축된 힘 또한 엄청납니다. 그것으로부터 심장을 보호하려면 상당한 양의 신성력이 필요할 텐데···. 아무리 조심하며 신성력을 흘려 넣어도, 그만한 양이 모이기 전에 마기의 덩어리가 싹을 틔우며 심장을 터트려 버릴 겁니다.”
중요 장기를 보호하며 정화를 병행하는 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다.
그런데도 이만한 인원이 모여서, 그 방법을 시도조차 못 하고 있는 게 저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세르펜스가 새롭고 창의적인 해결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실패할 것이 뻔한 방법을 시도하려 한다고 생각한 걸까?
성기사 단장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에녹 추기경님께서 알아내신 정보를 제게 말씀해 주셨다는 겁니다.”
다행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성기사 단장은 조금도 희망차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다행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정보를 운운한다는 건, 에녹 추기경을 살리는 걸 포기한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성직자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나 때는 주변에서 누가 신성력을 사용하기만 해도 발작을 일으켰는데. 적은 양이나마 몸속에 신성력을 흘려 넣을 수 있다면 감지덕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떠올리고 보니 다소 꼰대 같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때보다 지금이 낫다.
물론 내 몸속에 들어왔던 마기는 중급 악마의 것인 데다 양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 힘을 조종한 존재가 무려 마왕이었다.
반면에 에녹 추기경의 심장에 자리를 잡은 마기 덩어리는 조종하는 이조차 없는 듯했다.
만약 악마가 직접 저 마기를 컨트롤할 수 있다면, 에녹 추기경은 알아낸 정보를 발설하기도 전에 심장이 터져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 때’와 지금을 비교하려면 모든 사정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이들이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잘 해결되겠지.’ 하고, 낙관적인 생각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하겠지.
“그 얘기는 마기를 정화한 이후에 듣겠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겁니까···?”
“네.”
세르펜스가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그 한마디에 성기사 단장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얼굴 위로 기대감이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끄으으윽···!”
얼굴을 찡그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시체로 착각할 만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미동조차 없었던 에녹 추기경이 돌연 신음을 흘렸다.
몸을 뒤틀지도 못하고 힘없이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이제 정말 서두르셔야 해요. 에녹 추기경님의 신성력이 완전히 고갈됐어요!”
리에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추기경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녹색 머리칼 사이로 희끗희끗 자라난 새치가 빠르게 늘어났다.
아무래도 마기 덩어리는 싹을 틔우기 전에, 마지막 한 줌의 생명력도 남기지 않고 흡수할 생각인가 보다.
세르펜스는 이렇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 조금의 당혹도 드러내지 않고 추기경의 가슴에 다시 손을 얹었다.
아주 약간의 차이였으나 조금 전보다 선명한 백색 빛이 스며들자, 추기경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흰머리도 더는 늘지 않았다.
“엇···? 프라시더스 님의 신성력은 분명···.”
아직도 밝은 빛이라 말하기는 부족하지만, 그럭저럭 색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디선가 의문 담긴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그 소리에 신경도 쓰지 않고 휴마누스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제가 신호를 주면 최대한 힘을 끌어 올려, 단번에 마기를 정화해 주십시오.”
“응? 리에나가 아니라 내가?”
가만히 지켜보던 휴마누스가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에 세르펜스는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마누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성검을 뽑아들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세르펜스가 최대한 힘을 끌어 올리라고 했으니, 성검의 신성력 증폭 기능을 활용하기 위함일 테다.
그게 정답이었는지 세르펜스는 그런 휴마누스를 말리지 않았다.
“저, 저기···.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신관 무리 사이에서 불안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한 게, 에녹 추기경의 목에 채워진 마력 구속구에 서서히 금이 생기고 있었다.
아직은 세르펜스가 회복해주는 생명력을 흡수하느라 얌전히 있긴 하지만.
발아를 억제하던 에녹 추기경의 신성력이 사라졌으니 언제 싹을 틔울지 모른다.
모두의 불안감과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된 순간.
“지금.”
세르펜스의 신호와 함께 휴마누스의 황금빛 신성력이 마치 폭포수처럼, 거칠고 강맹한 기세로 추기경의 몸 위로 쏟아졌다.
시야를 가득 채운 황금빛 물결이 사그라든 후에도, 은은한 백색의 빛은 한동안 더 머물다가 사라졌다.
“다 끝난 것 같아서 묻는 건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끈 거야? 마기를 막을 수 있을 만한 양의 신성력을 모으느라 그랬다고 하기엔, 오히려 마기를 더 키우고 있었던 것 같은데···.”
휴마누스가 살짝 지친 표정으로 성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물었다.
정말 나도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에녹 추기경이 노쇠한 몸으로 너무 고생한 것 같은데, 일부러 극적인 효과를 노리느라 그랬다고 하면 아주 혼쭐을 내 줄 테다.
그렇게 벼르며 세르펜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곧 녀석의 입이 열렸다.
“보호해야 하는 건 심장뿐만이 아니잖습니까. 그 외의 주요 장기를 보호하고자, 제 신성력이 깃든 생명력이 전신에 퍼질 때까지 기다리느라 늦어졌습니다. 추기경님의 신성력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두고 본 것 또한 비슷한 이유입니다. 제 신성력으로 추기경님의 신성력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는 있으나, 온전히 제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여···.”
세르펜스가 본의 아니게 추기경을 고생시킨 것 같아 죄송하다는 양, 가련한 표정을 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거짓말이 분명하다.
타락펜스가 룩스메아의 힘을 제 것처럼 다뤘는데, 세르펜스가 의식이 온전치 못한 사람의 신성력을 다루지 못할 것 같지가 않다.
만약 의식이 있더라도, 살기 위해서라도 적극 협조해 줄 텐데 뭐가 문제일까.
“그보다 급한 문제는 해결했으니, 이제 추기경님께서 목숨을 걸고 알아내신 정보를 듣고 싶습니다.”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당장 녀석에게 진짜 이유를 말하라고 따지고 싶지만, 듣는 귀가 많으니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990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