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99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992화(992/1105)
95. 공작님의 분노 (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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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추가 정보는 없었네.”
“으음···.”
“그래도 씨앗···, 같은 마기 덩어리의 위험성에 대해 알게 됐잖아?”
“으으음···.”
“세르펜스. 네 승마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보는 내가 불안해서 그런데 앞을 봐 주면 안 될까?”
옆에서 반쯤 사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떠난 지 한참이 흐른 터라 선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아니, 그렇기에 나는 선우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불안함을 드러낼 수 있었다.
선우의 안전을 책임지는 내가 불안해한다면, 선우는 불안함을 넘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나를 달래느라 자신의 마음은 달래지 못할 테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선우가 내게 쏟는 관심과 걱정스레 건네는 다정한 말이 지나치게 달콤해서.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거다. 달라져야만 한다.
외부의 위험뿐 아니라, 선우의 내면에 자리한 외로움으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하여 함께 행복해지자는 바람과도 같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뒤쪽을 향하던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들 강하잖아. 게다가 신전에는 성직자도 많고, 에녹 추기경도 곧 기력을 회복할 테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악숭이들이 그곳을 공격하더라도 아무 일 없을 거야.”
휴마누스가 모두 괜찮을 거라며,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 말하였다.
예전이라면 이런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터다.
오직 나만이 진심으로 선우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노라 자만하며, 위로의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빈말로 여기며 흘려들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휴마누스를 비롯하여 모든 이가 선우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우가 자신의 외로움과 불안함을 뒤로하고 나를 달래주었던 것처럼, 그들 또한 걱정을 애써 덮으며 긍정적인 말을 입에 담았던 거다.
자만이 눈을 가리지만 않았더라면 훨씬 일찍 알아챘을 테다.
선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누구든지 그에게 정을 줄 수밖에 없으니까.
이 당연한 이치를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고맙습니다, 휴마누스.”
“어? 으, 응.”
감사의 마음을 담아 휴마누스를 향해 웃어 보이니, 그가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열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그를 냉담하게 대했으면 저런 반응을 보일까 싶어 미안해졌다.
휴마누스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어디를 가든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
내가 끊임없이 타인과 거리를 두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시절에도, 휴마누스는 늘 먼저 다가와 곁을 지켜주었다.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친우’라 말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외롭게 했다며 늘 미안해했다.
‘선우가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휴마누스와 거리를 좁히지 못했겠지.’
처음에는 선우가 자신 이외의 이들과도 잘 지내보라며, 내 등을 떠미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선우가 들어왔고, 그의 존재감만으로 내 세상이 꽉 채워졌으니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선우와 함께하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휴마누스와 유지스, 윈스톤 경과 함께하는 시간도 꽤 만족스러웠다.
그들이 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나는 더욱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내 마음도 풍족해졌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나면 다른 일행들과도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내가 선우에게 매여있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선우가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 시간이 늘어날 테니.
그렇게 된다면 선우가 느끼는 외로움도 줄어들지 않을까 한다.
‘또한 나를 향한 걱정도 줄어들 터···.’
씁쓸한 일이긴 하나 언제까지고 내 욕심 때문에 그를 속박해 둘 수는 없다.
선우가 많은 이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의 좋은 점을 혼자 알고 싶어서 그러지 못하게 막아왔다.
어쩌면 그 탓에 선우의 안에서 외로움이 켜켜이 쌓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후회스럽다.
이젠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괴로움에 허우적대며 내게 매달리는 선우를 독점하는 것보다, 태양처럼 밝게 미소 짓는 선우를 지켜보는 것이 더 행복할 터이니.
나도 그 옆에서 함께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약동했다.
불길한 상상을 떠올리며 불안에 떠는 건 나를 위축되게 했다.
반면에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니, 힘이 샘솟으며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강한 적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음에도 두렵지 않았다.
고삐를 강하게 다잡고 말을 빠르게 몰았다.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기운이 기지개를 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본디 내 것이었으나 존재조차 몰랐던, 아직도 조금 낯선 그 기운이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각성을 겪었을 때처럼 갑자기 강해졌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건 확실했다.
‘혹시 영혼이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게 아닐까···?’
어쩌면 곧 선우의 영혼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른 존재의 힘을 끌어와 어설프게 신의 경지를 엿본 2회차의 나와 다르게.
스스로의 힘을 성장시킨 나라면, 이목구비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날이 늦었으니 오늘 밤은 저희 신전에서 쉬어가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 성기사 단장이 소속된 신전에 도착했다.
이곳이 악마가 점령했다던 영지와 가장 가까운 신전이라고는 하나, 바로 인접해 있는 건 아니었다.
작은 영지 하나를 더 지나쳐야 그곳에 다다를 수 있으니, 이 정도 거리면 악마가 성검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아르얀 님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동하는 중에 성기사 단장은 깜박 잊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뒤늦은 자기소개를 했다.
휴마누스는 그때 들었던 그자의 이름을 퍽 친근하게 입에 담으며 내 의견을 물어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어째서 놀라시는 겁니까?”
“너라면 빨리 악마를 해치우고 시온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할 줄 알았거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이라면 상급 악마 정도는 무난하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프뤼네 왕국에서 싸웠던 악마처럼, 갑자기 최상급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적의 수준을 확신할 수 없고, 이제껏 합을 맞춰온 일행이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싸워야 하니 만전을 기하는 게 옳다.
“어? 이렇게 되면 오늘은 너랑 나 둘이서만 같이 자겠네?”
평소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아니건만, 어째서인지 휴마누스는 나와 함께 방을 쓰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오늘 밤은 선우가 곁에 없다고 생각하자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굳이 방을 따로 써야 할 이유 또한 없기에, 고개를 끄덕여 휴마누스에게 긍정의 뜻을 전했다.
나와 휴마누스는 이단 심문관들과 가벼운 통성명을 나눈 뒤.
이곳 성기사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신전에서 내어준 방으로 향했다.
“그냥 이단 심문관들만 같이 가는 게 낫겠지?”
방에 도착하자 휴마누스가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일반 성기사들의 수준이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더욱이 이번 적은 신성력 보유자의 몸에도 마기를 심을 수 있고, 생기를 빨아들여 힘을 키우기까지 했다.
어중간한 실력자는 함께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네, 그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응, 그럼 내일 내가 그렇게 얘기할게. 참, 그리고 씻는 순번은 어떻게 할까?”
“먼저 씻으십시오.”
휴마누스를 먼저 욕실로 들여보낸 후, 나는 방안에 비치된 테이블 앞에 앉아 틴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는 이전에 윈스톤 경이 생일 선물로 준 쿠키가 담겨 있던 것이고, 내용물은 선우가 채워준 르뱅 쿠키다.
오늘은 간식 시간을 따로 챙기지 못하였으니 자기 전에 쿠키를 조금 먹어 둘 생각이다.
‘이걸 아직도 먹지 않고 아껴뒀다는 걸 알면, 선우가 한숨을 내쉬겠지?’
선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번에 다 먹는 건 역시 너무 아깝다.
하루에 한두 개씩 먹는 게 딱 적당할 것 같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나는 신중하게 쿠키 하나를 골라 집었다.
‘그러고 보니 선우는 내가 없는 밤을 어떻게 지낼까···?’
요즘따라 부쩍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가 걱정되었다.
출발하기 전 윈스톤 경에게 선우의 곁에서 떠나지 말라고 당부해 둬서 다행이다.
선우의 호위를 맡아달라는 뜻에서 내린 지시였지만.
어찌 되었건 선우가 긴긴 밤을 홀로 눈물로 지새우지는 않을 것 같아 안심되었다.
나는 쿠키의 끄트머리를 살짝 베어 물며, 선우와 함께한 첫 번째 생일에 받았던 롤링 페이퍼를 꺼냈다.
가장 첫 페이지의 첫 문장은 [오늘따라 아주 예쁘고 반짝반짝한 길고양이를 마주쳤던 날이 떠오르네요.]였다.
워낙 자주 읽어서 글의 내용을 통으로 외운 건 물론이거니와, 눈을 감으면 잉크 양을 잘못 조절하여 번진 자국까지도 떠올릴 수 있었지만.
나는 선우의 필체를 눈에 담으며, 그가 열심히 이것을 적어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당시에는 그 고양이의 모든 것을 파악한 건 아니라서, 숨기고 있는 발톱의 날카로움만 알고 지레 겁을 먹었지 뭡니까? 알고 보면 외로움을 많이 타고 겁도 많은 데다가, 호기심도 많고 은근히 정도 많고···. 뭐 이리 많은 게 많지? 아무튼 그런 아기 고양이였는데 말이죠.]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땐 굉장히 민망했다.
나를 묘사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낯설었고, 그냥 고양이도 아닌 ‘아기 고양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특히나 당혹스러웠다.
그때만 해도 내가 선우 앞에서 고양이 흉내를 내며, 재롱을 부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추억에 잠겨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선우가 적은 글의 마지막 문장을 눈에 담을 즈음, 휴마누스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틴 케이스에 담긴 쿠키를 발견한 휴마누스가 ‘어쩐지 먼저 씻으라더니···.’ 하고 툴툴거렸다.
혼자 몰래 간식을 먹으려다 들킨 것 같아서 쿠키를 하나 권하니, 이미 양치하고 나왔으니 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상했던 답변이다.
나는 롤링 페이퍼와 틴 케이스를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욕실로 향했다.
그럭저럭 오늘 하루를 잘 보낸 것 같다.
돌아가면 떨어져 지내는 동안, 외로움에 울거나 불안에 떨지 않고 잘 다녀왔다고 선우에게 꼭 얘기해야겠다.
‘그러면 선우는 내심 서운해하면서도 장하다며 나를 칭찬해 주겠지?’
거울로 미소 짓는 내 모습이 비쳤다. 나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선우가 없는 밤은 쓸쓸하고 외로울 줄 알았건만 그렇지도 않았다.
이는 그와 함께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고,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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